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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모성애, 긍휼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03-19 (토) 13:53 13년전 4120  


제목 :하나님의 모성애, 긍휼

사49:14-18, 호11:1-9

 

솔로몬 왕이 지혜의 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창녀인 두 여인이 한 집에 살면서 거의 같은 날 아들을 낳았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 애기가 죽어 있는 겁니다. 그러자 서로가 살아 있는 애기가 자기 아들이라고 싸움이 일어난 거예요. 지금 같으면 혈액형 검사를 하고, 그래도 안 될 경우에는 유전자 감식을 하면 간단하게 알 수 있겠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여인은 솔로몬 왕 앞에 나가서 제판을 받게 된 거요. 이 여인들은 왕 앞에서까지 살아 있는 아이가 자기 아들이라고 불쌍 사납게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에게 “칼을 가져다가 산아들을 둘로 나누어 반씩 주라.”고 말합니다. 이 때 산 아이의 어미는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여 산아들을 저 여자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기만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부모의 진실한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은 사랑이고, 그 사랑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고통도, 불이익도 감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호세아는 먼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부부관계란 서로 사랑하고 있을 때 부부인 것이지, 사랑이 한번 깨어져버리면 헤어질 수밖에 없고, 헤어지게 되면 남만도 못한 것이 부부 관계가 아닙니까? 특히 오늘날처럼 이혼율이 높은 시대에 하나님과 우리 신자와의 관계가 부부관계로 끝나버리는 것이라면, 참으로 얼마나 불안한 일이겠습니까? 믿을 만 한 것이 못된다,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서 당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로 확대시켜 주신 거예요. 부모와 자식관계는 부부와는 전혀 다른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부는 헤어지면 남이 되어버리지만, 부모와 자식관계는 헤어진다 해도 여전히 부모요 자식인 것이지, 남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대적하고, 부모를 죽이겠다고 목에다 칼을 갔다댄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식인 것이지, 자식이 아니라고 말 할 수가 없어요. 다윗 왕을 보세요. 다윗 왕 말년에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윗 왕은 왕궁을 아들에게 내주고 신하들을 이끌고 한 밤중에 도주하는 신세가 돼요. 자기 아버지를 왕궁에서 몰아내고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던 압살롬은 미처 따라가지 못한 다윗 왕의 후궁들을 백주에 욕보이면서 온갖 폐륜 행위를 일삼는 거요. 천하에 이런 못 쓸 놈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압살 놈이었습니다.

퇴각했던 다윗 왕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란군을 격퇴시키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다윗 왕이 어떻게 한지 아십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압살롬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거요. 사로잡아 오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 왕의 개국공신이며, 군대장관 요합이 압살롬을 죽였어요. “이런 못 쓸 놈은 살려놓아서는 안 된다. 백 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백성들의 여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 왕은 “자기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픔을 억제할 수 없어 홀로 누각에 올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통곡하며 슬피 우는 것이었습니다. 원수요, 폐륜아 인 데도, 그 아들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호세아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낸 야훼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호11:1)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관계에서 볼 때, 결코 좋은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나무를 보고도 아버지라고 하고, 돌을 보고도 어머니라고 하는 음란한 아들이었다.”고 말합니다.(렘2:35) 이러한 이스라엘은 “불쌍히 여기지 말고 가차 없이 내버려야할 대상이었다.”(호1:4)는 거요. 그런데 호세아서 11장에 와서 이러한 깨어진 관계는 극적으로 반전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부관계가 아닌 자녀관계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대전환은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는 두개의 수사 어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대전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범죄행위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일체 불문에 붙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대 사면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면 부모와 자식관계로 비유 된, 이 하나님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부모로써의 하나님 사랑의 특징은 자식으로부터 버림받고 외면당하는 아픔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여, 자녀로 불러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들이 부르면 부를수록 더 멀리 떠나서 바알에게 제사하고, 우상 앞에 분향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버이의 사랑으로 그들을 양육하신 거예요. “걷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팔로 안고 다녔습니다.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줄로 붙들어 매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멍에를 벗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여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모성애적 사랑을 구원사 적 맥락에서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해야할 점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배신과 불 신앙적인 불평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과 주의 종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만과 불평’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 현실을 잘 반영해 주고 있지를 않습니까?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더 멀리 간다.”는 거요. “내가 저희 병을 고쳐주어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버림받게 되는 어버이의 사랑, 어버이 하나님의 아픈 마음이 여기에 구구절절이 배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자기가 나은 자식이 아니고서는 결코 감당해내기 힘든 아픔이었습니다. 전대미문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던 모세도 감당해내기 힘들었다고 성경은 증언해 주고 있어요. 한번은 모세가 야훼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항변합니다. “어찌하여 야훼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을 이렇게도 괴롭게 하시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저를 주님의 눈 밖에 벗어나게 하시어, 이 모든 백성을 저에게 짊어지우시는 것입니까? 이 모든 백성을 제가 잉태하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저더러...........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그들을 품에 품고 가라 하시는 것입니까?”(민 10:11-12, 10:13-15)

여기에서 모세는 “어버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식인 이스라엘을 돌보라는 유모의 책임을 맡았건만, 그 책임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토로합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스라엘을 낳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모가 되실 때만, 이스라엘에게 가장 확실한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첫 번째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참 희망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을 어버이로 믿는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계승한 선지자가 제2 이사야와 제3 이사야였어요. 이들은 하나님을 ‘어머니 같으신 분’으로 비유합니다. 제2 이사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실 까요?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사46: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다.”(사49:15)

호세아는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만이 이스라엘의 반역과 패역함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이 알지 못하였다.”고 사랑을 저버린 자들에 대해서 탄식하시면서도 여전히 사랑의 줄로 그들을 붙들어 주고,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주고, 그들 앞에 먹을 것을 갖다 놓아주시는 어버이로서의 보살핌을 계속해 주셨습니다.

둘째로 어버이로써 하나님은 모성적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에 대해서 배신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아, 이스라엘이 만일 끝내 바알을 향해서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는다면, 하나님은 과연 긍휼히 여기기를 그만 둘 것인가?”( 호11:7)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내 아들이 비록 끝내 바알을 따라가는 배신을 한다고 하더라도 어버이인 내가 어찌 아들의 멸망을 모른 채 하고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 여기에서 우리는 배신한 아들 이스라엘에 대한 어버이 하나님의 가슴에 박힌 ‘짝사랑의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짝사랑의 고통을 부둥켜 앉고 괴로움 속에서 묻고, 대답하기를 계속하십니다. “아!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어 주겠느냐? 아!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포기하겠느냐? 아! 어찌 내가 너를 스보임같이 버려두겠느냐? 나의 마음이 내 속에서 되돌아왔기 때문에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는 듯 하는 구나! 그러므로 나는 나의 불붙은 진노를 쏟아놓지 않으리라. 나는 결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그 완고한 반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은 결코 중단되거나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 안에서는 분노도, 진노도, 형벌까지도 다 해소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호세아는 하나님 사랑의 본질을 무엇으로 본 것입니까? 긍휼 이야요. 이 긍휼은 불쌍한 자를 보면 불쌍히 여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망해 가는 사람을 보면 구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요. 하나님은 이 긍휼 때문에 끝내는 분노를 거두시고, 심판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긍휼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긍휼이란 어머니가 자신의 자궁에서 배태하고 양육하여 출산한 그 자식에 대한 모성애적 연민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어떤 경우에도 정죄하거나 버릴 수가 없어요. 이것이 모성애적 자궁의 속성입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성적 긍휼 속에서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말론적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이 긍휼 속에는 절망도, 정죄도, 죽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긍휼은 자궁의 아픔을 통해서 생명 창조의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거기에는 오직 회개와 용서, 사랑과 화해,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박혀있는 십자가의 아픔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어머니 하나님의 가슴은 안타깝게도 회개할 줄 모르는 인간, 사랑할 줄 모르는 자식들 때문에 항상 검게 타있습니다.

저는 2000년 안식년에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삼대가 함께 살았던 브엘세바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받은 깊은 인상이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깊은 밤이었습니다. 시청 앞 잔디밭에 벌떡 누워 은빛을 토해내는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을 세어 보았습니다. 달빛에 반사된 모래 언덕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인걸은 간데없으나 산천은 유구함을 느끼는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사막의 모래언덕, 밤하늘의 빛난 별, 그 한가운데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나타나신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할아버지의 가슴이 검게 타있지를 않습니까? 깜짝 놀라는 저를 향해서, 그 검게 탄 가슴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오지를 않습니까? “박 목사야, 이 땅에서 이스마엘과 에서가 한 통속이 되어 야곱과 싸우지를 않느냐? 야곱이 나를 위한답시고 내 아들 예수를 죽도록 미워하고 있지를 않느냐? 그래서 이 거룩한 땅이 피바다가 되어 버렸어! 이 성지를 전쟁터로 만들어 놓고 서로 싸우기를 수 천 년, 그런데 아직도 화해할 기미조차 보이질 않으니 내 가슴이 미여 터지는구나! 그래서 내 가슴이 이렇게 검게 타버린 거란다! 그런데 박 목사야, 내 가슴이 타버린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저 하나님의 가슴을 보아라. 검게 타버려 숯덩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란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구원이 어디에서 나온 지 아시나요? 우리들의 희망,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 숯덩이가 되어버린 저 검게 타버린 하나님의 가슴속에 있습니다. 이 하늘같은 어버이 하나님의 사랑을 하시나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그 사랑 속에서 살아보세요. 여러분들의 인생은 확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형제를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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