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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희망이 있는가?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6-26 (토) 09:50 13년전 5671  

오늘 날 교회가 예수 없는 교회화되고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신뢰를 잃어버린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말은 넘치고 행동이 없는 신앙인, 기복주의적인 무당종교에 빠진 이들, 종교를 하나의 돈벌이 혹은 명예나 권력의 시녀로 삼아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몰상식한 이단아들 때문일 것이다.

장로교회의 경우  그렇게 되게한 책임은 교회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목사와 장로일 것이다.
장로교는' 만인사제론'에 기초하고 있다. 종교개혁이후 사제중심의 독선적인 신앙의 독점(?)을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지만 오늘 날에는 목사 스스로도 사제가 아닌 직업인 혹은 사업가로 변신을 하면서 목사로서의 권위를 상실했고, 교회의 원로라 할 수 있는 장로들은 신도의 위치가 아닌 감독의 위치에서 교회 전반의 것들을 감독하고 지시하는 것도 모자라 목사의 설교까지 평가하는데까지 이르러 이젠 한국 교회는 가히 사이비성의 목사들, 신실하지 못한 목사들과 사이비성 장로들, 신실하지 못한 장로들의 만행에 멍들어가고 교인들은 그로인해 상처를 받고,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데 심각한 장애를 받고 있다.

설교자는 영성훈련, 즉 깊은 사색과 명상과 신앙의 실천을 통해서 얻는 메시지를 전하지 못한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성서를 제대로(신학적으로) 풀어주기나 해야할 터인데, 성서의 본뜻을 왜곡하는 설교에 젖어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고지곧대로 예언자의 심정으로 전하면 청중은 위로보다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살이도 힘든데 교회에 와서는 위로를 받고 싶다는 청중의 욕망이 교묘하게 결합되면서 설교자는 청중을 거스르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청중들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 그들의 구미에 맞추어 설교함으로 설교자는 청중의 윤리수준보다 결코 나을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청중들의 윤리기준보다 낮은 윤리수준을 가진 설교자가 어떤 감동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받은 청중이 있다면 우매한 청중이거나, 사기꾼 설교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죽은설교, 결국 그것이 한국교회를 멍들게 했고, 한국교회에 예수가 없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내막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는 누구인가? 목사를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지교회의 장로들이다. 장로들의 요구 혹은 장로들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 목사가 그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의미있는 목회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부분 장로는 그 교회의 터줏대감이며, 목사는 청빙을 받아 오는 경우이므로 장로들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또 그 교회 출신이 자라 그 교회 담임목사가 된 경우에는 예수가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처럼 영적으로 훌륭한 품성을 가진 목회자라고 할지라도 고향교회에서 목회를 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 묘한 결합, 교회가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는 구성원들이 그 핍박을 이겨내기 위해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었지만 어느정도 안정되고, 게다가 기득권까지 갖게 된 다음에는 하나의 권력이 되었고 장로와 목회자간의 헤게모니 싸움은 오늘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조차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 위대한 설교자는 누구인가?
만일 2천년전 예수가 현재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했다면 그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를 넘나드는 설교, 가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독설, 심지어는 맘몬화된 한국교회의 무너짐, 실천없는 신앙인들의 허구를 파헤치는 메시지에 과연 땅을 치며 회개할 신앙인이 있기나 한 것일까? 아마 예수는 설교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기독교계의 이단아가 되었을 것이다. 설령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조차도 삶이 아닌 이론으로서, 지적인 신앙을 대리만족하는 정도 이상이 아닐 것이다. 그나마 후자의 경우는 회심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설교를 누가 듣기를 원할 것일까?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 예수가 오시어 설교를 한다면 위로의 메시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일 터이고, 위로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곳은 갈릴리 같은 곳일 터이니 예수는 결코 아멘이 충만한 한국교회에서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10대교회(양적으로)가 한국에 즐비하고, 세계 최고의 교회(양적으로)를 이끌어가는 이 시대의 설교자들이 있다. 그런데 청중들이 열광하는 그들의 설교는 살아있는 설교가 아니다. 자기도 천국에 가지 못하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이들의 길목을 막고 있는 형국, 그들은 너무도 깊은 자기도취에 빠져 자신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확신있게 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자기의 설교 혹은 목회방식을 배워 교회를 부흥시키라고 장사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목회가 성공한 목회라고 여기고 그 뒤로 쫓아가기를 열망하는 목사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이런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교인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목사를 찾는 일이 한층 수월해졌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여기에 있다.
이제 교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 설교를 하는 목사는 교회에서 퇴출대상이다. 진실성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청중의 입맛을 채우려는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이를 감시하는 교인들의 대표인 장로, 이들의 관계가 밀월관계일 때에는 좋은게 좋은거지만 삐끗하기 시작하면 신앙으로 가장한 마녀사냥이 시작되고, 자신들이 하는 모든 조처들은 신앙을 지켜내기 위한 의로운 싸움이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도저히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제도교육에 반기를 든 대안학교(그렇다고 대안학교가 대안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가 있듯, 대안교회가 있어야 하고, 그런 실험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도 있다. 미력한 부분도 있지만 그들이 한국교회의 희망이다.

여기저기서 한국교회의 자성을 촉구하지만, 그 자성을 촉구하는 이들 조차도 그것을 통해 개인의 명성을 높이는데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의로움을 높이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것처럼 추한 것이 어디있는가? 초연한 척하면서 그것을 상품화 시키는 기술, 그것까지도 벗어버려야 한다. 사실, 신앙이란 삶이다.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숨쉬듯 살아가면 될 일이다. 숨쉬는 일에 무슨 가타부타 이론이 필요한가? 설교자는 숨을 쉬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임을 알려주고, 어떤 곳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것이 더 인간다운 삶인지 정도를 안내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설교에 대해서 인정을 하되 나는 그럼에도 도시의 삶을 살겠다거나, 불편하더라도 시골의 삶을택한다거나 그것은 청중의 몫이다. 어디에 살아라 강요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에 살아도 사람이요,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의미없지 않다 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지금 주어진 삶 속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삶 따로 신앙 따로....

설교자는 자시가 선포한 메시지에 청중이 눈물을 쪽쪽 짜면 감동을 받는다. 자기가 선포한 말대로 살지 못함을 회개하지 않는다. 오로지 청중들을 향한 설교만 있을 뿐이다. 자기를 향한 설교가 없다. 이 얼마나 알팍한 설교인가?

결국 설교중심인 개신교가 이런 얄팍한 설교자의 설교때문에 병들어가기 시작했고, 장로교의 경우에는 얄팍한 설교를 통해 설교자의 권위를 하나둘 잠식해 들어온 장로들의 권위가 맞물리면서 한국교회의 위기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서로 돕는 동역자가 아니라, 서로 경계하고 감시하는 관계가 되어 누가 교인을 자기 편으로 많이 만드느냐가 그 교회의 주도권을 쥐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이런 일들이 축적되면서(겨우 100년 조금 넘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모태(2천 년이 훨씬 넘는)까지도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개신교인들 중에서 타종교는 물론이고 이슬람은 물론이요 카톨릭까지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만 봐도 한국교회가 얼마나 기형적인지 알 수 있다.

한국교회, 희망이 있는가?
목사로서 무책임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예!'라고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전혀?"라고 물어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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