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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앎, 신앙 (中): "추신"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0-07-30 (금) 22:45 13년전 6357  


                                                                                                                         순천만


1.

예배당 지하주차장 진입로가 외져서 ‘불량인간’들이 머물곤 했는데, CCTV를 설치하고 나서 한결 나아졌다는 것을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이 변화의 원인(遠因: 먼 원인)은 설치된 CCTV라는 사태이겠죠. 그러나 근인(近因: 가까운 원인)은 불량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CCTV가 있다”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만으로 불량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믿음이 “뒤탈이 없기를 바란다”는 욕구와 결합되면서 도출되는, “저 곳에 접근하지 말아야한다”는 명제가 그러한 행동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용된 믿음이라는 용어가 뭔가를 빠뜨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제가 언급하고 싶은 핵심을 이미 감 잡고 계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상 언어는 대개 다의적(多義的)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자이시다”는 것을 믿는다>에서와 <하나님을 믿는다>에서의 ‘믿는다’의 의미는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쌍따옴표 안에 있는 문장의 주장 내용(명제)이 참이라는 것을 화자(話者)가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고 후자에는 하나님께 대한 화자(話者)의 인격적 관계가 들어있습니다.


혹시 후자를 전자로 분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요.


하나님을 믿는다 =  “하나님은 A이다”는 것을 믿는다  +  “하나님은 B이다”는 것을 믿는다  +  “하나님은 C이다”는 것을 믿는다  +  …  +  ….


그러나 아마도 우변(右邊)은 완성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좌변의 ‘믿는다’에는 명제에 대한 태도(propositional attitude) 외에 “하나님께 대한 정감(情感)”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2.

그러나 우리의 어법에서 ‘믿는다’는 말은 전자 즉 명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믿쉬움니까?” 할 때 설교자는 자신이 주장한 바를 회중이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고 있지요. 명사형인 ‘믿음’의 반대말을 ‘의심’으로 설정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유래합니다. 믿음에는 정도가 있는데요, 가장 강한 믿음을 확신이라고 하고 믿음의 정도가 낮아질수록 그 자리를 의심이 차지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도마의 의심(요 20:27)도 같은 맥락입니다.


일반적인 주제에서도 ‘믿음’은 본격적으로 이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인식론에서 전통적으로, 지식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지식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플라톤)이라는 것이죠. 인식론은 이 정의로부터 논의를 시작합니다. 보통 우리는 “지식”하면 “교과서”를 떠올리고 그래서 지식은 어떤 사회 집단에 귀속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식”은 “앎”이니 근본적으로 특정한 개인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1) P라는 명제를 믿고 있는데 (2) 그렇게 믿는 것이 모종의 정당성을 지니고 (3) 그 P가 참이면, 그 사람은 P를 알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명제에 대한 태도”의 일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앞 글에서 언급한 '일반적인 믿음(belief)'은 이런 의미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오래 전 토론게시판에서 믿음과 앎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정리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인식론 책에 믿음이나 앎의 유형에 대한 분석이 도입 부분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3.

이런 지적 환경 속에서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믿음을 명제에 대한 태도로 국한시키는 실수를 하곤 합니다. 폴 틸리히도 이런 지적을 합니다. “신앙을 가장 흔히 오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사람들이 신앙을 인식 행위의 일종으로 보고, 과학적 인식보다는 신앙이 덜 명증적인 인식이라고 생각하는 오해다...”(한국신학연구소『신학해제』에서 재인용).


이런 오해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이단이 구원파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청자(聽者)는 확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는 것의 영향으로 마음은 동요하기 마련이고 머뭇거리게 되는데요, 그들은 숙련된 낚시꾼처럼 그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구원받지 못했군요!” 믿음의 의미를 한 가지로 축소해놓은 후, 이상적인(비현실적인) 등급의 믿음 즉 확신을 요구하여 신자를 기죽이고 재빨리 낚아채는 것입니다.



4.

이쯤에서 성경으로 되돌아가봅시다. 원어에 문맹 수준이어서 장담할 수 없지만 제가 살펴본 바로는 성경의 어법은 우리나라 어법과 매우 흡사합니다. ‘믿음’의 의미가 미분화(未分化)된 상태로 애매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단어에 집착해서는 해법이 나오질 않겠죠. 문맥을 봐야 합니다. 문맥을 고려할 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명제에 대한 태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문장에 들어있는 “인격적 관계”와 관련된 의미도 있고, 그 외의 다른 의미를 함축하는 문맥도 있습니다.


믿음의 여러 의미를 포착하기 위한 틀로 칸트가 말한 <지성>과 <정서>와 <의지>라는 작용들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의지”가 추가되었지만 칸트의 분류는 “지성과 감성”이라는 상식적인 분류에 기초하고 있는데, 믿음과 관련된 성경의 문맥도 어떤 측면에서는 이 상식에 가깝기 때문입니다(믿음의 다른 측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할 말도 별로 없습니다. 딱 한마디 빼고요. “하나님의 주도하심 initiative”말입니다. 그러나 이 한 마디가 신앙과 신학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해두실 필요가 있습니다)



5.

성경 원어와 우리나라 말과 달리, 영어에서는 ‘믿음’이라는 용어를 적어도 두 단어로 표현함으로써 애매성을 해결합니다. ‘faith’와 ‘belief’입니다. 다른 쪽 의미를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belief’는 “명제에 대한 태도”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고, ‘faith’는 여러 의미를 총칭(總稱)하는 말로 쓰이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죠.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새번역)을 영어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But without faith no one can please God. We must believe that God is real and that he rewards everyone who searches for him.”(CEV) 이러한 구별을 담기 위해 신학자들은 ‘faith’를 ‘신앙’으로 ‘belief’는 ‘믿음’으로 옮기는 것이죠. 신앙(信仰)의 한자를 보면 ‘믿을 신’에 우러른다는 ‘앙(仰)’이 추가되었으니 복합적 의미를 총칭하는  ‘faith’의 대응어로 적절한 듯합니다.



6.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네요.

신앙에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지성적 요소: 믿음(belief)

(2) 정서적 요소: 신뢰(trust)

(3) 의지적 요소: 헌신(commitment)


이 세 요소는 어떠한 관계를 가질까요? 섬세한 규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신앙지도자인 우리들 입장에서는 “지성과 감성은 비교적 독립적이고 의지는 다른 두 요소의 바탕에서 그것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정리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3)에 ‘commitment’라는 단어는 제가 쓴 것입니다. ‘faithfulness’를 넣은 책을 보았는데 맘에 안 드네요. “인생 건다”를 떠올리며 저 단어를 넣었으니 인용하실 때는 유의하십시오.]


빔 리트께르크는 『믿을 수만 있다면』(홍성사)에서 이 관계를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관대한 것은 “정서적 의심(신뢰 결핍)”이고 가장 책망하는 것은 “의지적 의심(헌신 결핍)”이라고 합니다. 제 생각에 그 이유는 앞에서 정리한 것처럼 의지적 요소가 다른 두 요소를 바탕에서 추동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른 것과는 달리 의지가 ‘맘먹기에 달려있는 요소’라 그럴 수도 있고요. “자유 의지” 들어 보셨죠?



7.

신앙에 대한 이러한 분석이 신앙지도라는 실천 영역에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전도서 4:12)

 


여기에 또 하나의 줄을 강조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줄이지요.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8~39)

 

앞에서 "하나님의 주도하심"이 엄청 중요하다고 했었죠?

 


[추신]

 

이런 세부사항을 본문에서 언급해야되나 망설이다가 깜박한 것이 이제야 생각나네요.


"지식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는 플라톤의 정의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정의에서 결국 쟁점이 되는 것은 "정당화"입니다. 현대 인식론에서는 이 정당화를, 위에서 적었듯이,  "(2) 그렇게 믿는 것이 모종의 정당성을 지닌다"로 해석합니다. "인식 주체가 믿는 행위가 정당화되는가"에 포커스가 맞추어져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인식주체의 믿음 내용이 정당화되는가"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요, 플라톤은 이렇게 이해했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후자의 경우 사실상 "인식주체"를 배제한 셈이어서 "인식" 혹은 "지식"이 개인에게 귀속된다는 조건을 이탈해버리죠. 현대인식론에서 후자 대신 전자로 해석하는 이유인 듯합니다(조심스러운 표현을 쓰는 이유는 책에서 확인한 것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한 大학자와 간단히 주고받은 것을 가지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학자는 후자의 해석을 지지하시더군요).


플라톤은 후자의 해석을 취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생각했던 "지식의 모범"은 유클리트기하학이었는데, 기하학의 명제들에게서 인식 주체의 주관적 정당화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인식 주체"가 어영부영 인식론적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표준적인 정의입니다. "비표준적인 정의"도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현대의 "자연화된 인식론"같은 것이 그 일종인데요, 우리 신학 쪽이 가야할 길이 아닙니다. 쟁점을 상호주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제의 경우 그래도 기준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신앙의 주제의 경우 이런 접근으로는 최소한의 기준조차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하시는 분들 기다리면서 몇 자 적었습니다.
아침부터 더위가 '기대하시라' 벼르고 있군요.  - 10. 8.4. 아침 7:30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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