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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평화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삶 이야기

김주한 (광주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1-07-13 (수) 13:59 12년전 6957  
평화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삶 이야기
  김주한 교수(한신대, 교회사학) 
  “전쟁은 경험해 보지 않은 자들에게만 달콤하다.”
에라스무스의《격언집Adages》나온 말이다. 위의 경구는 에라스무스의 평화사상을 함축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준 것으로 그의 정체성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보통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로 번역되는 휴머니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물론 그가 인문주의 전통의 초석을 놓은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인문주의는 세속적인 의미의 인본주의(human-centric)가 아닌 인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비관주의를 거부했던 인간의 문화적 창조성에 대한 순수한 신념이었다. 그의 사고체계는 언제나 ‘기독교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의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로 불려야 한다. 그는 고전적인 것(여기서는 주로 헬라철학)의 가치들을 재해석하여 당대의 위기들을 극복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발전시켰으며 기독교적인 신앙을 통해 분열과 전쟁으로 인한 상처들을 치유하려 노력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는 1469년(1466이란 설도 있음)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로테르담은 그가 태어난 지역이고 에라스무스는 그의 세례명이다. 그는 데시데리우스(Desiderius)란 이름도 사용했는데, 그가 필생의 작업으로 연구한 제롬의 서신에 등장한 인물에서 빌려왔다. 그는 한 신부의 사생아였다. 성직자의 결혼이 금지된 당시에 에라스무스와 같은 신부의 사생아들은 성직자가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다. 그 길만이 출신배경 때문에 차별받는 불이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신부가 된 그는 후회하기도 했다(1492년에 신부로 서품을 받았다). 왜냐하면 학자와 저술가로서 자신의 삶이 성직자라는 직책 때문에 방해받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에라스무스는 네덜란드 드벤터(Deventer)에 있는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라틴어 교육을 받으면서 엄격한 금욕생활과 실제적인 경건과 노동을 배웠다. 이후(1487년) 그는 스테인(Steyn)에 위치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입회하여 7년 동안 그곳에서 헬라의 고전들을 두루 탐독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당대 세속학문(휴머니즘)의 대표자 격인 로렌초 발라와 같은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의 저술과 그들의 학문방법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베인톤의 표현대로 이 때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로 가기 전에 이미 이탈리아화 되어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의 휴머니즘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학자로서의 비판적인 지성과 글 쓰는 능력을 배양시키고 있었다. 이들 인문주의자들로부터 배운 방법론은 에라스무스의 학문적인 작업에서 두 가지 결실로 나타났다. 하나는 인문학과 성경을 접목시켜 당대의 교회와 사회개혁을 위한 프로그램을 발전시켰고, 다른 하나는 원전연구를 통해 고전이나 경전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의 학문적 노작들에는 언제나 기독교적인 것과 고전적인 테마들이 혼합되어 있으며 교부들의 저술이나 헬라고전들의 편역, 그리고 성경번역과 주석들이 포함되어 있다.
에라스무스의 지적인 욕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수도원의 허락을 받아 파리의 몽테귀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이 대학은 훗날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뱅과 예수회 창시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공부했던 곳이기도 하다. 에라스무스는 이 대학의 열악한 환경과 형편없는 기숙사 음식 때문에 심한 고통을 받았다. 건강이 위협을 받자 그는 이 대학을 잠시 떠나있기도 했다. 건강을 회복한 후 그는 다시 돌아와 신학공부에 매달렸다. 그는 당대의 신학자들과 학생들이 몰두하였던 신학토론 주제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무익한 것으로 간주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하루에 5분씩 4일 동안 드리는 기도와 한번에 20분을 드리는 기도 중에 어느 것이 응답받을 가능성이 높은가? 10명이 10분을 기도하는 것과 10명이 각자 1분 동안 기도하는 것 중에 어느 편이 더 효과적인가? 하나님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당나귀나 오이 또는 돌 속에 성육신하실 수도 있는가? 바늘 끝 위에서 천사들이 과연 몇 명이나 춤을 출 수 있는가?
오늘날 위와 같은 문제들을 신학수업 시간에 토론주제로 내건다면 다들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지금부터 500여 년 전 에라스무스가 공부했던 당대의 명문 몽테귀 대학이나 루뱅대학 신학부에서 중요하게 취급된 신학논제들이다. 신학자들과 학생들은 이런 토론을 할 때 보통 8주간의 시간을 보냈는데, 이는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할 때 걸린 시간보다도 길었다. 에라스무스는 신학자들이 우리의 삶과 실제적인 연관이 없는 문제들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한탄하였다. 그래서 그는 신학뿐만 아니라 고전과 같은 세속학문의 유산들을 새롭게 체계화하여 새로운 인간과 사회형성에 관심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의 소망은 영국에서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1499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건너 간 그는 당대 영국의 지성이자 인문주의자였던 존 콜렛(1466-1519)의 강의를 들으면서 성경을 새롭게 재검토해야겠다는 열정을 불태웠다. 하여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공부―그는 옷보다는 헬라어 공부를 위해 기꺼이 돈을 쓰겠다고 할 정도였다―에 매달려 신약성서 원문을 직접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516년 에라스무스의 헬라어판 신약성서가 대중 앞에 선을 보였다. 루터의 독일어 판 신약성서(1522년)보다 6년 앞섰다.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신약성서에 자신의 라틴어 번역을 대면에 실었고 주석도 첨부하여 사람들의 이해를 도왔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표준성경인 불가타역(제롬의 라틴어 역본)은 거의 신성불가침이나 다름없었다. 에라스무스는 불가타역의 오류들을 폭로해내면서 자신의 성서를 이후 4번이나 교정해 출간했다(1519. 1522. 1527. 1535). 그의 성서출간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헬라어로 된 신약성서를 책의 형태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의미가 있었음은 물론 이제 성직자들의 독점이던 성서가 일반대중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그가 불가타 성서의 오류들을 지적해내자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그를 이단시하며 공격하였다. 불리함을 재빨리 눈치 챈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라틴어역 신약성서를《새로운 원전Novum Instrumentum》으로 부르면서 당시 교황 레오10세에게 헌정하는 재치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이후 그의 개정판에는 교황의 추천서를 실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귀하의 노력의 산물에서 많은 즐거움을 얻노라…… 이것이 신학과 정통신앙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신이 귀하에게 상을 줄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느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바로 평범한 대중들이 아니었습니까?……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화를 내실까요? 저는 농사꾼들은 물론이고 대장장이와 석공들, 심지어 창녀나 포주, 터키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사람들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 저 역시 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성서번역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소유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기독교가 온전히 이해될 수 있으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죽은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신약성서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저주를 받았고 “모든 이단들의 괴수”로 지목되어 그의 책들은 불태워졌지만.
에라스무스가 영국에 체류하면서 친분을 맺었던 또 한 사람은 토마스 모어(1478-1535)였다. 그는 모어의 위트와 재치에 끌렸다. 또한 모어의 박식한 학문적 성과(인문주의)에 자극을 받아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학문적 영역과 깊이를 더욱 심화시켜나갔다. 이 때 에라스무스에게 꿈에도 그리던 이탈리아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흠모하고 있었던 터라 그는 흥분과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거룩한 도시 로마에 가서 성스러운 유적들을 둘러보고 도서관 방문과 당대의 인문주의 학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싶어했다. 그러나 로마에서 목격한 장면들은 그를 절망의 나락으로 침몰시켜버렸다. 일반대중들의 미신적인 신앙행태는 물론이고 교황 율리우스 2세의 향락과 사치와 부패, 그리고 제왕적 리더십은 그를 격분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3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에라스무스는 모어의 집에 머물면서 저 유명한《우신예찬Moriae encomium》(1511)을 집필하였다. 이 책의 원제목 헬라어는 ‘모리아(모어의 발음에서 빌림)의 칭송’이다. 이 책에서 에라스무스는 변덕스럽고 익살맞은 ‘어리석음遇神’을 등장시켜 인간의 약점을 조롱하기도 하고 당대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상을 해학과 재치로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이 책은 그의 생전에 39판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이 금지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파리의 한 인쇄업자는 한번에 2만 4천부를 찍는 일도 벌어졌다. 오늘날 인문학서적들의 첫판 인쇄는 고작 1천부정도임을 가만할 때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일찍이 대중작가로 저술능력을 이미 인정받고 있었던 에라스무스는《우신예찬》의 출간과 함께 유럽의 저술가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그의 저술들은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하였음은 물론 출판문화를 주도할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의 글의 주제들은 고문서들뿐만 아니라 교부들의 저술들의 번역, 성경주석, 교회와 사회진단, 교육이론과 실천 프로그램, 기독교인의 생활 분석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그는 대중저술가이자 언론인이었다. 인기를 끌었던 그의 작품들을 몇 개 추려보면 고전작품들에서 속담과 재담들을 뽑아 편역 해 놓은《격언집》(1500)은 계속해서 개정증보판을 낼 말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고대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역할을 하였다.《대화집Colloquies》은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의 라틴어 교본으로 사용(생전에 100판이 출간)되었을 정도이고,《기독교 병사의 필독서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1503)는 교회개혁과 경건한 신앙을 내용으로 한 도덕적인 교훈서로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런 저술들을 통해 에라스무스는 진보적인 가톨릭대변자로 각인되었다. 그가 출판한 책마다 베스트셀러로 각광을 받아 당시 런던과 파리에서 판매된 책 중에서 에라스무스의 책이 5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는 유럽의 각지로부터 오는 편지들이 너무 많아 우체부는 출근하기 전에 반드시 에라스무스의 집을 먼저 들렀다고 한다. 유럽각국의 왕들을 비롯한 각지의 세력가들과 유수의 대학들이 그를 앞 다투어 초청하여 곁에 두려고 하였던 것을 보면 그의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이와같은 왕성한 저술활동은 교육에 의한 계몽을 통해 무지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그의 신념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의 교육철학은 ‘후마니타스’(인문)과 ‘피에타스’(경건)를 근간으로 하여 계몽된 평신도들이 교회와 사회개혁에 참여하여 제 몫을 해 주는데 목표를 두었다. 사회와 인간을 무지와 야만으로 해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어느 특정 국가나 백성들에게 국한되지 않는 유럽전체가 대상이었다. 그야말로 그는 어느 국가에도 속해있지 않는 ‘세계시민’이었다. 그에게서 민족주의적인 냄새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이와같은 개혁사상은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상투어는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의 알을 낳았다면 루터는 그의 알을 부화했다’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와 루터와의 관계는 서로 흠모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경멸과 저주의 관계로 끝을 맺었다. 루터가 등장하기 전 에라스무스는 이미 유럽의 무대에서 대중작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한 번은 루터의 영주 프리드리히 3세가 ‘에라스무스와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어디로 얘기를 끌고 나갈 지 알 수가 없다’면서 그는 정말 즐거움을 주는 작가로 칭찬하자, 루터는 그가 뱀장어 같아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온건파요 중도파였다. 종교개혁운동이 기독교 세계를 양분시킬 위험이 감지되자 그는 양측을 화해시켜보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성경을 토대로 개혁을 시도한 측(프로테스탄트)과 권위를 토대로 개혁을 거부하는 측(로마 가톨릭) 사이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바로 이 벽을 무너뜨리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는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모든 가치와 질서들이 요동치는 유동성의 시대에 그는 중재자요 화해자로 역할을 자임했다. 그는 가능한 한 신학적인 토론을 자제하려 노력했다. 교리는 우리를 분열시키지만 섬김과 봉사는 우리를 하나되게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을까? “평화와 일치는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융통성을 발휘해야 유지될 수 있다. 나머지는 각자의 판단에 따르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도덕적인 개혁을 긴급한 사안으로 보고 교회의 정신이 개혁되고 계몽된다면 기독교의 제도나 교리적인 문제들은 자연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루터는 제도와 교리의 개혁이 동반되지 않는 한 교회개혁은 요원하다고 보았다. 신학의 원리를 건드리지 않는 한 개혁은 물 건너 갈 것이다. 루터가 에라스무스를 격렬한 어조로 무신론자요 향락주의자, 교만한 회의주의자로 비난을 퍼붓자 에라스무스도 루터를 ‘민족주의의 독이 든 열매를 맺을 나무’로 반박하였다.:“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내게 말하시오. 단, 당신의 그 성질을 빼고.” 루터의 눈에 에라스무스는 “뱀, 똥 덩어리, 미치광이 교회 파괴자, 젊은 소년들을 유혹하는 비열한 불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더 이상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아래 로마가톨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어느 한 당파에 속하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불꽃 튀는 팜플렛 전쟁은 당시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진영이 얼마나 화해하기 어려웠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상황은 에라스무스가 바라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흘렀다. 양 진영의 싸움은 끊임없는 전쟁과 박해를 낳았다.「평화와 불화에 대한 연설」(Oration on Peace and Discord)에서 에라스무스는 목청을 높였다.: “평화보다 더 동의할 만한 것은 없으며, 전쟁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없다……어떤 독사가 다른 독사를 물어뜯으려고 한단 말인가? 사자가 사자를 잡아먹으며, 늑대가 늑대를 잡아먹는가? 심지어는 인도의 호랑이들도 자기들끼리는 평화를 유지한다. 그러나 불화의 광견병에 전염된 인간만이 서로를 잡아먹는 것이다.”
“싸우는 우리들의 부유보다는 평화로운 이들의 가난”을 더 예찬했던 에라스무스는 진정 한 평화의 예언자요 에큐메니컬운동가로 제도나 이념, 사상보다는 ‘인간성’회복에 초점을 두고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조화로운 사회를 갈망했다. 그가 내건 화두는 “화합적 불일치”요 “조화로운 불화”였다. 그러나 전개된 상황들은 이미 그의 영향력을 넘어버렸다. 베인톤의 말대로 그는 “지친 자유주의자”로 생을 마감했다. 1536년 7월 11일 스위스 바젤에서.

<참고문헌>
Olin, John C., ed., Christian Humanism and the Reformation: Selected Writings of Erasmus, 3rd ed.,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87.
Augustijin, Cornelius, Erasmus: His Life, Works, and Influence,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1.
롤란드 베인턴, 박종숙 옮김,『에라스무스』, 서울: 현대지성사, 1998.
패트릭 콜린슨, 이종인 옮김,『종교개혁』, 서울: 을유문화사, 2004.
폴 존슨, 김주한 옮김,『2천년동안의 정신 II』, 파주: 살림출판사, 2005.

<총회회보 2008년 9월호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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