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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성공이란 말이 없습니다.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02-12 (토) 15:07 13년전 5020  

제목 :성경에는 성공이란 말이 없습니다.

창 39:2-10, 골 3:22-25

우리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성공신화의 탁월한 모델로 널리 알려진 분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대통령 당선인에게 여러 가지 도덕적인 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오면서 이루어낸 놀라운 성공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국민들은 그에게 압도적인 표를 몰아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성공의 열망’이 강렬하게 분출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부자 되세요!’ ‘성공하세요!’라는 인사가 최고의 덕담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꿈의 대상은 다르지만 그 모든 꿈에는 하나의 고통점이 있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2011년도 우리교회 목회가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공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공은 우리 모두가 하나도 예외 없이 염원하는 바입니다. 심리적인 병이 있지 않고서야, 자신이 하는 일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성공과 관련하여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성공’이라는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개혁개정판을 보면 구약에는 딱 두 번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성공하라’는 명령도 없고, 성공을 위한 비결도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공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헬라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 저자들은 그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모두 자신이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며, 성공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성경에는 성공이란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이 성공인데, 성경은 왜 성공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렘 29:11)” 희망을 주려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희망의 본질은 성공이 아닐까요? 미래에 성공하리라는 기대감이 있을 때 희망이 생기지 않던가요? 그런데 왜 성경은 성공이라는 말에 침묵하는 것입니까?

성경이 일관되게 믿는 사람에게 기대하고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Faithfulness입니다. 이 말의 뜻은 ‘믿음 충만’ ‘성실’, ‘신실’ 혹은 ‘충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 말은 성경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믿음이란 말 자체가 ‘신실함’을 뜻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실을 요구합니다.” 우리 말 국어사전에는 성실을 “정성스럽고 참되어 실속이 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신실’은 “믿음성 있고 진실함”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에게 성공이란 말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그에 비해서 성실이란 말은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에 우리 시대는 성실함을 가장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나가기 위해서는 성실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요령을 피울 줄도 알고, 꾀를 부릴 줄도 알고, 처세술이 능숙하고, 때로는 파격적인 언행도 서슴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신랑감 중에서 가장 인기 없는 신랑감이 ‘성실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로 성실성은 우리 시대에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그 성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성서가 말하는 성실함이 앞뒤가 꽉꽉 막힌, 그래서 숨도 쉴 수 없는 전혀 융통성이 없는 율법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실함은 매우 창조적입니다. 요령은 없지만 여유가 있습니다. 그 성실 속에는 사랑이 있고 자유가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실을 찬양하고 칭송하지만, 세상은 반기지도, 칭송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공’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고, 성경에서 가장 높이 사는 ‘성실’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이 추구하는 바가 정반대로 어긋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대로 믿어보길 원하는 사람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따라 살자니 세상에서 인기 없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고, 세상을 따라 성공을 추구하며 살자니 성경의 말씀을 역행하는 것이 되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 시간 이러한 고민을 풀기 위해서 성경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는 요셉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요셉을 가장 성공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요셉은 성공을 위해서 산 사람이 아닙니다.

요셉은 어려서 꿈을 많이 꾼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뭔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제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꿈은 요셉의 마음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환경과 일에 전심을 다 하고, 성실히 살았을 뿐입니다. 그가 위대한 것은 불굴의 투지로 성공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삶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성실신화를 이루어갔기 때문입니다. 그의 성실이 결국 그를 이집트 총리로 만들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서 제주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노예로써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정성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의 성실에 감동을 받은 집주인 보디발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성실하니 맡긴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주인의 부인이 그를 끈질기게 유혹했습니다. 만일 요셉이 인생 역전을 꿈 꾼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힌 절호의 기회입니까? 하지만 요셉은 자신을 믿어준 주인을 배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혹을 뿌리쳤고, 미움을 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도 사람인 이상 어찌 낙심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만일 그가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절망하거나 좌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신실한 사람이었기에 금세 마음을 추수이고, 처한 형편에 성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간수의 신임을 얻게 됩니다.

요셉은 자기가 하는 일이 제아무리 보잘 것 없어보여도 그 일에 정성을 다 했습니다. 그의 성실성은 항상 그에게 이롭게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성실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고, 계속 성실했기에 그는 역경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이집트 총리가 되지만, 그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총리가 되었을 때, “아, 내가 드디어 성공을 했구나! 성공을 했어!”하고 만세를 불렸다면, 그는 얼마 못가서 부패하고 타락했을 것입니다. 그는 원수 갚는 일을 위해서 그의 힘을 불의하게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는 끔찍하고 처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성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총리가 된 후에도 일관성 있게 성실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살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사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성공이라면 성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그와 같이 일관되게 성실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진실할 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그렇게 살아가는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시종일관 성실할 수 있게 했습니다. 사람이 성실하게 산다고 해서 늘 만사형통하고,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난관에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늘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지를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설령 그것이 성공이라 하더라도 그 성공은 필연적으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지를 않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성경은 우리에게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실하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성공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실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실패도 성공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지혜를 찾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성공의 비결을 찾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뒤져 가면서 자신들의 삶에 이로운 교훈을 찾아 적용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들에게 들이대는 도전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성경을 자주 읽는다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성경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바르고 참되게 살아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책입니다. 믿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4:16-17) 우리는 성경에서 성공을 배우려 하지 말고, 성실을 배우려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이 아니라, 성실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성공을 위해 사는 사람은 실패하면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실패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성공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백이면 백 그 성공 때문에 타락하게 됩니다.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현대인들이 잘 살게 되자 하나님을 떠나고 있지를 않습니까?

아마 여러분들 중에 제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는지 모릅니다. “아휴, 목사님 누가 진실하게 살아야 좋은지를 모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을 기대하신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디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눈 뜨고 코 베어가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 어떻게 나 홀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 목사라면 몰라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처지에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동떨어진 이야기예요. 정말 그런 것입니까?

목사라고 해서 안전지대일 것 같습니까? 성실함과 진실함과 신실함을 지키기에 더 유리한 곳이 있고, 더 불리한 곳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뿐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는 진실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면 성실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실해 질 수 있는 하나의 비결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골3:23) 우리가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이 정성을 다 할 때, 우리는 진실해질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만일 요셉이 성공을 목표로 했다면,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갔을 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요셉은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는 만난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살지 말고 성실을 목표로 하고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실을 목표로 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실을 목표로 하고 인생을 산다면, 우리의 실패까지도 성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살지 못하다면 성공까지도 실패가 되고 말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성경에는 성공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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