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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후회

윤응진 (충북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11-27 (토) 17:40 13년전 5736  

2010.

하나님의 후회

(창세기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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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6 장>

인류의 악행

(1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 그 무렵에,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5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7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노아

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1.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증언하는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표현이 일곱 번(1:4, 10, 12, 18, 21, 25, 31)이나 등장합니다. 특히 1장 마지막 절인 31절에는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이하를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큰 기대를 갖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계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인간들의 범죄행위로 인해서 무질서하게 변질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장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과 하와에게 있다고 발뺌합니다. 4장에서는 가인이 질투 때문에 친동생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인 라멕은 자신에 대하여 해를 입히는 사람에게 무한보복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창 4:24). 그리고 창세기 6장에 이르면, 네피림들이 나타나 악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타락한 인간들의 범죄에 의하여 점점 더 부패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성서기자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6)라고 증언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성경본문 가운데서 가장 가슴 아픈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다니, 그리고 마음 아파하시다니, 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요?

 

2. 하나님의 후회

우선 ‘하나님의 후회’를 야기한 직접적인 원인은 네피림의 출현(6:4)입니다. 창세기 6:1-4에 기록된 네피림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근동지방의 신화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아들들과 인간의 딸들 사이의 결혼으로 네피림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신화들은 인간사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들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징적인 표현들을 문자대로 이해할 경우에는 많은 오해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 신화적 표현으로 성서 저자가 말하려는 내용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요?

이 신화적인 표현이 담고 있는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네피림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4b)이라는 부연 설명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영웅”들은 스스로가 신적인 존재라고 주장하곤 하였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영웅들은 탄생부터가 예사롭지 않게 묘사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네피림이란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주장하는 “영웅”들에 대한 신화적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영웅들은 강력한 권력을 앞세워서 세상을 지배하였습니다. 그들에 의하여 억압과 부정의가 구조적으로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신적인 권위를 지닌 강력한 지배자들이 등장할 경우에는, 일반 민중들은 그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근동지방의 종교들은 일반 민중들에게 그 지배자들을 신적인 존재로 숭배하고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서기자는, 바로 그 “유명한 영웅들”에 의하여 죄악이 극에 달하였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영웅들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저지른 죄악들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 기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5-6)

“죄악이 가득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계획이 언제나 악하다” - 바로 이것이 인간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마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마음’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단순히 감정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지성과 의지의 자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계획하는 것이 악하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과 의지가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죄악이 가득 차 있는데,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늘 악하므로, 세상이 개선될 희망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사람을 창조한 후에 “참 좋았다”라고 경탄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사람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는 것입니다(6). 이처럼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성서기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근심스러운 마음을 느끼도록 촉구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기쁨과 보람을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만일 어느 부모가 그 자식의 악행 때문에 자식을 낳은 것을 “후회하며 마음 아파”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누가 그 부모를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신다면, 누가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탄식하시면서, 사람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생명체들을 모두 홍수로 멸절시킬 것을 결단하십니다. 후회와 아픔, 그리고 비장한 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절망을 증언하는 성서기자의 의도는, 바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인간으로서 저지르고 있는 죄악의 넓이와 깊이가 어떤 것인지 깨닫도록 촉구하려는 것입니다.

 

3. 희망 한줄기- 노아!

이 절망적인 상황을 보도하는 성서기자는 갑자기 놀라운 희망의 실마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8) 심판받아야 마땅한 그 사회 현실 속에 노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저한 절망의 암흑 속으로 한 줄기 찬란한 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노아로 인하여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100% 헛된 것, 즉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닐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갑자기 절망이 희망으로, 심판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새 창조의 활동으로, 진노가 은총의 섭리로 전환되는 놀라운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노아가 누구입니까? 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가운데에서도, 인류를 위한 새로운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까?

창세기 6:9은 노아에 대해 이렇게 증언 합니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노아가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의 일’을 도우며 살아가는 동반자였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구조적으로 철저히 타락하고 썩어버린 현실 한복판에서도, 의로운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절망가운데에서 심판을 결단해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게 노아로 인하여 감격과 보람으로 설레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이제 심판받는 시대의 마지막 사람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첫 사람으로 선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모든 희망과 기대를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겁니다. 노아가 있음으로 인하여, 심판의 결단이 새 창조를 위한 은총의 행동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바른 삶이, 하나님께서 인류의 새 미래를 열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 개인이 하나님과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 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인간의 악이 구조적으로 확산되어, 아무런 희망을 찾을 길이 없어 보이는 그 역사 속에서도 소수의 의인이 존재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열어 가신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후회와 아픔을 증언하는 오늘의 말씀은 동시에 새로운 희망의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만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그리고 모세도, 그렇게 암흑의 역사 한복판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열어가시는 하나님희망의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4. 맺는 말: 명예로운 1이 되기를!

매일 뉴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범죄들과 부조리들에 대하여 듣다보면,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할지 난감해집니다. 각종 폭력사건들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개인들이 저지르는 범죄만 문제가 아닙니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마치 네피림처럼 행동하면서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구조적인 사회적 부정의로 인해서, 힘없는 사람들의 삶이 더욱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치적, 교육적, 종교적 지도층들이 보여주는 각종 탈선들은 더욱 우리를 실망케 합니다. 인사청문회가 개최될 때마다, 최소한 서민들의 수준에서 깨끗하게 살아가는 국무총리 후보나 장관후보를 찾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보람된 삶을 살기 위해서, 대체 누구를 역할모델로 삼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매우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후회와 아픔’을 우리의 가슴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체념하게 됩니다: “세상이 다 썩었는데, 내가 대체 뭘 하겠어? 구조악이 이처럼 견고하게 버티고 있는데, 나 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어?”

우리 사회에 대한 이런 태도는 분명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절망과 체념은 우리가 방관자의 자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올바르게, 정의롭게 살아가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바르고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환멸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먼저 바르고 옳은 삶을 솔선하여 실천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이 바로 노아처럼 의롭게 살지 않는 한, 우리의 사회는 결코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훌륭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 좋은 교회를 만들고 싶다, 살기 좋은 지역사회를 만들고 싶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다 .... 이런 것들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들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판단하는 것으로도 불충분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옳고 바른 삶을 살라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그 의로운 삶을 먼저 실천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과오나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범죄와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합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선행만을 기대합니다. 이런 잘못은 특히 교사들과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이 흔히 저지르게 됩니다. 지도자들은 선행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실천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들 자신들은 그 선행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지도자들을 혐오하게 되고, 아예 그들의 가르침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사회는 더욱 더 부패하게 되고, 개선의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선행을 요구하지만, 자신들이 먼저 그 선행을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숫자 1‘에하트’라고 하는데, 이것은 숫자 1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이라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1은 사소하거나 무기력한 숫자가 아니라, 명예로운 숫자인 것입니다. 1이 앞서면 2가 따라오고, 3이 뒤따라오고.... 그래서 무한히 많은 숫자들이 뒤를 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 1의 역할을, 그 ‘훌륭한 첫 사람’의 역할을 하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각자가 먼저 솔선수범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훌륭한 첫 사람’이 되기만 한다면, 즉 각자가 노아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에는 적어도 여기에 모인 여러분의 수만큼이나 많은 노아들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한 사람이 다르게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라는 체념어린 탄식은 이제부터 버리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 ‘각자’가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노아가 되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은 결코 인간창조를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며, ‘충분히’ 희망을 지니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후회와 아픔을 야기하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과연 우리가 노아처럼 절망의 현실에서 새로운 희망의 실마리가 되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인간들과 사회현실에 대해서 개탄하는 ‘하나님의 후회’와 아픔에 동참할 수 있다면, 그 아픔을 넘어서서, 우리 스스로가 노아처럼 의로운 삶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희망의 실마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우리의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지역사회가 새롭게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새롭게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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