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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들어가려면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02-19 (토) 18:05 13년전 5689  

제목 :천국에 들어가려면

호 6:4-6, 마 7:21-23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구원받는 일입니다. 구원받는 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까? 바울 사도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시인하고, 부르기만 해도 다 구원받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인 오늘 본문말씀에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1-23)고 준엄한 심판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서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입만 벌리면, ‘주여, 주여’ 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거짓 선지자라는 것을 누가 알아차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한다 말입니다.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감히 누가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능력을 행한다는 인기 있는 목사님들이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내쫓고, 능력을 행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런 능력을 가지고 목회하는 목사가 성공하고, 존경받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온 일들이 예수님의 눈에는 불법을 일삼는 일로 보여 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그럴 리가 있느냐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거짓 예언자 일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목회하는 목회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교인이 자신의 행위가 불법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신앙인들의 심각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저의 설교를 통해서 풀어 주시고자 하는 과제입니다.

21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를 극명하게 구분해주고 있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예수를 믿는 자는 다 구원받게 된다.”는 신학이나 그러한 목사의 설교를 여지없이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는 달콤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설교에 취해 있던 사람들은 이 주님의 말씀 앞에서,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겁이 나게 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혹 나일 수도 있다는 말인데, 어찌 겁이 나고, 두렵지를 않겠습니까?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과 들어가지 못할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고,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세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5:20)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파 사람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이 ‘하나님의 의’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는 것을 밝혀주시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산상수훈의 모든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기에, 이 말씀이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입으로 ‘주여, 주여’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행함이 필요하다는 말이겠습니까? 많은 성서 주석가들과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말로는 안 되고, 행함이 뒤 따라야 한다.”고 주석하고, 설교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해석은 대단히 미흡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근본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입니다. ‘주여, 주여’ 말한 자들이 단순히 말로만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 나름대로 실천을 해도 열심히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열심으로 행했습니까? 능력을 행하는 부흥사들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합니까?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내쫓고, 많은 능력까지 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이 어떠한 변명을 할 것까지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법을 행한 자들은 자기들이 평생 행한 여러 가지 일들을 마지막 심판 날에 업적처럼 열거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들이 일부가 아니라, 다수라는 점입니다. 나는 한 평생 신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주의 종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죽도록 충성하면서 복음을 전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부흥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모태신자로써 장로나 권사, 집사로 교회를 위해 일평생 충성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 부흥사들, 대형교회목사들에게는 변명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23절 말씀을 보면 그 누구라도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과 연관시켜 마태복음 19장 3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많은 첫째가 꼴찌가 되기도 하고, 많은 꼴찌가 첫째가 되기도 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이 놀라운 역전이 마지막 재판정에서 벌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실로 까무라칠 정도로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판결이 내려지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실로 여기에서 말하는 ‘너희’가 ‘우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두렵습니다.

벌써 18년 전의 일입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한참 현신애 권사님이 지방에까지 제단을 만들어 놓고 은사집회를 하면서 많은 병자를 고칠 때였습니다. 한 번은 기도하다가 몇 칠 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일이 있었다고 해요. 그 때 하늘나라에 가보니 자기는 무사통과 할 줄만 알았는데 천국문지기가 앞을 가로막더니, 이름을 대라고 하더랍니다. 나 현신애 권사라고 나를 모른다면 간첩이라고 큰 소리를 치니까, 현신애가 누구냐고 당신의 이름이 여기에는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 나온 거예요.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래서 내 노라는 큰 교회 목사님,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 노라는 부흥강사 목사님들의 이름을 대면서 그들의 이름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도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 이름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의 이름은 있다고 하더랍니다. 현신애 권사가 깨어난 후, 그 동안 집회를 통해서 번 재산을 다 정리하니 20억이 넘더랍니다. 그 돈 모두를 김창인 목사가 대표로 있는 북한 선교회에 기증했다고 해요. 현신애 권사가 얼마나 놀랐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천국은 가야하니 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일평생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내쫓고 많은 능력을 행한 자들에게 너희는 불법을 행한 자라고 나를 떠나라고 준엄한 심판을 내린 것입니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법을 일삼는 행위를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적법성 여부를 율법이나 교리, 신조에 맞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계십니다. 바로 이 점이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행위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오늘 설교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마태복음 9장 13절 말씀과 12장 7절 말씀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리고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중요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9장 13절에서 바리세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장 7절에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너희가 율법을 근거로 남을 정죄하지만,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더라면, 차마 그러지는 못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미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지 제사를 원치 않는다.”( 호6:6) 이 말씀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긍휼 곧 사랑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긍휼이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 행위로 이어지고, 삶으로 살아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이 긍휼인 줄조차 알지 못하고, 내 뜻대로 행하고 나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둘러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설령 하나님의 뜻이 긍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하더라도,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어서,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찌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왜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까? 천주교나 불교보다도 더 많은 구제와 봉사를 하고 더 열심히 전도하는 수고를 하면서도, 왜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비춰지지를 않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제를 하고 봉사를 해도 그것이 그들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축복받기 위해서 하고, 내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은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나요, 교회요, 전도지, 이웃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웃사랑은 단지 수단과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제나 도움을 받는 쪽에서 볼 때, 저들은 나를 사랑해서,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저희들을 위해서 하고, 교회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의 행위조차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세상이 눈치 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하고도 욕을 먹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잘 들어야합니다. 사랑 없이 하는 일은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 하더라도, 불법을 행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그래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긍휼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 긍휼을 실천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못해서 불안하십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힘을 내세요. 그리고 사랑에 끊임없이 도전하십시오.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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