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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02-26 (토) 16:16 13년전 7380  

제목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욥기23:8-10, 야고보1:1-4


인간 인내력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요? 영국의 남극탐험가 스코트가 노르웨이 아문센과 경쟁하다가 실패했습니다. 그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 1914년 12월 영국의 섀클턴 경이 24명의 원정대를 이끌고 남극대륙 육로횡단에 나섭니다. 그들을 태웠던 탐험선 인쥬어런스( Endurance)호가 단단한 빙벽에 갇혀 결국 침몰했습니다. 이들은 육지와 통신이 두절된 채, 혹한을 견디어 내며, 바다표범, 물개, 펭귄, 고래 사냥을 해 허기진 배를 채워가며 생존을 위한 힘겨운 사투를 643일 동안이나 하게 됩니다. 이 지옥과 같은 환경에 맞서 팀워크와 희생정신, 서로를 위한 위로와 격려를 무기로 24명 전원이 무사 귀환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인내력입니다.

어른들은 불편한 세월을 많이 살았습니다. 십리, 이 십리, 삼십 리, 길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이성이 그리워도 결혼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배가 고파도 밥이 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했고, 양식이 떨어지면 굶어야 했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그들의 노예가 되어 전쟁터로 탄광으로 끌려가는 처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6.25의 동족상잔의 비극은 그야말로 참혹했습니다. 해방 후에도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보리 고개를 넘어야하는 설음도 참아내야 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지 않습니까? 젊은이들은 그 때 우리가 자랄 때처럼 배고플 이유도 없겠지만, 설사 배고프다 해도 참고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가스렌즈에 물을 올려놓고, 컵 라면 하나 들고 오면 5분이면 해결 됩니다. 과학의 발달과 정보 통신의 발달, 인스턴트식품은 현대인들의 생활 리듬을 계속 빠르게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속도 감각에 길들어진 젊은이들이 어디서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훈련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세대는 조급합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에 부딪혀도 그것을 극복해낼 힘이 없어요. 쉽게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덩달아 어른들까지 조급해졌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시험을 통해서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인내를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인내가 온전한 인격자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아름답고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인내라는 자궁을 통해서 창조되어 나옵니다. 우리가 이루어내는 모든 성공이 인내가 만들어낸 작품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에 부딪힐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타락시키려는 시험과 유혹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들은 우리를 타락시키려고 보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주고, 용기와 확신을 갖게 하고, 정금같이 연단시켜 온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온갖 시험, 환란과 시련들은 우리를 강하게 해서 쓸모 있는 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욥은 무서운 환란을 당하면서도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환란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꿈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고 했습니다. 사도들이 지향한 일관된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시험이나 환란 시련이 오면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 환란이란 불가마를 통해서 나를 정제하고, 그 시련을 통해서 나를 단련해서 정금과 같게 하시고 보석처럼 빛을 발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믿음의 주가 되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수치를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시고, 믿음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는 자는 정금과 같이 되어 나올 것입니다. 길이 참으사 온전하게 되신 주님처럼 우리도 길이 참아서 온전해 집시다.

둘째로 인내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듭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얍1:12)고 했습니다. 축복과 면류관은 인내로 얻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아니더라도 어른들로부터 “참아라, 참는 자가 복이 있단다. 참는 자가 이기는 법 야!”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랐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인내는 성공의 어머니다”는 말을 배웠습니다. 성공을 원하십니까? 승리자가 되길 원합니까?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길 원하십니까? 인내 하십시오. 한번 참지 못하고 평생 쌓아올린 공든 탑을 한 순간에 무너트리고 발등을 찍어야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은 극기 훈련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거예요. 야고보 장로님은 예언자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고, 순교자가 되고,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움과 환란과 고통을 참아내고 이루어낸 금자탑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13:7)고 했습니다. 인내는 교육이나 수양,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기에 십자가의 고난을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만 있으면 어떠한 고난과 시련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춘향이는 이 몽룡을 사랑했기에 그 모진 변사도의 고문을 견디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순교자들도 주님을 사랑했기에, 그 모진 핍박과 박해를 이겨낸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아낸다, 견디어낸다’는 말은 죽지 못해서 억지로 참는 그런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내란 자기가 현재 당하고 있는 그 어려운 환경과 고난을 견디어 내면서 극복해내고 변화시켜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믿습니까?

무엇이 환난을 이겨내게 합니까? 무엇이 환난 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게 합니까? 고난 가운데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믿고 확신할 때, 사랑은 환란 중에 거룩한 기쁨을 맛보며 감사하게 합니다. 사랑은 어떠한 환란 중에도 승리를 바라보며 불굴의 정신과 투지로 역경을 이겨나가게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는 자식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분이 아니다”는 것을 믿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는 어떠한 곤경도 이겨낼 수 있어요. 그래서 신앙이 소중한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속담에 “뽕나무 잎이 시간과 인내로 비단이 되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뽕나무 잎이 비단이 되는 데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다려야 합니다.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뽕나무 잎은 틀림없이 비단이 되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기도를 즉시 응답해주시기도 하십니다만, 때로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안 된다고도 하십니다. 그러나 기다리면, 반드시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뽕나무 잎이 비단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꿈과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나치의 히틀러가 두려워서 지하에 숨어살던 한 유대인이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그가 믿고 의지하며 공포의 날들을 이겨냈던 글들을 공개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분노를 녹여내고, 좌절감을 해소하며, 외로운 가슴을 사랑으로 채워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모래 위에 남기고 간 자국들을 파도가 씻어가 버리듯이 나의 아픈 상처를 말끔히 씻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소년을 위대한 어른으로, 죄수를 선량한 시민으로, 알골 중독자를 교회의 장로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듯이,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그가 계심을 믿었기에 그 많은 날들의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빗방울이 대리석을 구멍 내는 것처럼 우리들의 발걸음이 느리고 약해 보일지라도 중단 없이 전진해가노라면 반드시 우리는 목표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인내를 위해서 두 번째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저는 지금 희망이란 제목이 붙여진 와츠(Watts)의 그림이 생각이 납니다. 지구 위에 한 가냘픈 여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그녀에게 불친절했습니다. 그녀의 두 눈은 앞을 볼 수 없도록 붕대로 감겨져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하프가 들려져 있었으나, 줄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단 한 줄만 남아 있었는데, 그녀는 그 마지막 남은 한 줄로 연주를 시작합니다. 거기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와 온 세상을 뒤덮었고, 어두운 밤하늘은 빛나는 별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란 줄이었습니다. 물질의 줄, 출세의 줄, 사랑의 줄, 건강의 줄,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줄들이 하나씩 둘 씩 다 끊어져 나간다 해도 희망의 줄만 끊어지지 않았다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능히 참아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인내의 최고봉에 오르려면 겸손과 온유가 필요합니다. 성 프란시스는 우리가 진실하고도 완전한 기쁨을 어디에서 얻게 되는가를 묻습니다. 그는 파리 대학의 대학자들과 모든 감독과 대주교들, 영국과 프랑스의 왕들까지 다 프란시스 회에 가입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진정한 기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프란시스 형제들이 전도를 나가 모든 불신자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온다하더라도 온전한 기쁨은 거기에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시스는 진실한 기쁨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내가 어느 겨울 밤 전도를 마치고 먼 길에서 돌아왔습니다. 날씨는 춥고, 온몸이 먼지투성이고, 상처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 형제단이 묻고 있는 숙소의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데로 가서 묶을 곳을 찾아보라는 싸늘한 대답뿐이었습니다. 내가 프란시스라고 밝히고 여러 번 사정을 하는데도 안에서는 역정을 내며,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도 매몰차게 거절을 당했는데도 나는 기뻤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을까요? 나는 그 때 진정한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참된 신앙의 미덕과 내 영혼의 구원의 기쁨이 내 온몸에 파도처럼 밀려와 채워지는 것을 나는 경험했습니다.

프란시스가 겪은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신이 세운 공동체의 형제들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있는 프란시스는 화를 내야 마땅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인내하며 마음의 평화를 빼앗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온전히 이룬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만이 외부의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진실한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면 됩니다. 희망을 잃지 마세요. 그리고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자유와 생명, 면류관을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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