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김성

교회가 전쟁의 나팔수가 되어야 하는가?

김성 (서울동노회,예수원교회,목사) 2010-06-25 (금) 13:41 13년전 3506  

                                    교회가 전쟁의 나팔수가 되어야 하는가?  



                                
신약성서학 및 성서고고학, 인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존 도미니크 크로산의 최근작 <하나님과 제국 God and Empire>는 정의를 구현하는 방편으로서의 폭력의 유용성을 근본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크로산에 따르면 성서에는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폭력적인 하나님의 모습과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비폭력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노아시대 홍수심판은 세상의 죄악을 일소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며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겠다고 결심하시고 홍수로서 그 결심을 실행에 옮깁니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종말의 때에 일어날 큰 재앙과 환란, 그리고 아마겟돈전쟁의 환상 또한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여는데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반면 노아홍수심판 이후 하나님은 돌연이 다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모든 생명을 심판하지는 않겠노라며 무지개를 증표로 노아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 스스로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시며 땅위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통해서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은 믿음을 통해서 악한 인간을 선하게, 불의한 인간을 의롭게 변화시켜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시는 말씀입니다. ‘폭력적인 심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상에 구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크로산은 폭력적인 방법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본심을 가장 정확하게 읽고 그 방법으로 불의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폭력이 지배하던 당시에 예수님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그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회개운동을 계승했지만 곧바로 세례요한과 결별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전한 하나님은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폭력적인 하나님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다고 선포했으며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가차 없는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져온 하나님상(像)이며 로마치하에서 유대종말론자들이 가졌던 하나님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이 하나님상과 결별했습니다.

예수님은 진노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벌하시는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로 죄인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하시는 따뜻한 사랑의 아버지를 역설하셨습니다. 때문에 폭력적인 하나님을 들먹이며 사람들을 겁주지 않았고 불의한 세상에 맞서는 방법으로 폭력을 동원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체포되시는 순간 대제사장의 종을 칼로 치며 저항하던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26:52~53> 또한 체포된 후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빌라도에게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요18:36> 로마군병에게 체포되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뜻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정의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폭력적 하나님상과 하나님의 폭력적인 역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뿌리로 하여 출범했으나 유대교를 초월하여 보편적인 세계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아버지라도 어린아이 시절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과 다 자란 어른이 되어서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은 다른 것입니다. 아버지는 같아도 자녀가 성장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인식의 성숙과 확장이 아버지를 달리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폭력적인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유대교의 하나님 이해는 유아적인 이해에 머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과 긍휼, 용서와 자비의 아버지로 이해한 예수님의 하나님 이해가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한 것입니다.

최근 천안함사태의 정확한 원인규명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북한의 도발로 기정사실화하고 북한의 도발에 군사적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무책임하고 위험한 주장들이 보수언론과 일부정치세력에 의해 제기되고 있습니다. 교회마저 이에 동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의에 폭력적 방법으로 저항하지 않으려고 하셨던 예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교회는 지금 차분하게 잘 살펴야 합니다. 교회마저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 전쟁불사를 외치는 전쟁의 나팔수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더구나 정확한 책임의 소재조차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불신과 증오심을 부추기고 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응하려고 드는 것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교회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교회는 전쟁의 나팔수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평화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2010.5.14)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