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박원근 (서울남노회,이수중앙교회,목사) 2011-04-16 (토) 14:10 13년전 4603  

제 목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요15:5-14, 롬8:31-3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가 지금까지는 너희를 종이라고 불렀지만, 이제부터는 친구라고 부르겠다.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이 가장 큰사랑을 친구인 너희에게 베풀어주기 위함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랑 속에 생명이 있고, 거기에 열매가 있고, 행복이 있다." 이 진리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행복을 찾고 있지만 그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 가운데 있어요. 보물을 사랑하는 곳에도 행복이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사랑하는 곳에는 행복이 넘칩니다. 그러나 그들도 영원한 행복일 수는 없어요. 항구적이고, 우리의 영원한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속에 진주알처럼 빛이 납니다.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곳에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 되어 흐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까, 나에게 바싹 붙어 있어라. 붙어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는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붙어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게 되는 생명적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데 "정말 내가 사는 것처럼 인생을 살고 있구나! 이렇게 신명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디 이게 사는 건가? 마지못해서 살고, 죽지 못해서 살지!" 꼭 이렇게 절박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무미건조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왜 이렇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가지가 나무에 꼭 붙어 있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붙으면 내 인생이 생동하고 기쁨이 넘치게 되련만 떨어졌다 붙었다 하니, 그만 생명력이 시들해져버려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나무에 붙어산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입니까? 주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 사랑이 이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달콤한 사랑도 아니고, 노래방에서 춤을 추며, 신명나게 노래 부르는 젊음의 유희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야 요. 그러기에 웬만한 신앙을 가지고는 나무인 주님에게 붙어 있는 가지가 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칭찬을 받았어요. 그런데 잠시 후에 주님께서 "내가 몇 날이 못 되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다."고 말하자 베드로는 "주여, 절대로 그럴 수 없나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베드로는 꼭 붙어 있는 것 같았지만 순간적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꼭 붙어 있는 가지였다면, 예수님께서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러시면 '저도 주님과 같이 죽겠나이다.' 이렇게 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못 죽겠다." 이겁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을 것이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4-5) "너희가 천하를 다 얻으면 무엇이 유익 하겠느냐? 네 생명 하나 불러 가면 다 끝나버리는 것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쿠오바디스라는 소설은 폴란드 작가가 쓴 것인데, 로마에 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또 도망치는 거예요. 그가 도망쳐서 시골로 가고 있는데 동편에서 해가 떠오르고 그 때 주님께서 로마를 향해서 황급히 걸어오시는 거예요. 깜짝 놀란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바디스 도미네?"하고 묻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도망쳐 나오니 내가 또 가서 죽어야지. 네가 교회의 반석인데 반석이 도망치면 교회는 어떻게 되는 거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처럼 지고하고, 숭고하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한 베드로는 "주님 이번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이번에는 제가 가서 죽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바로 못 박히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못 박힐 수가 있나. 나를 거꾸로 달아주오." 그래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지를 않았습니까? 베드로라는 가지는 결국에는 붙었지만, 떨어졌다, 붙었다 했어요. 그런데 바울이란 가지를 보세요. 그는 처음에는 주님의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로는 시종일관 붙어 있는 가지가 되었어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무에서 나를 끊어낼 자가 누구랴, 적신이나 환란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무엇으로도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하리라" (롬8:36-) 이렇게 바싹 달라붙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늘 생동했어요, 힘이 넘쳤습니다.

이 힘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포도나무인 주님에게서 왔어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이런 힘이 생기지를 않는 것입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게 붙어서 구원이나 받고, 축복 받고, 신앙의 열매나 따먹자는 것이지, 어디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도 내게 십자가가 올까 봐 피하고, 십자가를 질 것 같으면 멀찌감치 도망치고, 눈치봐가며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니 살맛이 날 리가 없지요. 힘이 나지를 않는 거예요. 기쁨이 없어요.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를 않는 겁니다. 믿는다고 해서 다 믿는 것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 한 번 바싹 달라 붙어보지 않겠습니까? 우리 한번 다음 주 고난주간에는 바싹 달라붙어 봅시다. 기쁨이 샘솟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말입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시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은혜로 가득 차 있어요. 생명력이 넘칩니다.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온갖 핍박과 고통을 다 당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즐겁다. 나는 기뻐한다. 그러니 너희도 기뻐하라, 나는 평강이 넘친다. 그러니 너희도 평안 하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왜 힘을 잃고 시들해지는 것입니까? 꼭 붙어 있지를 못하고, 붙어 있다가 떨어지고, 떨어졌다가 다시 붙고 그러니 결국에는 시들해지고 말라빠진 그런 가지가 되고 마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안 믿는 것은 아닌데 열매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들고, 괴롭고, 부끄러운 일이야 요.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열매 맺는 가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5)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듯이, 내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내 신앙은 빈껍데기 일 수밖에 없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어요. 한 걸음 더 나가서 "내가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렇게 말했어요. "그는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그리스도를 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빈껍데기일 뿐이다" 이겁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끊어져 버리면 말라버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절대적인 관계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나는 예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내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짓는 생명의 원리예요. 예수 없이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고, 무효라는 것이 포도나무 비유가 말하려고 하는 진리의 핵심입니다. 사람들은 많이 배우고, 많이 벌고, 인류 대학에 가고, 출세하고 성공하는데 생명을 걸고 삽니다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 리 나라 최고의 영제들이 다니는 대학, 카이스트에 다녀 봐도 별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행복과 불행, 생과 사를 결정 지를 만큼 소중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 밖에 있느냐? 나무인 예수에게 붙어 있느냐? 떨어져 버리느냐?"가 문제입니다. 항상 구경꾼이 문제입니다. 구경꾼에게는 나뿐 것이 더 많이 눈에 띕니다. 가정도 마찬가지 야요. 가정이 없는 사람이 가정을 바라보면 결혼 못해요. 가정이 얼마나 지저분하게 보이겠습니까? 오줌, 똥 속에서 자라는 것이 가정이 아닙니까? 밖에서 자기 아내를 연구하겠다는 남편과는 못 살아요. 남편이 아내 안에 있고, 아내가 남편 안에 있어야 행복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밖에서 바라보면 얼마나 모순이 많아 보이겠습니까? 금방 실망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살 때, 그저 교회가 좋고, 예수님이 좋은 거예요.

포도나무 가지에 어떻게 열매가 열리게 됩니까? 나무로부터 물과 진액을 공급받아야만 가지에 생명이 있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나무가 가지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야요. 가지인 우리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올시다. 나무인 예수님께서 가지인 우리들에게 열매를 맺도록 해주시니,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가지는 나무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가 없어요. “내가 의롭게 살고, 지혜롭게 살고, 선을 행하고, 창대 하게 된 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말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적으로 노력해야할 일은 내가 나무인 예수님에게 꼭 붙어 있는 가지가 되는 일입니다. 이것을 매일 확인하고 점검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지 못해서 괴로워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누구에게나 싫은 사람은 있는 법입니다. 사랑하려 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나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없을 때, 사랑할 수 있는 길이 다 막혀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때도 우리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이 있어요. 그것은 내가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사랑하지 못 할 사람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하고 신기한 일입니다. 결국에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가 있어요. 나 스스로 진실해보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어요. 세상이 다 진실하지 못한데 어떻게 합니까? 내 마음에도 진실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예수 안에서 살면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 진실이 깃들게 되고, 그 진실로 진실하게 살 수가 있게 돼요. 믿습니까?

자신의 성격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실로 나 자신을 이기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민하실 것 없어요. 우리 주님께서 거듭나게 해주시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바꾸어 주십니다. 육적 인간이 변해서 영적 인간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먼저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가지가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지 않고서 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에게 붙어 있기만 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 좋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예수라는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나는 좋은 가지가 될 수 있어요. 좋은 꽃을 피워내고 좋은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항상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이 15장 7절에 나와요. 우리 같이 읽어 보실까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는 비결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하면, 그 말씀이 내 생명과 내 운명을 책임져 줍니다. 그리고 내가 붙어 있는 가지가 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도 바울 사도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렇게 바싹 달라붙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붙어있는 가지가 되면, 예수라는 나무에서 한없는 에너지가 솟구쳐 나옵니다. 내 안으로 기가 쏟아져 들어와요. 그 때 가지인 나에게 열리는 열매마다 생명이요, 사랑이요, 희락이요, 평강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은 나무의 진액과 생명을 가지에 주어 가지에 싻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끝까지 가지가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려면 나무에 붙어 있어야합니다. 붙어 있는 가지가 되려면 나무를 끝까지 사랑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된 것처럼 우리도 나 자신의 생명을 예수님께 내어줌으로써 비로소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2:20)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