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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

김재준 (기타,,목사) 2010-11-10 (수) 15:18 13년전 5304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

長空 김재준 목사

욥기에 영혼불멸의 신앙이 명백히 나타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욥기 19장 25절에서 27절까지에 있는 문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데 달려 있다. 아직까지도 학자간에 많은 이견이 있어서 확언하기 어려우니 만치 사계학도(斯界學徒)의 마음을 끄는 제목의 하나가 되어 있다. 이제 히브리 원문을 옮기는 것은 생략하고 최근에 된 영역들을 찾아보자.

맥파딘(Mcfadyen) 역

"I konw that there liveth a champion,/ Who will one day stand over my dust;/ Yea, Another shall rise as my witness,/ And as sponsor,/ Shall behold God;"

모팻(Moffat) 역

"Still, I know one to champion me at last, to stand up for me upon earth, This body may break up, but even then my life shall have a sight of God;"

그레이, 드라이버(Gray and Driver) 공역

"But I know that my vindicator liveth,/ And hereafter he will stand up upon the dust. And…/ And away from my flesh I shall behold God./ Whom I shall behold on my side,/ And mine eyes shall see unestranged."

데이빗슨(Davidson) 역

"And after my skin which is destroyed. This here, even without my flesh shall I see.

God: Whom I shall see. And my own eyes behold, and not another's;"

조선어 역

"내가 알거니와 나의 구주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땅 위에 서시리로다. 나의 이 가죽이 썩은 후에 내가 이 육체를 떠나 하나님을 보리로다."

맥파딘은 키텔(Kittel)의 원본에 실린 부록을 그대로 채용하여 극도의 자유역(自由譯)을 시(試)한 것이요, 그레이와 드라이버는 26절의 상반절은 번역 불능이라고 아무 번역도 하지 않았고, 모팻은 자기의 해석에 기한 의역을 시하였고 데이빗슨은 될 수 있는 데까지는 직역을 시하였는데 '밉브사리'(from or without my flesh)를 '오리'(my skin)의 결구(結句, Apodosis)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 중에는 이것을 대조구(對照句, Antithesis)로 취급한 이도 많고, 또 어떤 이는 이 두 문구가 공히 '육체'라는 것의 개의적(槪意的)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도 주장한다. 이것도 경솔히 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보다도 더 미묘한 것은 여기 있는 전치사 '민'을 어떻게 번역할까 하는 것이다.

이 전치사는 영어로 from(…[으]로) 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away from(…떠나)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전자를 취한다면 욥의 말하고자 한 것은 "내 가죽(皮)이 비록 썩어 없어진다 할지라도 그 남은 육체로 하느님을 목도(目睹)하겠다"는 것이 될 것이니, 다시 말하면 현세에 살아 있는 동안 기어코 하느님을 뵙겠다는 것임에 영혼불멸의 신앙과 관계될 것이 별로 없을 것이며, 만일 후자를 취하여 "육을 떠나"라고 번역한다면, 그 반대의 사실을 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데이빗슨은 문장구성법에 비추어 보아 후자가 전자보다 자연스럽다는 것을 역설하였고, 그 외에도 그린(Green), 췌인(Cheyne), 드라이버 등이 그 후자, 즉 "육을 떠나" 하느님을 보리라는 번역을 하였다.

그린은 자기가 그렇게 번역한 내면적 이유 두 가지를 말하였다.

"욥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는 무덤가에서 방황하는 자로 자처하여 현세에서의 온갖 희망은 아주 없어진 것을 말하였으며, 또 만일 욥이 자기의 신심에 대한 보응을 반드시 현세에서 받아야만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면 그는 자기의 중축(中軸)되는 사상을 내어버리고 자기를 못 견디게 구는 '친구들'의 사상을 따른 것이 된다고 했다"(Green, "Argument of Job," 204-205 ; Cheyne, "Job and Solomon," 34).

이런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닌 것은 아니나 그래도 아주 수긍할 수 없는 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선 원문에 의의가 의연히 불분명한 까닭에 누구나 다 전후의 문맥을 보아 좋도록 해석한 것임에 각자의 억설에 따라 그 결론을 달리한 것이며, 데이빗슨의 숙련한 논문을 읽은 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의혹의 염(念)이 아주 사라지지 않는 것은 욥이 만일 이 구절에서 적확한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고백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왜 그가 가장 분명하고도 보통 쓰는 말 '육'과 '영'을 대립시켜서 '내 육이 없어진 후에도 내 혼으로 하느님을 뵙겠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어색한 말 '피'와 '육'을 대립시켜서 '내 가죽이 없어진 후에 내 육으로(혹은 육을 떠나) 하느님을 뵙겠다'고 하는 불분명한 표현을 했을까? 그도 역시 전통적 신앙인 황천설(黃泉說, Doctrine of Sheol) 때문에 명확한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소이(所以)이다.

물론 욥은 현세에서 더 오래 살기를 기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는 때 그는 극도의 불평과 낙담을 표시하였으니 이는 그의 사유 가운데 있는 '생'이라는 관념은 순연히 현세의 생을 의미한 것이었던 까닭이다. "베틀에 북[梭] 같은 나의 날들은 소망없이 끝막아 버립니다. 오, 생각하소서. 나의 생은 입김 같아서 다시 좋은 날 뵈올 길 없소이다. …사라져 없어지는 구름 같사오매 음부에 내려갔다 올라올 길 없소이다"(욥 7: 6,7,9)라고 한 것은 그가 생의 하염없음을 슬퍼한 나머지 '생은 헛된 입김, 쓰러지는 구름' 같아서 소망도 없으며 다시 찾을 곳도 없다고 괴로운 탄식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란 사는 날은 짧고 괴로움은 많사외다. 꽃같이 났다가 또 시들어지며 그림자처럼 움직여 정함이 없사외다"(욥 14:1-2).

"사람이 죽어 늙어지어 그의 마지막 숨결을 내쉰 때 그는 어디 있나이까. (그는) 물 없어진 바다, 말라 붙은 골짜기이외다"(욥 14:10-11).

이 밖에도 그는 같은 의미의 괴로운 탄식을 많이 말하였으니 10장 9-13절까지에는 인생이란 거룩한 토기장이의 손으로 빚어 만든 한 조그마한 흙덩이에 숨과 생각과 영을 넣어 놓은 것으로 결국은 다시 무의미한 티끌가루로 돌아갈 밖에 없는 것을 원망스럽게 말했으며, 13장 28절에는 그의 생명이 날로 썩어져서 좀먹은 의복같이 떨어져 가는 것을 괴로워하였으니 다 명확한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찾지 못한 데서 생긴 괴로운 고백인가 한다.

그러면 욥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 줄 믿었는가? 3장 1-22절에 그는 자기의 난 날을 저주한 후에 죽은 자의 평화로운 정적과 안식을 부러워서 이렇게 노래했다.

"왜 무릎에 나를 받들었으며 왜 가슴이 나를 젖 먹였던고. 그러지 않았던들 지금의 나는 고요히 누워 평안히 잠잘 것을… 강자가 약탈을 그치고 약한 자가 마음놓고 있는 곳! 포로가 다함께 고요히 누워 간역군(看役軍)의 독한 소리를 듣지 않는 곳! 큰 자와 작은 자 분간이 없고, 노예가 주인에게서 놓임 받는 곳! 오, 하나님 왜 수난자에게 빛을 주시나이까? 왜 쓰린 낙망에 있는 인생에게 삶을 주시나이까?"(욥 3:12-14, 17, 20).

여기에서 우리는 욥의 괴로운 '사(死)의 찬미'를 듣는다. 이 정적과 안식으로 표현된 사자의 세계는 음산한 스올(Sheol)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데이빗슨이 『구약신학』 479쪽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묘소의 경(景)과 사자(死者)의 육체적 상태를 상상"하여 시적으로 착색한 것임이 분명하매 구태여 교리적 문제에까지 올릴 필요는 없는 줄 안다. 이 밖에 다른 곳에서는 시종일관하게 죽으면 음부(Sheol)로 내려간다는 것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 정리(定理)같이 말하였다. 이 스올은 "암흑의 세계, 음산과 혼탁의 세계, 거기에 비치는 빛이란 끊어지고(14:21), 거기서 나올 소망도 없는(10:21)"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욥의 내세관이 대개 어떠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그에게 있어서는 생의 유일한 실재성은 오직 현세의 '삶'에 있는 것이요, 사후에는 암흑과 혼탁 그 자체인 스올에서 '삶'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너무나 희미한 끊임없이 늘어진 반의식의 '존재'를 계속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14장 13-15절에 그는 이 스올에서 벗어날 때가 있을 것을 말하였으나 그 다음 절 16, 22, 특히 19-22절에서 즉시 그런 희망이 불가능한 것을 스스로 언명해 버렸다.

그러면 이런 사상적 배경을 가진 욥에게서 명확한 영혼불멸의 내세관을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없다는 이론이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나 거기에도 상당한 무게가 있음을 인정 안 할 수 없는 줄 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욥의 내세관을 정당히 파악하려면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보아 그 곡절 있는 움직임을 살펴야 할 것이다.

욥은 인생의 순례자다. 그의 기록은 책상 위에서 삼단논법으로 쌓아올린 논리의 전당은 아니었다. 차라리 인생의 광야에서 길 찾아 헤매는 눈물겨운 고민(苦悶)의 고백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변천이 많고 모순과 자가당착도 많은 것이다.

사자(死者)의 고요한 안식을 부러워하던(3:14-19) 그가 사자의 세계인 스올의 암흑을 생각하고서는 몸부림치며 원망하였으며(10:21, 22), 스올에서 다시 나오기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다시피 한 그가(7:7-9) 하나님이 자기를 스올에서 불러낼 때를 기다리겠노라고(14:13-14)도 하였으며, 하나님은 가혹한 무도덕한 이라고 원망하던 그가(9:22-24) 자기를 변호해 주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그의 앞에 머리를 숙이기도 하였다(19:24-25).

이렇게 그는 안정 없는 마음으로 이곳저곳 더듬어 헤매었다. 그러나 그의 품안에는 한 작은 나침반이 있어서 그의 나아갈 방향을 멀리 가리키고 있었으니 그 바늘의 한쪽 끝은 하나님의 의(義)를 가리키고 또 한쪽 끝은 그의 양심, 결백한 양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길을 찾아 헤매이는 동안에도 이 바늘만은 항상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리고 내 양심은 결백하다. 그런고로 이 현재의 참상에 대하여 무슨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는 것이 그의 속임없는 심정이었다.

"이제 그가 나를 죽이시리라. 내게는 소망이 없소이다. 그래도 나는 그의 앞에서 내 길을 변호하오리니 경건치 못한 자가 그의 앞에 올 길이 없사오매 이것이 나에게 구원의 표가 됨이외다"(욥 13:15-16).

'만일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결백한 사람을 무고히 매장해 버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는 것이 그가 붙잡고 놓지 않은 가장 큰 진리였다. 이 신념이 그에게 잠깐이나마 스올에서 부활할 희망도 보게 하였으며(14:13, 14), 아벨의 피가 땅을 적셨을 때 하늘에 계신 증인이 이를 변호해 준 이야기를 연상케 하기도 하였으며(16:18, 19), 심지어 옛이야기를 싣고 고요히 서 있는 비석에 호소할 생각도 나게 한 것이었다(19:23, 24).

이렇게도 수난자의 윤리적 선후책을 생각하고 있는 반면에 그보다 더 큰 문제가 그를 괴롭게 하였으니, 즉 "대체 의인이 곤고할 '까닭'이 무엇인가, 무고한 피가 땅을 적실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성은 이것을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 직접 문의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나는 오직 전능한 이에게만 말씀드리렵니다"(13:3).

'나는 하나님과 변론하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의 문의와 간원, 그의 탐구와 기도는 마침내 그를 피스가의 높은 봉 위에까지 인도하였고 거기서 그의 오랜 간구에 대한 확증의 세계를 전망하게 하였으니 곧 이번 연구의 본제가 되어 있는 19장 25-27절에 있는 말씀이다. 거기에서 그는 (1) 하나님이 반드시 그의 결백한 것을 변호해 주시리라. (2) 그가 틀림없이 그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 하는 두 가지 위대한 신앙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어느 때 어떻게 이것이 성취될 것인가 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이 그의 생전에 성취되든 사후에 되든 또는 그가 보통 육안으로 하나님을 뵙든, 가죽이 다 벗겨진 고깃덩이 몸으로 그를 뵙든, 부활한, 새로 지음받은 몸으로 그를 뵙든, 아주 육에서 떠난 영으로 뵙든, 이런 것은 그가 그다지 크게 관심한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가 참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은, 그야 살든지 죽든지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의'와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며 또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스트란(Strahan)이 스멘트(Smend)의 책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사후의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욥은 언명한 바가 없다. 그가 생각한 생명의 회복이란 것은 그의 정의감의 체현에 불과하다. 즉 현세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그의 정의감이 그의 믿음의 목표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사실 욥은 사후의 영혼불멸에 대하여 똑똑하게 끊어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전통적 신앙인 음산한 스올을 그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정의감은 이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에 영혼불멸의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의'라는 터전에 뿌리를 박고 '욥의 결백한 양심에' 그 작은 싹을 돋게 하였다. 마치 작은 상수리나무 열매가 위대한 장래의 가능성을 품고 가시덤불 속에서 그 조그마한 싹을 돋힌 것같이.

「落穗」(1930년 10월 25일)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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