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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몇 등급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10-06-25 (금) 13:33 13년전 4074  
                                     지금 몇 등급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정약용이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장남 학연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조정의 실권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약연의 사촌처남인 판서 홍의호(洪義浩)에게 편지를 보내 잘 봐줄 것을 부탁하고, 정약용의 유배해제를 반대하는 노론(老論)의 실력자 이기경과 강준흠에게 편지를 보내 동정을 구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장남의 편지에 이렇게 답을 보냈습니다.

<학연에게 답하노라 - 答淵兒 1816년 5월 3일

보내준 편지는 자세히 보았다. 천하에는 두 개의 큰 기준이 있으니, 하나는 옳고 그름(是非)의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利害)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단계의 등급이 나온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고,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면서 해를 입는 등급이고, 그 다음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는 경우이고, 가장 낮은 등급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해를 입는 경우이다. 너는 내게 필천(筆泉) 홍의호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할 것을 빌고, 또 강준흠, 이기경에게 꼬리를 치며 동정을 애걸해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바 세 번째 등급을 택하라는 것이나 필경은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질 것이니 내가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느냐? … 이미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모든 걸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다. 동정을 애걸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강준흠, 이기경이 뜻을 이루어 그럴만한 자리에 있게 되면 반드시 나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나를 죽인다고 해도 ‘순수(順受: 받아들임)’라는 두 글자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데 하물며 나를 석방시키라는 관문(關文:공식문서)을 저지시킨 조그마한 일 때문에 내가 절개를 굽혀서야 되겠느냐? 내가 비록 수절(守節)하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세 번째 등급도 될 수 없음을 알기에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지는 것은 면하고자 하려는 것뿐이다. 만일 내가 애걸한다면 세 사람이 모여 넌지시 웃으며 “저 작자는 참으로 간사한 사람이다. 지금은 애처로운 소리로 우리를 속이지만 다시 올라와서는 해치려는 마음으로 언젠가는 우리를 반드시 멸족(滅族)시킬 것이니 아아, 어찌 아니 두려운가?”하면서 겉으로는 풀어주어야 한다고 빈말로
나불거리면서도 뒷구멍으로는 빗장을 걸어버리고 위기에 처하면 돌멩이라도 던질 터이니, 바야흐로 나는 독수리에게 잡힌 새 꼴이 되어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지는 꼴이 아니겠느냐? 내가 꼭두각시가 아닌데 너는 나로 하여금 무엇 때문에 그들의 장단에 춤추게 하려느냐?… 내가 귀양에서 풀려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 하는 일은 참으로 큰일은 큰일이나,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극히 작은 일이다. 귀양이 풀려 집에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 하는 작은 일에 잽싸게 다른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며 애걸하며 산다면, 만약 나라에 외침(外侵)이 있어 난리가 터질 때 임금을 배반하고 적군에 투항하지 않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느냐? 내가 살아서 고향땅을 밟는 것도 운명이고, 고향땅을 밟지 못하는 것도 운명일 뿐이다.>(‘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정약용 지음)

정적(政敵)에게 구명(求命)을 청하여 일단 살 길을 모색한 후 후일(後日)을 도모하라는 자식의 편지에 정약용은 옳지 않은 길을 택해 이로움을 얻는 삼등인생의 길을 가기 보다는 차라리 옳은 것을 택하다가 해를 입는 것을 운명으로 알고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의연한 마음을 답신에 담아 보냈습니다. 시류(時流)와 재리(財利), 세도(勢道)를 좇아 송사리 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해(利害)의 기준보다 시비(是非)의 기준을 더 큰 기준으로 삼고 살았던 다산의 의연한 마음이 그립습니다.

최근 명백히 옳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옳지 않은 길을 고집하는 이웃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말로는 일류(一流) 진리를 말하면서 정작 사는 꼴은 삼류(三流), 사류(四流)의 볼썽사나운 꼴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부끄러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이익(利)을 좇아가느라 옳음(是)을 저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도리(道理)가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은 몇 등급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2010.3.13)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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