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십자가의 원수

윤기석 (경기노회,수원교회,목사) 2010-08-09 (월) 16:42 13년전 5978  

(본문: 빌립보서3:17-21)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십자가를 우리의 자랑과 소망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예배실의 제단 중앙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예배당의 종탑위에도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갖가지 기구나 물건에도 대부분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가 곳곳에 세워지고 새겨져 있는 것은 신자들이 얼마나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고 자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생각 할 때 자랑 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부터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 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사 감격하는 이유는 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고, 이제도 그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사죄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우리의 자랑과 소망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십자가가 우리 인류의 구원의 근거요,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려운 사실은 우리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이 십자가의 정신을 모독하고 유린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십자가의 정신을 짓밟고 십자가의 원수와 같이 사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 옛날 빌립보 교회에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어, 사도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입술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생활은 예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찬송을 들고 예배당을 드나드는 것을 보면 십자가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 같지만, 그러나 그의 행실을 보면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 유신시대와 군사정권시대에 한국의 많은 목사, 장로들도 신앙양심을 속이고 독재자들을 지지하고 굴종했습니다. 이런 행위야 말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여러분 중에는 혹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없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생각과 행위 속에는 때때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경우가 없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으로서, 우리자신의 신앙과 행위를 진단하고, 새롭게 결단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19절에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의 특징이 대충 세 가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배를 신으로 삼는 것이고, 둘째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는 것이고, 셋째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첫째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는 배를 신으로 섬기는 사람 입니다.

배를 신으로 섬긴다는 말은, 자신의 배를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섬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배를 신과 같이 섬기는 자는 아무리 예배당에 열심히 나온다고 해도 그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배를 신으로 삼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니까? 자신의 배를 신으로 섬긴다는 말은 육신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고, 그런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온갖 주의와 노력을 집중시키는 사람은 자신의 배를 신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소위 배금주의자라고도 하고, 황금만능주의자라고도 하는 자 , 다시 말해서 돈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배를 신으로 섬기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은 우상숭배와 거짓 신을 버리고 참 하나님을 섬기며, 인간의 죄를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하는 죄의 뿌리 하나는 끝없는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다는 말씀과 같이, 인간은 물욕과 정욕을 따라 죄를 범하고 죄의 결과로 고통과 멸망을 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바로 이런 물욕과 정욕의 죄를 소멸하기 위함입니다. 다르게 말해서 자신의 배를 하나님처럼 섬기는 물욕과 정욕의 죄를 소멸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물욕과 정욕을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물욕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를 알기 전의 옛사람, 구습을 쫒던 옛사람을 죽이고, 성질부리고 욕심 부리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자는, 아직도 배를 신으로 생각하는 자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입니다. 아직도 그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교인은, 이름만 교인이지 사실은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육신적인 욕망을 위해서는 신앙도 버리고 양심도 버릴 것입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중요한 이유 하나도 바로 돈에 대한 욕심이었습니다. 에서가 장자 권을 팔게 된 원인 하나도 바로 팥죽 한 그릇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자기의 배를 채우고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체면도 양심도 신앙도 저버리는 사람들은, 확실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 입니다. 부디 여러분 중에 아무도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  각하는 자입니다.

정말 부끄러워 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군사독재정권에 협력한 공로로 받은 훈장도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 아들이 어느 지역의 깡패 두목이라고 하면서 그것도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요즘 각 교단에서 수 천만 원 혹은 수 억 원을 쓰고도 교단장이 되면 그것을 자랑합니다만, 그러나 신앙양심에 비춰볼 때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저는 몇 달 전에 새벽기도를 하고 집에 돌아가다가 노상 방뇨를 하고 있는 한 청년을 보았습니다. 길이 약간 경사가 졌기 때문에 오줌이 내가 가는 길을 가로 질러서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걸음을 멈추고 “야! 이놈아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싹 돌아서서 “아저씨 왜 그래요?” 하면서 시비를 걸어오더라고요. 마침 주위에 있던 그의 여자 친구가 그를 만류해서 간단히 끝났습니다만, 다 큰 청년이 길바닥을 오줌으로 한강을 만들고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확실히 우리 주변에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성들이 배꼽을 비롯하여 깊이 감추어야 할 곳들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유행을 따르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런 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까?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부자가 된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나, 돈을 써서 높은 직위를 얻고 자랑하는 자들이나, 복잡한 이성교제를 자랑하는 자들이나 다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고, 결코 부끄러운 일 때문에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의 특성은 땅의 일을 생각

하는 것입니다.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영적인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하늘나라에 관해서는 뜻을 두지 않고, 그 대신 세상일에만 집착하고 세상의 부귀영화에만 관심한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짝하고 세상일에 몰두 하지만, 하늘나라 사업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는 사람은 확실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재물을 늘리는 일이나, 아들딸을 키우는 일이나, 지위 명예를 얻는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애정과 노력을 다 쏟아 넣는 사람, 세상 것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 속에서 만족해 버리는 사람은 확실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먼저 관심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요, 신앙적인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의 기본 관심과 활동목표는 하늘나라 사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문 20절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그리고 하늘로부터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늘나라 사업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고 그대신 땅의 일을 생각하니, 어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라신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가정생활, 직장생활, 온갖 문화생활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그런 세상생활의 중심과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은 비록 세상에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소속한 자들이요, 따라서 우리의 시민권도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나그네와 행인 같은 신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우리의 낮은 몸도 예수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케하시고 ,우리도 예수님이 계신 하늘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그런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이릅니다. 본문19절에 보면,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그 끝이 멸망이요지옥의 형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길에서 떠나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사도 바울도 목회자였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거기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중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그는 눈물을 흘리며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는 없습니까? 배를 신으로 섬기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없으십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의 결말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신앙과 행위를 돌아보고, 혹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십시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의 은총을 맛보고, 십자가를 여러분의 자랑과 소망으로 삼고, 십자가의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