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윤기석 (경기노회,수원교회,목사) 2010-08-09 (월) 16:22 13년전 5782  

(본문 : 빌립보서 4: 4-7)

 

오늘 우리의 본문말씀 제 5절에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관용이란 관대하고 용서하고 용납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하면,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 번역 성경에 보면,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가한다면, 관용이란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편견 없이 공정한 마음을 갖고, 그가 바라는 것을 주어버리는 마음의 힘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욕심과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형편을 이해하고 동정하여, 자신의 권리를 포기 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곧 관용입니다. 그렇다고 주관이 없다거나 범죄를 묵인하는 것이 관용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자신의 주관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넓은 아량으로 포용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말씀은 이런 관용, 이런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라고 권면합니다. 누구에게든지 관대하고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이해하고 양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에 대해서는 관용하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문은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라고 합니다. 누구에게든지 보복과 복수의 감정을 버리고 사랑과 친절한 마음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는 것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자기 욕심만 생각하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과 아귀다툼을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한 특징인데, 자신만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양보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자신이 불리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기심과 경쟁심이 팽배한 세상에서는 관용하는 사람들이 경쟁에서 뒤지기 쉽습니다.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사람들이 유리한 위치에 서고 경쟁에서 이기기 쉽습니다. 쉬운 예로 만원 버스를 탄다고 할 때, 악착같이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은 앞서 타겠지만, 그러나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어린이, 노인, 부녀자에게 먼저 양보하는 사람들은 타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데 있어서도 관용하는 사람은 손해 보기가 쉽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봐주고 양보하다 보면 자기 이익은 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관용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관용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약삭빠른 지혜가 계산치 못하는 하나님의 상급이 따릅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한 말씀도, 주님께서 오셔서 관용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으로 보상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기관에는 직원들이 모여 사는 사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택들은 크기가 모두 달랐습니다. 최고 책임자가 사는 집은 2층으로서 넓고 시설이 잘되어 있었고, 두 번째 책임자의 집은 두 번째로 잘 지어졌고, 세 번째 책임자의 집은 세 번째로 잘 지어졌고, 다른 집들은 모두 단층으로서 약 18평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잘 지어진 집에 살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18평에 살든 분들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두 가정이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좀 약삭빠르고 얌체에 가까운 분이 선수를 치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체면을 차리고 관용한 분이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아니해서 이번에는 두 번째로 잘 지어진 집에 살든 사람이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먼저 번에 양보했던 사람이 더 좋은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관용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푼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관용해야 되겠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있어 너그러워야 합니다.

자기주장, 자기욕심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다른 사람의 형편을 이해 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관용입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그릇된 독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기와 같은 생각, 자기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자를 정죄하고 저주하기 쉽습니다. 믿음의 열심히 있다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문제로 서로 비난을 했습니다.  즉 제사상에 놓았던 음식을 교인들이 먹어도 되느냐, 먹지 않아야 되느냐 하는 문제로, 교인들은 두 파로 나누어 서로 싸웠습니다. 먹어도 좋다는 교인들은 먹을 수 없다는 교인들을 보고는, 신앙이 유치하다고 업신여겼습니다. 반면에 먹을 수 없다는 교인들은 먹는 사람들을 보고, 믿는 자들이 절제하지 못하고 세상과 짝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입장은 우상의 제물은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4:3에 보면 그는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지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제사음식을 먹는 문제로, 서로 업신여기거나 혹은 비난하지 말고, 서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필요 없는 싸움이 생기고, 죄 없는 사람들이 귀양이나 죽임을 당하고, 각종 교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교인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을 갖지 않으면 형제를 정죄하는 범죄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여기 앉으신 여성들 중에 입술에 빨간색 계통의 입술연지를 바르지 않고 오신 분 계십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오십년 전에 그런 모양으로 교회에 오셨다면, 쥐 잡아 먹고 왔다고 혼 벼락이 났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남녀반 구별이 없이 혼석으로 앉았습니다. 그러나 사오십년 전 같았으면, 미풍양속을 해친다거나 풍기문란이라고 해서 야단을 맞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 왔을 때는 남반 석과 여반 석 중간에 포장을 치고 서로 보지 못하게 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가치판단 중에는 완전치 못한 것이 많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주장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새로운 주장과 시도를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발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에게는 기성세대가 갖지 않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주장을 겸손하게 경청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과 형편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해관계에 있어 관용해야 합니다.

어떤 이권 앞에서 너그러운 마음을 갖자는 말입니다. 본래 관용이라는 말의 한 의미는 자신의 이익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면서도 상대편에게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네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가 좀 더 너그러운 심정으로 남에게 양보하고 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그러나 행하기만 하면 복 받을 말씀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 중에 이해관계에 있어 관용을 보인 대표적인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살다가 가축이 많아짐에 따라 서로 분가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삼촌이라고 해서 먼저 좋은 땅을 택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참으로 너그럽고 관대한 말입니다. 이 때 롯에게 너그러운 마음이 있었다고 하면, 삼촌에게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라고 인사말이라도 함직한데, 그러나 롯은 자기욕심대로 물 좋은 넓은 평야를 다 차지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관용을 베푼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완전히 당했습니다. 세상적인 계산으로 볼 때 관용을 베푼 아브라함이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그러운 사람에게 주시는 큰 상급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이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많은 축복을 받고 그의 후손도 번성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욕심만 차렸던 롯은 얼마 후에 크게 망했습니다.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부패하여 하늘로부터 유황불을 받았을 때,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많은 재산들은 모두 불타 버렸습니다.

이해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소화 29년 9월에 일본 하꼬다네에서는 많은 승객을 실은 배 한척이 전복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원수에 비하여 구명대가 부족했습니다. 그 때 구명대를 미리 착용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 2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구명대를 입지 않은 일본인 청년 2명을 발견하고는, 자신들이 입고 있던 구명대를 벗어 주면서 말하기를 “지금 일본은 젊은 당신들을 필요로 합니다.”하고는 이국땅에서 최후를 마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양보도 가능하고 손해도 가능하지만, 누가 감히 자신의 생명과 다름없는 구명대를 낯선 사람에게 주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받은 우리도, 자신의 목숨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하여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데 있어 관용해야합니다.

관용이라는 말 자체가 용서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자는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그러우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용서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한 죄대로 우리를 벌하신다면 우리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관용을 베푸시기 때문에, 심판을 연기하시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관용하시기 때문에 자녀들의 허물과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의 죄도 용서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내가 너희를 용서함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가 범죄하고 돌아와서 회개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과 그의 말씀을 따라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형제들을 용서하십시다. 우리의 좁고 옹졸한 마음을 버리고, 바다같이 넓고 큰 아량을 가지십시다. 그 동안 이웃 간에 맺혀졌던 사소한 오해와 원한과 적대감이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하십시다.

성서에 따르면, 잘못한 사람에 대한 징벌과 복수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서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 스스로 형제들의 잘못에 대하여 보복하지 말고, 우리로서는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서양속담에, “하늘의 복수는 느리나, 그러나 확실하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은 징벌할 자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징벌하십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19이하에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좀 더 너그럽고 관용하십시다. 너무나 좁고 옹졸한 마음을 버리고, 대해와 같이 넓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십시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따라주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삶을 사십시다. 나와 내 가족에게만 관용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관용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관용하십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심같이, 우리도 우리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도 주는 자들이 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