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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이 세상, 신학 그리고 영성-마르틴 루터의 "바른신학함"의 원리

김주한 (광주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1-03-11 (금) 15:39 11년전 8120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대학원 신앙수련회 주제강연∥
 




이 세상, 신학 그리고 영성
―마르틴 루터의 “바른 신학함”의 원리를 중심으로














                  때   ∥ 201139() 오후 3-5
                  곳   ∥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당
                  강사 ∥ 김주한 박사(한신대 교목, 역사신학)
                  주최 ∥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1. 들어가는 말
   요즘 영성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과연 ‘영성’ 과잉시대라 할 정도로 개교회는 물론 신학교육 현장에서도 ‘영성’이니 ‘영성적인 삶’, ‘영성훈련’, ‘영성신학’과 같은 단어들을 흔하게 접하게 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산업화, 현대화, 과학화, 세속화를 거치면서 현대인들의 삭막해진 정신 상태를 신앙을 통해 극복해보려는 열망 때문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교회의 양적 성장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기독교 신앙의 깊이 있는 체험이나 경험을 추구하려는 개인의 내면적인 갈급함의 표현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교리화되고 형식화된 신앙생활의 피로감에 대한 반성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신앙과 실생활의 이율배반적인 행태에 대한 괴리를 언급하기도 한다. 아무튼 진단도 제각각이고 거기에 대한 처방도 여러 가지이다 보니 기독교 영성이 무언가하고 논구해보려 하면 시작부터 벽에 부딪힌다는 느낌은 비단 나만의 경험일까?    
   금번 신학대학원 신앙수련회 주제도 ‘영성’이다. 이 주제 앞에 우리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나로서는 사뭇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왜냐하면 영성과 관련된 서고들은 엄청난 부피의 책들로 신음할 정도이고 기독교 영성에 대한 개념규정이 학계에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주제를 금번 신앙수련회에서 다루려는 의도가 무엇일까? 나름 짐작해 보았다. 그것은 영성이란 말이 분명한 이해 없이 모호하게 사용되거나 잘못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또한 영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을 통해 신학도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정립해 보자는 목표가 있지 않을까싶다.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해법이 있는가? 아래에서 입론하겠지만 나는 마르틴 루터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해보려고 한다. 이 강연을 통해 나는 학생들이 영성, 영성운동, 혹은 영성신학에 대해 뭔가 본질적인 접근을 시도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기 앞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영성에 대한 개념규정이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이해가 다르고 정의도 제각각이어서 영성의  정의나 범위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1) 영성을 물질과 대립시켜 정신적인 영역으로 국한하여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신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신비한 묵상, 기도, 은둔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영성에서는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적인 세계를 넘어선 황홀경(ecstasy)이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하나님과 사랑의 일치를 통해 세상 모든 만물과의 새로운 차원의 만남을 영성의 가장 중요한 본질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영성관련 담론들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압축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영성의 범위를 초월적인 실재(신)와 개인과의 대면으로 한정하여 자기초월과 자기계발의 한 분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고,2) 또 하나는 궁극적인 실재와 자기 자신, 그리고 공동체와의 관계성 속에서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3) 전자를 극단적으로 밀고 들어가면 극단의 주관주의나 신비주의, 감정주의 그리고 도피적 관조주의로 흐를 수 있고, 후자를 극단화하면 내면적인 자기성찰 없는 행동주의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기독교 영성을 이해하려 할 때 이 두 가지 양면성을 늘 명심해야 한다.     
   또 하나, 영성의 종류와 그 수련 방식에 내포된 신학적인 문제이다. 영성이란 모든 종교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즉 불교영성, 힌두교영성, 이슬람영성 처럼 말이다. 또한 영성은 종교 이외의 범주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과학주의 영성, 세속주의 영성, 자연주의 영성, 뉴에이지 영성 등 어떻게 보면 영성은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요술방망이와도 같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기독교 영성’이다. 무엇이 기독교 영성인가? 무엇보다 기독교 영성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이다. 기독교인이란 신앙공동체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 영성이란 교회의 삶 전체와 관련된 생명 있는 삶의 표현을 말한다. 하여 공동체적인 이상을 외면한 채 개인주의화된 영성적 삶의 표현들은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또한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뿐만 아니라 죄, 회개, 은총이라는 교의학적인 주제가 영성의 기초를 형성한다. 자기향상과 완전추구에 초점을 맞춘 영성수련(spiritual exercise)은 신인협력설의 오류나 도덕만능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영성적인 경험과 신학적인 성찰이 동전의 앞뒤처럼 분리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영성의 개신교적인 특성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 전통과 구별된 개신교적 영성의 특성이란 무엇이냐? 개신교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성이란 용어보다 경건(piety)이란 말이 훨씬 친근감 있게 들릴 것이다. 칼뱅의 영향일까? 칼뱅은 그의 주저『기독교강요, Institutes』에서 영성보다는 경건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칼뱅은 경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아는 데서 비롯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경건’이라 부른다.”4) 칼뱅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먼저 아는 일이야말로 경건의 첫걸음임을 역설한다. 그에게 경건이란 인간 삶의 전 영역에 임재 해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아 그 은총에 대해 그리스도인 각자가 책임 있게 응답하는 삶을 사는 방법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신교적인 영성, 혹은 영성수련과 관련하여 유념해야 할 중요한 점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이 영성의 참된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신적인 어떤 것을 유한하고 인간적인 것에 가두고 그것과 동일시하는 일체의 우상행위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며, 또 수행자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여하간의 행동으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개신교 전통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행위의 상관성에 대한 이러한 자각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기술이나 방법에 의해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미 주어져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그 은총에 참여하기 위한 은혜의 수단들은 신자의 삶에서 필요하다. 신앙인의 삶에서 회개, 성화, 기도, 묵상, 선교, 봉사 등이 강조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강화시켜주는 은혜의 수단이요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어야지 그런 것 자체가 자신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우리는 루터의 ‘바른 신학을 위한 방법’을 탐구해 보기로 하자. 루터의 바른 신학을 위한 방법을 탐구해 보려는 이유는 신학도에게 영성의 본질과 그 방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바른 신학함’은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세밀한 탐구와 진지한 반성 없이는 어떠한 영성 담론도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나는 루터의 신학방법을 당대의 콘텍스트에서 탐구하겠지만 그의 방법론의 현대적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록 하겠다. 

2. 루터의 신학이해
   신학이 무엇이고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다루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있다. 먼저 신학이란 용어의 기원과 관련된 것으로 이는 신학의 본질과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하다. ‘신학’(theology)란 말은 플라톤의『국가』(The Republic)에 처음 등장한 용어로 그것은 ‘신화론’(mythology)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신학’이란 본시 노래나 구전형태로 전해진 신들의 이야기이다. 헬라 세계에서 한 토막의 이야기는 ‘신화’(mythos)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신학’이란 신들의 이야기에 대한 암송(recital)이다.5) 따라서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유일신론보다는 다신론적인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신화론적인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철학적이고 합리적인 우주론을 제시했던 사람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따라서 이들은 신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신학이 신들에 대한 합리적인 개념과 설명을 제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신학이 ‘신화’의 수준을 벗어나 합리적인 설명체계를 갖추기 위해서는 두 가지 표준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는바, 즉 신은 절대 선하다는 것, 그리고 신은 불변의 존재라는 것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을 ‘신화론’으로부터 아예 분리시켰다. 그는 ‘신학’(theo-logic)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단어는 철학을 포함한 이론학문의 전 분야를 포괄하는 ‘형이상학’(metaphysics)을 의미하였다.6) 말하자면 ‘형이상학’은 ‘신화’(mythos)를 비판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학’(theologic)이란 더 이상 ‘신화론’이 아니라 학문(science)으로서의 최고봉을 의미하였다.
   학문적인 체계로서 신학은 중세 스콜라주의에서 만개하였다. 중세 스콜라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빌어 신학의 주요 항목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집중하였다. 여기서 중시된 것은 논리의 일관성이었고, 이에 따른 신학의 사변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중세 신학자들은 신학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중세 대학에서 대표적인 신학교재로 사용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095-1160)의『명제집 Sentence』이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10-1495)의『집록 Collectorium』도 모두 신학의 각 항목들을 다루기 전에 서론(Prolegomena)에서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하고 있다. 이 교재들의 서론에는 신학의 대상과 목적, 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비엘의『집록』이다. 비엘은 ‘프로레고메나’에서 피터 롬바르드의『명제집』에 관한 주해를 시도하면서 윌리엄 옥캄(William of Occam, 1285-1349)의 견해를 빌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비엘은 신학이 지금까지 씨름해 왔던 문제들을 세 가지 질문으로 명쾌하게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첫째, 어떤 종류의 지식(notitia)이 과연 신학인가? 신학이란 학문적인 지식(scientia)인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지식인가? 둘째, 신학의 대상(주제)(subiectum)은 무엇인가? 셋째, 신학은 실천적인(praxis) 학문인가 아니면 사변적인(speculatio) 학문인가?”7)
  루터가 공부했던 에어푸르트 대학은 비엘의 제자들로 포진되어 있었고 따라서 루터의 신학교육은 철저하게 스콜라주의(유명론, nominalism) 학풍의 영향 아래서 이루어졌다. 루터는 유명론의 대가 윌리엄 옥캄과 가브리엘 비엘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한 마디로 비엘의 신학은 루터의 신학사상을 형성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에어푸르트 신학생들이 즐겨 읽었던 신학교재는 비엘의『집록』이었다. 나중에 루터가 스콜라주의를 비판하고 나섰을 때 그 핵심에는 신학에 대한 중세 스콜라주의와의 이해의 차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8) 말하자면 신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와 직결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루터의 신학이해는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 신학과의 비교를 통해 그 차별성과 특징이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비엘이 제기했던 세 가지 질문을 따라 루터의 신학이해를 탐구해 보려한다. 이 논의를 통해 우리는 루터의 신학이해가 중세와 어떤 연속성이 있는지 그리고 또한 어떤 불연속성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1)신학이란 무엇인가? 학문인가 지혜인가?(qualis notitia sit theologia)
   신학이란 학문인가 지혜인가라는 질문에 루터는 신학은 학문(scientia)이라기보다는 지혜(sapientia)에 더 가깝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루터는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신적인 지혜에 속하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신학이라고 역설한다.9) 루터가 신학을 학문이라기보다 지혜라고 정의할 때 그는 신학에서 학문성을 배제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포함시킨다. 지혜는 학문과 학문 이전의 삶의 세계를 모두 포함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루터가 신학을 지혜라고 말할 때 그 지혜란 “경험적인 지혜”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루터에게 신학이란 “경험적인 지혜”(sapientia experimentalis)로 정의된다.10) 루터가 말한 “경험적 지혜”란 학문과 학문 이전의 삶의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고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묶어내는 연결 통로이다. 
   경험이 학문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산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학문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하나의 궁극 원리(principium)에 의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어떠한 학문도 궁극적인 원인자(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제일원인’) 없이는 사물이나 존재의 타당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해 낼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문 분류에 따르면 하나의 학(science)으로서의 신학은 최고의 학문이다. 신학(theologic)은 오직 불변의 것, 참으로 존재하는 필연적인 것에만 관계하는 학문인데, 바로 ‘신’(divine)에만 관심한다. 그 신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제일 원인”이다.11) 따라서 신학(theology)이 ‘학문으로서의 신학’(theologic)을 의미할 때 그것은 경험적인 세계가 배제된 그야말로 순수한 합리적인 신학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과 지혜의 차이를 폐기하여 지혜를 학문의 영역에서 배제하였다. 왜냐하면 지혜는 경험적인 세계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경험이란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것이며―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과 대조해서―불확정적인 것이어서 학문적인 영역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지혜가 학문을 포괄한다면 그 때 학문은 그 자체로 이미 절대적인 주장을 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것을 증명해 낼 수도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떤 경험적인 것이나 역사적인 것들은 신학의 개념에서 모조리 배제되고 만다.12)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자들도 경험적인 영역을 학문의 범주 밖에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신학이란 무시간적인 원리에 관계하는 학문으로 보았다. 아퀴나스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역사적인 실존이나 경험적인 세계와 관계한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학의 실천적인 측면보다는 관상적인 성격을 더 강조했다.13) 아퀴나스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경험적인 구조 내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신 분이다. 중세 스콜라신학자들에게 있어 일체의 모든 경험적인 지식(notitia)은 학문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학문이란 경험보다 상위 개념이다.
   그러나 루터의 견해는 이들과 달랐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시간성 속에서, 역사적 경험 안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경험되고 인식된다. 따라서 루터에게 신학이란 사물을 지배하고 작동시키는 어떤 원리들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역사와 경험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루터가 말하는 경험이란 인간이 역사 안에서 겪는 온갖 잡다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한 경험을 말한다. 하나님 말씀을 통한 경험이란 고통과 시련, 슬픔과 절망이 노정되어 있는 삶의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의 경험을 말한다. 이렇게 역사적인 현장 한복판에 주어진 하나님 말씀과의 경험에서 시작되는 신학이란 배움의 끝이 없는 무한한 지혜이다.14)
   루터가 신학을 “경험적인 지혜”로 정의 내림을 통해 분명히 말하고자 한 바는 신학이란 경험적 세계나 역사적 차원이 배제된 순수한 이론 학문으로 다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 말씀과 관련된 무한한 지혜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루터의 신학이해는 아래에서 소개할 바른 신학을 위한 세 가지 규칙들에 분명하게 잘 드러나 있다.

2)신학의 대상(subiectum)은 무엇인가?(subiectum theologiae)
   이 물음은 신학이 다루는 것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으로 이에 대한 루터의 대답은 1532년도 그가 시편 51편을 주해할 때 잘 드러나 있다.15) 탄식시에 해당하는 이 시편의 주제는 죄와 은총에 관한 것으로 이 두 가지 개념은 루터의 신학이해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루터에 의하면 신학의 주제는 죄와 은총 이외에 그 어느 것도 될 수 없다. 죄와 은총이 스콜라주의자들처럼 철학적으로, 즉 형이상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말해 질 수도 있다. “스콜라주의자들은 철학적인 의 혹은 정신적인 어떤 특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들은 의로움을 마음속에 있는 어떤 특성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현재할 때 모든 인간은 영과 육에서 거룩하다고 생각한다.”16) 그러나 루터는 죄와 은총이란 철저하게 신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죄와 은총을 하나님의 약속(promissio)과 그분의 율법(lex)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그것은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죽이는 율법과 반면에 위로하고 생명을 부여하는 복음에 관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 51편은 죄를 범한 한 인간(다윗)의 이야기를 넘어서 “죄의 근원과 죄의 보편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17) 이러한 죄의 보편성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즉 우리의 죄에 대한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도록 만든다.18) 인간이란 역사적인 무풍지대에서 실존하는 어떤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무시간적인 원리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시편 51편 4절에(“오직 당신께만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이란 지극히 감성적이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의 인간학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인식인 동시에 또한 인간에 관한 인식이기도 하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 양자의 관계는 구속자 하나님과 범죄하고 타락한 버림받은 인간이란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이 같은 둘의 상관관계는 특별한 매개체, 즉 하나님 말씀을 통해 드러난다. 즉 죄를 고백하는 말을 통해서 그리고 죄를 용서하는 말씀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학의 주제를 주제답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말씀의 특별한 적용이다.19) 하나님과 인간의 이러한 상관관계, 즉 죄를 범한 인간과 그 죄를 의롭다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신학의 대상이요 주제이다.20) 이것에서 벗어나 신학에서 추구하는 그 어떤 것도 모두 오류이고 공허한 잡설에 불과하다.
   중세 스콜라신학과 비교해 볼 때 새로운 것은 루터가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도 신학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인간을 포함시키는 것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죄를 범한 인간, 즉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와 역할을 바르게 정립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알트하우스(Paul Althaus)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올바로 인식될 수 있고, 인간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21) 말하자면 신학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시는 하나님만이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은 또한 죄인인 인간에 의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죄인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 드러난다는 점에서 인간도 주체, 즉 신학의 대상에 포함된다는 말이다.
3)신학은 실천적인가 아니면 사변적인가?(an theologia sit practica vel speculativa)   
   이 질문 자체는 신학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론과 실천을 구분해서 사고하는 것은 근대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근대적 사고의 틀에서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이론보다 실천에 우선성이 주어졌고 이론의 가치는 실천에 비해 낮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적인 질문은 루터를 비롯한 당대의 종교개혁자들에게는 결코 적용될 수 없는 질문이다. 루터에게 신학이란 항상 이론적이자 동시에 실천적이다. 따라서 계몽주의 이후 합리주의의 산물인 이론과 실천의 근대적 분리의 관점에서 루터의 신학이해에 접근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방식이다. 
   루터에게 ‘신학은 실천적인가 사변적인가’ 하는 질문은 그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결부되어 있다. 루터에게 신앙이란 인간의 행위 가운데 최고의 행위에 속하며 그 자체가 하나님의 행위이다. 신앙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에 대한 단순한 관념이나 추상적인 생각이 아니다. 신앙은 매우 “적극적이며 강력한 것”이다.22)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을 의롭게 만든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 “모든 선한 행위들 중에 첫 번째요 가장 높은 그리고 가장 고귀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이다.”23) 신앙은 모든 진정한 선한 행위들이 시작되는 근거이다. 루터에게 신앙과 행위의 관계는 변증법적이다. “신앙이 없는 곳에는 선한 행위 또한 있을 수 없다. 반대로 선한 행위가 없는 곳에는 신앙도 없다.”24) 행위를 결핍하고 있는 신앙은 “효험 있는 신앙이 아닌 위선적인 신앙”이다.25) 따라서 루터에게 신앙은 철저하게 사변적인 것이 아닌 실천지향성의 특성을 지닌다.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을 실천적이라기보다 사변적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비엘은 옥캄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신학을 학문(scientia)이나 지식(notitia)으로 간주하여 신학도 일반 학문의 범주 안에서 전개된다고 주장하였다. 비엘은 무슨 학문이든 중요한 것은 이론(speculatio)과 실천(praxis)의 구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theoria)26)과 실천(praxis)의 구분에서 유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상적인 삶’(vita contemplativa)과 ‘능동적인 삶’(vita activa)을 구분하여 후자보다 전자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상의 가치라고 주장하였다. 관상적인 삶(vita contemplativa)이야말로 인간에게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준다.27)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지성적인 덕’(virtutes intellectuales)과 ‘도덕적인 덕’(virtutes morales)을 구분하여 ‘관상적인 삶’은 지성적인 덕과 연결하고 ‘능동적인 삶’은 ‘도덕적인 덕’과 연계시켜 윤리적인 삶의 차원과 관련지었다. 
   중세 스콜라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구분에 근거하여 신학이 사변적인가, 실천적인가를 정의하고자 하였다. 루터는 이러한 전통을 따를 수 없었다.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따라 스콜라신학자들이 구분했던 이분법적인 도식, 즉 이론과 실천, 관상과 행위의 구분을 파기한다. 루터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능동적인 삶(vita activa)이 행위(works)를 통해, 관상적인 삶(vita contemplativa)이 사변(speculation)을 통해 우리를 잘못 인도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28) 루터는 신학을 행위(actio)로 간주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관상(contemplatio)의 한 부분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그는 이 둘의 종합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제3의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즉 “수동적인 삶”(vita passiva)이 바로 그것이다. 루터는 “수동적인 삶”의 관점에서 신학을 재조명한다. 오늘날 “수동적”이란 말은 무기력을 뜻하는 것으로 종종 오해되는데,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동적인 삶”이라고 정의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주체이시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수동적인 삶”의 관점에서 볼 때 신학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학이란 인간의 행위로 생각한다. 그러나 루터에게 신학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다. 신학이란 우리의 작업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는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work)이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 하나님의 행위로 이해된 신학과 신앙 사이에는 근본적인 동일성이 존재한다. 신학이 하나님의 행위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앙 역시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에 의해 행해지도록 허락한다는 의미에서 수동적”이다.29) 신앙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의 성취나 업적이 아니다. 따라서 신앙을 통해 우리에게 선사되는 그리스도의 의란 전적으로 ‘행위 의로움’(works-righteousness)과는 반대된다.
   루터에게 신앙과 신학은 분리되지 않는다. 신앙으로 이해된 신학은 지적인 미덕도 윤리적인 덕행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루터와 다르게 자동적으로 신앙과 신학은 마치 대립되는 것인 양, 구분 지어 마치 신학은 신앙에 대한 숙고나 반성인 것처럼, 일종의 사변적이고 인식론적인 그 무엇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루터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구분 자체가 성립되지 아니한다. 루터에 의하면 신앙으로 이해된 신학은 단순한 지적인 사변도 그렇다고 윤리적인 덕행도 아니다. 신학에서 중요한 것은 철학적인 사변이나 이론적인 사색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절망과 고통, 시련과 아픔, 죽음을 경험하는 구체적인 신앙의 경험이다. 이러한 신앙의 경험을 루터는 “영적시련”(tentatio =Anfechtung)으로 표현하는데, 이것 없이 신학은 절대로 바로 이해될 수 없다. 그러므로 루터가 이해하는 신학은 스콜라주의에서 구분하여 표현한 사변적인 학문도 실천적인 학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행위를 깨닫게 되는 실존적인 학문, 즉 “경험과 연관이 있는 지혜”(sapientia experimentalis)를 의미한다. 그가 “신학은 실천적(practica)이지 사변적(speculativa)이 아니다”30)고 말할 때 그 ‘실천’이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또 그 명제는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가 말한 실천이란 신학을 공부할 때 필요한 세 가지 규칙들, 즉 ‘기도, 묵상, 영적 시련’에 상응하는 특별한 실천을 의미한다. 

3.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루터의 바른 신학을 위한 방법
   루터는 1539년 독일어로 쓴 자신의 저술들을 전집으로 출판하는 프로젝트 서문에서31) Oratio―Meditatio―Tentatio라는 세 개념을 통해 신학수업의 방법에 대해 소개하였다.32)  이후 이 세 개념은 개신교 신학수업의 방법을 기술하는 신학입문서의 구조적이며 내용적인 틀과 윤곽을 제시하였다. 루터는 도서관 서고만 차지하면서 하나님 말씀, 즉 성서읽기를 방해하는 책은 없어져야 하고, 대신에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에 도움이 되는 책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만약 자신의 저술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방해가 된다면 몽땅 폐기처분해도 좋다고 말하였다.33) 그러면서 신학을 공부하는 올바른 방법에는 반드시 이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법칙은 루터의 개혁사상의 핵심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내에서 ‘신학함’은 물론 개인의 영성 함양의 범례가 되었다.34)
   루터가 이 세 개념을 어디서 빌려 왔는지에 대해 학계의 토론이 있었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로 알려진 즉 ‘lectio(읽기)-meditatio(묵상)-oratio(기도)-contemplatio’(관상)으로 구성된 네 단계는 초대교회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영적 성장을 위한 성경묵상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빅토르 휴고(Victor Hugo, 1096-1141), 귀고 II세(Guigo II, ?-1188)35)에 의해 체계화되어 중세 수도원에서는 거의 규범적으로 사용되다시피 했다.36) 루터는 수도원적인 영성 전통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Oratio-Meditatio-
Tentatio’는 기존의 렉시오 디비나의 순서만 교체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37) 루터는 이 세 개념을 가지고 당대 신학교육의 방향과 내용을 본질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이제 세 가지 규칙들을 하나씩 검토해 보기로 하자.  
1)기도(Oratio)
   루터에게 바른 신학을 위한 첫 번째 규칙은 ‘기도’이다. 루터의 공식에서는 전통적인 렉시오 디비나 순서와 다르게 ‘기도’가 맨 앞에 등장한다. 그 이유는 인간 이성만으로도 완벽하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다른 학문과 달리 신학을 공부하는 데는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루터에게 신학 공부의 핵심은 성서해석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다. “성서는 이 세상 책의 모든 지혜들을 한갓 어리석음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성서만이 영원한 생명에 관해 가르치는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38)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관해 가르치지 않는 예컨대 이솝 우화와 같은 책들을 읽을 때면 성령의 도움이나 기도와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신학, 즉 성서를 올바로 해석하려 할 때 성령의 조명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이성과 감각이 죄로 인해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의 조명 없이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관한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두워진 이성을 통해서는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성서의 진리를 올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에 의해 다시 밝아진 계몽된 이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조명되고 분명하게 밝아진 이성을 통해 성서를 읽을 때면 하나님은 이 세상 너머 저 높은 하늘이 아니라 진흙탕 같은 어두움과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내려와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일 신학생들이 이렇게 낮아지신 하나님의 겸손과 자비를 정말로 인식한다면 그들은 위를 쳐다보지 않고 겸손하게 낮아질 것이며 언제나 아래로부터 출발하게 될 것이다. 루터가 첫 번째 규칙을 통해 분명히 말하고자 한 바는 다음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정말 겸손하고 진지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라.[마 6:6] 그리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 성령을 너희에게 주실 것이며 성령은 너희를 깨우치고 너희를 인도하며 너희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다.”39) 말하자면 겸손과 진실 됨으로 기도하면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주시며, 인도하시며, 이해력을 주시기 때문에 바른 신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2)묵상(Meditatio)
   루터에게 바른 신학을 위한 두 번째 규칙은 ‘묵상’이다. 여기서 묵상이란 마음으로 하는 내적 명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묵상이란 마음으로 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읽고 또 읽고 반복해 가면서 성찰하는 것을 말한다. 루터는 반복적인 성찰을 결코 피곤해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읽고 듣고 말한 바를 끊임없이 묵상하고 성찰할 때 “당신은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묵상을 통해 우리는 성령께서 그러한 말씀을 통해 의도하신 바를 깨달을 수 있다.40)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는 외적인 말씀(기록된 문자의 말씀)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루터는 묵상이 자칫 내적 경건을 위한 성서 묵상으로 오해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외적’(outwardly), 혹은 ‘실제적’(actually)이란 단어를 특히 강조한다. 루터에게 ‘Meditatio’란 성령에 의해 조명되고 계몽된 이성의 도움으로 성서의 본문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 성서를 문법적으로, 내용적으로 주석하는 학문적 연구를 말한다. 말하자면 루터에게 묵상이란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루터가 이 두 번째 규칙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첫 번째 규칙이 자칫 영적이고 사변적인 방법으로 오해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날카롭게 지적하기를 기록된 문자의 성서 말씀은 “심령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외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41)
   루터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네 가지 경험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였다. 먼저 말씀을 통해 행위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고, 다음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수여하신 은총의 선물에 감사하게 되며,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감 없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매일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42) 루터는 묵상이 없이는 결코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말하고 읽고 듣고 쓰고 하는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외적인 말씀, 즉 성서 묵상을 통해 습득된다. 외적인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어두워진 이성을 계몽되고 밝아진 이성으로 바꾸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적인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성령을 너희에게 주지 않으실 것이다.”43) 따라서 말씀 묵상은 신학공부에 필수적이다. 루터가 ‘Meditatio’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신학 서적에 대한 독서들은 하나님 말씀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자 함이었다. 루터에게 묵상이란 반드시 성서 연구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묵상이란 사도 신조, 다른 교부들의 글이나 경건 서적들에도 적용된다. 루터이후 루터파 경건주의 전통에서는 인문학을 포함한 신학의 전 분야의 공부가 ‘Meditatio’ 안에서 수행되었다.

3)Tentatio(영적시련 혹은 실천)
   루터가 바른 신학 공부를 위해 제시한 세 번째 규칙은 독일어의 ‘Anfechtung’으로 번역될 수 있는 ‘Tentatio’이다. ‘Tentatio’는 “하나님 말씀이 무엇이며 어떤 것이 참이며 옳은 것인지를 이해하고 경험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시금석”이다.44) 하나님 말씀은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부딪치고 실천되고 경험되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은 사변적인 추론이나 사색을 통해 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유혹을 통해서 그것이 살아있음이 검증되어야 한다. 루터는 시편 기자(119편)의 경험을 통해 ‘Tentatio’의 의미를 설명한다. 묵상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 한 복판에서 늘 고통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온갖 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시험과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45) 이 세 번째 규칙을 통해 루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학생들이 시편 기자(119편의 저자)의 심정으로 들어가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즉 왜 시편 기자가 그토록 온갖 주변의 적들에 대해 불평하는지 또 그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지를 보라는 것이다.
   루터는 바른 신학이란 반드시 실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고(experimentum), 시험되고(probare) 시련을 겪고(tribulationes), 그리고 영적인 공격(tentationes)을 받으면서 현장화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46) 영적 시련 혹은 공격은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신뢰도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좋은 계기이다. 고통과 영적 시련은 하나님에게 이르는 수단이요 방법이다. 그래서 루터에게 ‘Tentatio’는 “즐거운 절망”(delicious despair)이다.47) 신앙의 살아있는 경험을 중시했던 루터에게 ‘Tentatio’는 신학의 참과 거짓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올바른 신학이란 사변적인 지식이나 순수한 경험의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실존에 근거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루터의 ‘Tentatio’는 그가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과 분명히 결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으로 세 가지 규칙 가운데 가장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루터에게 ‘Tentatio’는 신학이 지성화 되고 사변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이다.   
4.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루터가 ‘Oratio-Meditatio-Tentatio’의 개념을 가지고 말하고자 한 것은 ‘신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한 답변이다. 루터에게 신학은 사변적인 학문이 아닌 경험적인 지혜로서 실존적인 학문이다. 신학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다. 따라서 신학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우리 스스로를 낮추고 비우는 것에서 시작하여(Oratio),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죄책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신비를 듣는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되고(Meditatio), 이 하나님의 진리가 영적 공격이나 시련을 통해(Tentatio) 하나님의 진리로 체험되는 신앙의 학문이다. 한마디로 ‘기도’(Oratio), ‘묵상’(Meditatio), ‘영적 시련’(Tentatio)을 통해서만 신학이 진정한 신학이 된다는 말이다. 루터의 세 가지 규칙은 루터파 정통주의, 경건주의,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신학교육 현장은 물론 개인의 영성 훈련의 한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48)
   루터의 세 가지 규칙을 바탕으로 이 개념에 따라 신학함이 오늘날 학문과 경건의 조화를 지향하는 한신 신학세계에, 그리고 이 양자를 조화롭게 겸비한 신학도와 목회자를 양성하는데 얼마나 유용한 기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리라.  
   첫째, 루터의 신학이해는 학문과 경건의 조화를 강조한다. 루터에게 신학함과 영성적인 삶은 분리되거나 대립되지 아니한다. 루터가 제시한 세 가지 규칙은 단순히 개인의 영성 함양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성서와 신학을 공부하는 그 자체이다. 루터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렉시오 디비나 전통(읽기-묵상-기도-관상)의 틀을 벗어나 ‘실천적인 행위’(Tentatio)를 중시함으로서 신학적인 지식이 이론이나 사변에 그쳐서는 안 되고 실천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둘째, 루터의 세 개념은 묵상과 토론, 신앙의 경험과 신앙의 지식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 우리는 신학함에서 신앙의 경험과 묵상, 신앙의 지식과 토론을 한 쌍으로 묶어내어 마치 이 양자는 서로 별개의 것인 양 다루어왔다. 따라서 우리는 늘 양자택일 앞에서 고민한다. 토론과 묵상을 각각 독립적인 영역으로 간주하여 양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절대화해버린다는 말이다. 묵상을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결과는 신비적인 암흑으로 빠질 수 있으며 그러한 신비는 오직 경험의 영역에만 머무를 뿐 토론이나 독서를 통해 꿰뚫어 볼 수는 없다. 반대로 토론을 독립적인 영역으로 묶어 둔 채 절대화하면 신학은 위험에 빠진다. 즉 신학은 순수한 합리성이나 주지주의에 함몰될 위험성이 있다. 루터의 바른 신학을 위한 방법은 신학의 두 가지 측면, 즉 신앙의 지식과 신앙의 경험의 차원을 함께 결합시킨다.  
   셋째, 루터의 신학 방법론은 신학의 특수성(절대성)과 상관성을 동시에 강조한다.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삶”(vita passiva)의 빛에서 이해된 신학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검증되고 경험되어짐을 통해 이 세상과 관련성을 갖는다. 따라서 순수 신학을 부르짖으며 신학을 세속 세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태도는 신학에서 역사적인 차원(신앙의 경험적인 차원)을 배제해 버린 방벽의 신학(theology of barrier)의 신학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신학과 연계된 영성적인 삶 또한 방어적이며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 때 영성의 순수성이란 세속의 가치와 사상들이 얼마만큼 배제되어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고 만다.  
   넷째, 루터의 신학 방법론은 오늘날 영성 훈련이 지나치게 심리적이고 내향적인 방향으로 귀납되는 것을 막아준다. 영성 운동이 개인주의화 하거나 감정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성이 지나치게 율법주의적인 엄격성으로 이해되면 율법의 숨 막히는 요구들에 대한 개인의 성취도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또 영성이 지나치게 개인 내면의 심리변화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영성이 감정에 사로잡혀 종교적인 경험과 개인의 환영(phantom) 및 욕망이 혼돈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이렇게 되면 감정이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또한 루터의 신학이해는 신학에서 경험적인 차원을 배제한 채 지나치게 합리와 이성을 앞세워 모든 사고를 이성의 틀 안에 가두려는 태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신앙의 지적인 객관성이 분명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에 대한 맹신 또한 금물이다. 신앙의 모든 영역이 지식으로 파악될 수 있는 어떤 것에 완전히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신앙이란 도그마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에 불과할 것이다. 영성 운동에서 신앙과 지식, 감정과 이성 사이의 균형 잡힌 결합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바른 신학함의 원리는 영성 훈련을 위한 좋은 사례이자 역사적 실례로서 고려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1)영성의 의미에 대한 정의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책들은 다음과 같다. Philip Sheldrake, New Wester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Spirituality (Louisville: John Knox Press, 2005), 1-7.; 브래들리 홀트, 엄성옥 옮김,『기독교영성사』(서울: 은성, 1994); 정용석 외,『기독교 영성의 역사』(서울: 은성, 1997),

2)홈즈(U.T. Homes)의 정의가 대표적이다. 영성이란 “인간의 관계성 형성 능력이며, 그 관계의 대상은 감각현상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U.T. Homes, 김외식 옮김.『목회와 영성』(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28. 

3)김경재 교수의 다음 말은 영성에 대한 가장 포괄적 이해를 보여준다. 영성이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둘러싸고 또한 구성하는 자연․사회․동료인간과 신과의 교통과 만남 속에서 창출해 내는 전인적 생명약동이요, 반응이다.”  김경재,『그리스도인의 영성훈련』(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8), 93. 

4)John Calvin, Institutes for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trans. Ford Lewis Battles(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I. II. 1. 41. 

5)Oswald Bayer, Theology The Lutheran Way, ed. and trans. Jeffery G. Silcock and Mark C. Matte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7), 3. 

6)Ibid., 6-7.

7)Gabrielis Biel, Collectorium circa quattuor libros Sententiarum I: Prologus et Liber primus, Coll. Martino Elze et Renata Steiger, ediderunt Wilfridus Werbeck et Udo Hofmann(Tübingen: Mohr Siebeck, 1973), 8, Oswald Bayer, Theology The Lutheran Way, 14에서 재인용.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의『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신론(De Deo)에 들어가기 앞서 10가지 세부적인 질문을 통해 신학에 대한 정의를 시도한다.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rticulus 3: “Utrum sacra doctrina sit una scientia.”(신학은 하나의 학문인가?); Articulus 4: “Utrum sacra doctrina sit scientia practica.”(신학은 실천적인 학문인가?); Articulus 6: “Utrum haec doctrina sit sapientia.”(신학은 지혜인가?); Articulus 7: “Utrum Deus sit subiectum huius scientiae.”(하나님은 신학의 대상인가?) Thomas Aquinas, The Summa Theologiae of St. Thomas Aquinas, trans. Fathers of the English Dominican Province, 2nd rev. ed. (London: Burns, Oates & Washbourne Ltd., 1920).  

8)왜냐하면 루터의 초기 작품『스콜라신학에 대한 반박』(Disputatio contra scholasticam theologiam, 1517)이나『하이델베르크 논제』(Disputatio Heidelbergae habita, 1518)에서 루터는 비엘의 신학이해를 스콜라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입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9)Martin Luther, Luther's Work, 34, ed., Lewis W. Spitz,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0), 138. 이하 LW, 권, 페이지 순.  

10)1516년 타울러의 설교에 대한 난외주에서 루터는 신학을 “경험적인 지혜”(sapientia experimentalis)라고 정의한다. Bayer, Theology The Lutheran Way, 28. 

11)Aristoteles, Metaphysics (1064a/b), Ibid., 7에서 재인용.  

12)Ibid., 28. 

13)“만약 신학이 실천적인 학문이라면 신학의 목적은 영원한 행복에 맞추어진다.” Ibid., 29. 

14)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 1883- ) 40 III, 63, 17f, 이하 WA로 표기함. Ibid., 29.    

15)루터는 시편을 평생 네 번에 걸쳐 반복 강해하였다.(1517, 1525, 1529, 1532). 1532년도 시편주해는 WA 40 II, 313-470; LW12: 303-410에 실려 있음.   

16)LW12:330. 

17)LW12:305. 

18)루터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죄인들(peccator sensatus)과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 죄인들(peccator insensatus)을 구분한다. LW12:315.

19)Bayer, Theology The Lutheran Way, 18. 

20)“하나님 인식과 인간 인식은 신적인 지혜이며 오로지 신학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인식과 인간 인식은 결국 그것이 칭의자이신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이 서로 관계하며 오로지 신학의 대상(subiectum)은 죄책이 있고 타락한 인간과 의롭다하시는 분이요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벗어나 그 어떤 논증이나 주제를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신학에 있어서는 분명히 오류요 헛된 것이다.” LW12:310f.  

21)Paul Althaus, trans., Robert C. Schultz,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6), 9.

22)LW2:266(Lectures on Genesis, 1535)

23)LW44:23. 

24)WA12, 282. Althaus,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 246에서 재인용.

25)LW34:176. 

26)이론을 뜻하는 영어 ‘theory’는 헬라어 ‘theoria’에서 유래하였다. 헬라어 ‘theoria’는 theoreo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무엇을 집중해서 바라 본다’는 뜻이다. 따라서 헬라어 ‘theoria’는 라틴어 ‘visio’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간의 시각 활동과 관련된 ‘앎과 봄’을 의미한다. Frederick William Danker, ed.,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3rd ed.,), 541.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과 ‘실천’을 구분했을 때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론’과 ‘실천’의 구분과는 달랐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27)Aristotle, Nicomachean Ethics X, 1178a 31-b17, Bayer, Theology The Lutheran Way, 21 재인용. 

28)Ibid., 22. 

29)LW44:72. 

30)LW54:22. 

31)이 서문은 LW34:281-288; WA50, 657-661에 실려있다. 

32)최근에 나온 이 세 개념에 대한 연구물들은 다음과 같다. Oswald Bayer, Theology The Lutheran Way, ed. and trans. Jeffery G. Silcock and Mark C. Matte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7); R. Stolina, “Gebet-Meditation-Anfechtung. Wegmarken einer theologia experimentalis”, Zeitschrift für Theologie und Kirche 96(2001); 강치원, “Oratio, Meditatio, Tentatio. 루터에서 18세기 중엽 루터교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세 개념의 해석사”,『 역사신학논총』제2집,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편(서울: 이레서원, 2000). 

33)LW54:274f. 

34)루터이후 개신교 전통에서 루터의 이 세 개념이 어떻게 적용되고 사용되어 왔는지, 그 영향사에 관한 것은 위의 각주 32번에서 언급된 강치원의 논문을 참고하라. 

35)귀고 II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1173년 프랑스 지역의 알프스에 있는 카르투지오 수도원 원장으로 재직하다가 1188년에 죽었으며 1193년에 성인으로 봉직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가 쓴 서신『수도승들의 사다리』는 그때까지의 ‘렉시오 디비나’를 체계화시켜 놓은 것으로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다. 허성준,『수도원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왜관: 분도출판사, 2003). 귀고 II세와 휴고의 렉시오 디비나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강치원, “귀고 2세(Guigo II)의 수도승들의 사다리에 나타난 Lectio Divina”『한국교회사학회자 제15집』. 한국교회사학회 편집(서울: 한국교회사학회 출판부, 2004);_______, “성 빅토르 휴고에게 있어서 거룩한 독서”『한국교회사학회자 제20집』. 한국교회사학회 편집(서울: 한국교회사학회 출판부, 2007) 참고. 휴고의 렉시오 디비나에서 독특한 점은 기존의 네 단계가 아니라, ‘독서-묵상-기도-실천적 행위-관상’이라는 다섯 단계라는 점이다.  

36)중세기에는 두 가지 성경읽기 방식이 공존하였다. 즉, 수도원에서 하는 묵상 중심의 방식과 대학에서 학자들이 하는 연구 중심의 방식이다. 수도원의 묵상 중심에서는 lectio(읽기)-meditatio(묵상)-oratio(기도)-contemplatio(관상)의 단계로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였다. 그러나 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계에서는 lectio(읽기)-meditatio(묵상)-disputatio(토론과 연구)-praedicatio(설교와 강론)의 순서를 정형화하였다. 13세기 들어 대학이 자리를 잡게 되자 ‘렉시오 디비나’는 ‘질문과 논증’을 지향하는 스콜라식 성서독서법(Lectio scholastica)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되었지만 수도승들 사이에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37)보통 렉시오 디비나 전통에서 순서는 Lectio―Meditatio―Oratio―Contemplatio로 정식화 되어 있는데, 루터는 이 순서를 Oratio―Meditatio―Tentatio로 바꾸었고 이를 통해 신학수업의 개괄적인 내용과 형식을 규정하고 더 나아가 개신교 영성운동의 중요한 전통을 만들어 냈다. 순서와 관련해서 볼 때 루터는 이전시대와는 상당히 다른 면이 보인다. 기도가 맨 앞에 위치해 있고 관상 대신에 영적시련이 대신한다. 한 마디로 루터를 통해 렉시오 디비나 역사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   

38)LW34:285. 

39)LW34:285-86. 

40)LW34:286. 

41)LW34:286. 

42)LW42:200. 루터의 이 네 가지 고리를 가지고 영적 훈련의 과정으로 프로그램화 해 놓은 책을 참고하라. Joseph D. Driskill, Protestant Spiritual Exercises: Theology, History and Practice(Harrisburg: Morehouse Publishing, 1999), 92-7.   

43)LW34:286. 

44)LW34:286-7. 

45)LW34:287. 

46)LW31:433f. 

47)Alister E. McGrath, Luther's Theology of The Cross: Martin Luther's Theological Breakthrough(Oxford: Basil Blackwell Ltd., 1985), 171. 

48)이 세 개념의 영향사에 관해서는 강치원, “Oratio, Meditatio, Tentatio. 루터에서 18세기 중엽 루터교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세 개념의 해석사”,『역사신학논총』제2집,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편(서울: 이레서원, 200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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