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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개신교 신학의 설계자 필립 멜란히톤의 삶 이야기

김주한 (광주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1-08-11 (목) 16:48 12년전 6649  

개신교 신학의 설계사 필립 멜란히톤의 삶 이야기

김주한 교수(한신대학교, 교회사학)

    본질적인 일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일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그 모든 일에서 사랑을

(In essentials, Unity; In unessentials, liberty; in everything,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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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본질이 본질을 결정한다? 우리 곁에서 숱하게 경험하고 있는 사태이다. 멜란히톤은 매사에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당파성에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공동체의 유익을 앞세우며 합리성에 기초하여 대화와 타협을 중시했던 종교개혁자였다. 멜란히톤이 로마가톨릭 측과의 합의가 여전히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교회일치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있을 때, 가톨릭 인문주의자 조지 카샌더(George Cassander)는 그를 향해 위의 세 마디 구호를 외쳤다. 이 구호는 당시 멜란히톤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해 준 말이었다. 격동의 시대에 화해와 일치를 위해 동분서주 했던 멜란히톤, 그의 이름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독일의 교사, 인문주의자, 종교개혁자, 문헌학자, 신학자 그리고 시인이요 저술가 등.” 그는 분열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서로 하나되게 하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와도 일치와 화해를 도모했던 에큐메니컬 운동의 챔피온이었다. 그는 초기 루터파 진영의 주도적인 대변자로서 개혁세력들이 세포 분열하기 전에 분열되려는 경향을 막기 위해 중도의 논리를 치열하게 전개했던 온건론자였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에서 한 치의 양보없이 자신들의 주장만을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닫힌 구조 안에서 그의 중도적인 입장의 현실 타당성과 정당성은 빛을 잃고 말았다. 비록 현실이 극단으로 치달으며 폐쇄적인 상황으로 진행되었지만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도 멜란히톤은 창조적인 삶과 사고를 지향했던 진보적인 자유주의자였다.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은 1497년 2월 16일 선 제후령 팔라티네이트의 브레텐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그는 고급 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12세의 나이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1년 7개월 만에 문학사를 받고 곧바로 석사학위 공부를 원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다. 그래서 튀빙겐 대학으로 옮겨 공부한 후 1514년 1월 25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그는 신학공부도 틈틈이 했지만 주전공은 헬라어였다. 1518년 약관 21세의 나이에 멜란히톤은 당대의 인문주의 거장 요하네스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그의 일가친척)의 추천으로 작센 주의 비텐베르크 대학 헬라어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 때 그는 루터를 처음 만났다. 멜란히톤의 교수취임 강연은 교육자답게 대학교육 개혁과 관련된 주제로서(“젊은이들의 교육 증진에 대하여” De corrigendis adolescentiae studiis), 단번에 청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요즘 젊은 대학생들이 헬라어, 라틴어를 비롯한 고전연구를 등한시 한다고 호통을 쳤다. 그의 실험적이고 날카로운 지성은 루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루터는 그 보다 14세 위였다. 그렇지만 결혼은 멜란히톤이 먼저 하였다. 그는 23세에 카타리나 크랩과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런데도 멜란히톤은 5년 후 루터가 결혼하자 종교개혁 와중에 무슨 결혼이냐고 불평하면서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멜란히톤은 주로 고전어와 인문학을 강의했다. 그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아 보통 5, 6백 명의 학생들이 수강하였다. 어떤 때는 1천 5백 명이 수강할 정도였다. 차갑고 냉철하게 생긴 그는 뭔가 범상치 않는 카리스마로 시대를 리드하고 있던 루터에게 매료되었다. 인문학의 천재가 학문의 여왕을 못 본체 할 수는 없는 법, 멜란히톤은 루터에게 달라붙어 신학을 파고들었다. 하여 그는 1519년에 성서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성서를 강의하며 루터의 헬라어 학습을 도왔다. 이때부터 멜란히톤은 루터의 제자요 동역자로서 평생 루터의 종교개혁신학을 체계화시켜 발전시키는데 헌신하였다. 루터가 원료와 레시피를 제시해주었다면 멜란히톤은 거기에 다양한 재료들을 첨가하여 요리하였다. 하지만 그 요리는 로마가톨릭이 제시한 것과 차별화된 창조적인 작품이어야 했다. 그 고된 창조적인 작업을 도맡았던 사람이 바로 멜란히톤이었다. 이제 멜란히톤은 개신교 투쟁 전선에 루터와 나란히 서게 되었다.

따라서 멜란히톤은 루터와의 관계성 속에서 파악될 때 그의 존재의 위치가 명확히 부각된다.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이후 루터는 잇단 신학논쟁과 신변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멜란히톤은 루터가 나서야 할 자리에 자신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만 하였다. 보름스 국회(1521. 4) 이후 루터가 잠시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해 있었을 때(1521-1522), 멜란히톤은 루터를 대신하여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 운동을 계속 주도해나갔다. 처음으로 두 종류의 성만찬이 베풀어졌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과 과정들은 중세 스콜라주의적인 방식에서 탈피하여 인문주의적이고 복음적인 방향으로 개편되었다. 1525년부터 멜란히톤은 헬라어 강의는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맡기고 철학을 가르치는 것 외에도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특별 지위를 얻어 인문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의 활동영역은 아카데미즘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학자였지만 그는 작센 주의 교회개혁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여러 지역들을 방문하면서 개혁세력들을 독려하였다. 그는 성직자들을 위한 지침서들을 만들어 새로운 개혁운동의 이념과 방향을 제공하였다. 1525년 농민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루터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질서 있는 개혁을 부르짖었다. 루터가 파문당하여 활동의 제약이 뒤따르자 그는 개혁세력의 신학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부상하였다. 당시 황제 찰스 5세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국회를 소집하여 제국내의 제 종교 세력들의 분열을 막고 내부적인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 때 멜란히톤은 새로운 개혁세력들이 믿는 신앙이 과연 로마가톨릭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멜란히톤은 저 유명한「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라틴어와 독일어로 작성하였고 또한 그것의『변증서』를 썼다. 여기서 멜란히톤은 개혁운동은 진정 거룩한 성서와 고대 교회에 근거해 있으며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과 관습들을 제거하는데 있다고 강조하였다. 당시 코부르크(Coburg) 성에 은거해 있던 루터는 멜란히톤이 보낸「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변증서』를 읽고 인증해주었다.:“나는 멜란히톤의『변증서』를 읽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보다 더 잘 만들도록 고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는 순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처럼 부드럽고 조용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멜란히톤은 루터와 긴밀한 협력아래 서로간의 특별한 문제에 관해 차이들을 배제하지 않는 신학적 합의를 도출해 냈다.

멜란히톤은 여전히 로마가톨릭 측과 타협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정쟁을 가급적 피하고 매우 첨예하게 대립된 논쟁 상황에서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던 탁월한 협상가였다. 가톨릭 측과의 일련의 회담(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회담,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담)이 실패로 끝났지만 양측을 중재해 보려던 그는 제3의 세력으로 위치를 확고하게 잡아나갔다. 멜란히톤은 본질이 아니라고 판단된 사항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가톨릭 측의 입장을 수용하려 하였다. 1548년에 찰스 5세가 작센에 가톨릭을 강압적으로 강요하려 했을 때, 그는 감독제도와 7성례, 교황의 성경해석, 화체설, 공로적 선행과 같은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에 해당되는 것들은 단호히 거부하면서도 견신례, 종부성사, 고해성사 중 기본적인 통회나 고백, 용서의 선언, 그리고 성직자들의 복장 등은 소위 비본질적인 것(adiaphora)들로 간주하여 수용하였다.(라이프치히 잠정안, Leipzig Interim, 1548). 그러자 루터파 내부에서 격렬한 반발이 이어졌다. 멜란히톤은 가톨릭의 협력자란 비난을 받았다. 그가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도 가톨릭 측과 타협을 시도했던 것은 그리스도도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차이는 다름이 아니요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정신을 우리는 멜란히톤의 신앙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멜란히톤의 신학사상을 탐구하는데 핵심되는 자료는 그의 로마서 강의를 기초하여 저술된『신학총론』(Loci Communes)과「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이다. 이 둘은 개신교 신학과 신조의 기본이 되었다.『신학총론』은 1521년 처음 출판된 이래 1534년 개정보완을 거쳐 1543년 최종판이 나왔다. 이 책은 개신교 신학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로써 칼뱅의『기독교강요』초판(1536)보다 15년 앞선 것이었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재한 날이 1517년 10월 31일이었으니까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에 멜란히톤은 개신교 신학의 밑그림을 그렸던 것이다.『신학총론』은 기본적으로 개신교 신학을 성서 텍스트 자체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그의 신학서술 방식은 그리스도의 본질 탐구에 매달린 스콜라주의의 서술방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당시 신학의 주교재는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의『명제집, Sentences』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신학총론』이 출간됨으로써 롬바르드의 책은 고전이 되어버렸다. 루터는 이 책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멜란히톤의『신학총론』만큼 신학과 신앙의 전체 내용이 철저히 정리된 책은 하늘아래 없습니다. 모든 교부들의 저서와 모든 신학 명제 편찬자들의 저서를 다 합쳐놓아도 이 책에 견줄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은 성경 다음으로 가장 완벽한 책입니다.” 루터는 신학생들에게 이 책을 거의 다 외우게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도록 권면하였다. 이 책은 멜란히톤 생전에 이태리어, 프랑스, 크로아티아어, 그리고 화란어로 번역 출간될 정도로 유럽전역의 신학교과서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요즘 신학생들이 필자에게 어떤 책들을 읽어야 하는지 물어올 때가 많다. 필자는 한신대에서 강의나 세미나 시간에 학생들에게, 신학공부하는 동안 멜란히톤의『신학총론』한 권만 숙달하면 신학자로 인정받을 만하고 그만한 실력이면 모든 신학에 정통하여 어떤 책이든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고 조언하곤 한다. 암기하는 것이 유치해보이지만 이보다 더 신학세계를 파악하는데 지름길은 없어 보인다. 신학도들이여! 성경과 함께 이 책을 읽고 또 읽고 암기 하여라. 그대들의 앞길에 빈곤의 설교로 허덕이는 일은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신학총론』의 핵심은 죄와 율법, 은총, 성례전 신학 등이다. 멜란히톤은 이러한 문제들을 바울사상에 기초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설명의 기저에는 인문주의적인 사유가 놓여있었다. 멜란히톤이 이 책에서, 아니 그의 일생동안 씨름하고 고민했던 문제는 “인간은 어떻게 죄를 용서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지는가?”였다.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죄란 무엇인가?’가 해명되어야 한다. 멜란히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인식능력이요 다른 하나는 의지의 기능이다. 인식능력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기능이요, 의지의 기능은 인식한 것을 실행하거나 하지 않을 능력이다. 여기서 멜란히톤은 죄란 바로 인간의 의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죄의 원인은 결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율법이란 무엇인가? 멜란히톤은 율법의 3가지 기능을 말한다. 첫 번째 기능은 신학적인 기능으로써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주며, 두 번째 기능은 시민적인 혹은 정치적인 기능으로써 죄를 억제하는데 도움을 주며, 세 번째 기능은 교훈적인 기능으로써 의롭다고 인정받은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마다 그를 깨우쳐 회개로 인도하는 권면적인 역할을 한다. 루터는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멜란히톤의 율법의 제3기능은 율법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 받은 자가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관계를 맺도록 하는 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법정적인 칭의(forensic doctrine)를 보다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은총이란 죄를 용서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 죄인을 칭의로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은총이다. 칭의를 통해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통해서 칭의가 주어진다. 여기까지 멜란히톤은 루터의 신학과 보조를 같이했다. 그러나 칭의의 과정에서 인간의 책임성과 도덕적인 노력의 위치를 설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루터파와 결별하였다. 즉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서 순수 루터파(Gnesio-Lutherans)는 구원의 과정에서 일체의 ‘행위’를 배제시킨 반면에, 멜란히톤은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필수불가결한 결과로써 반드시 뒤따라야 할 조건임을 강조하였다. 멜란히톤은 순수 루터파로부터 신인협동론자라고 비난을 받았지만 그의 설명은 루터파의 딱딱한 칭의론(법정적인 칭의)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설득력 있는 해명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기간 동안 개혁진영을 분열시키는데 핵심교리는 성만찬 신학이었다. 개혁진영 모두가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을 반대하였지만, 성만찬의 본질에 관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달리하였다. 루터의 공재설, 츠빙글리의 상징설, 칼뱅의 영적 임재설 등은 그리스도의 현존방식에 대한 입장차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기에는 기독론과 신론이 함께 묶여져 있어 그 누구도 속시원하게 해명할 수 없었던 과제였다. 멜란히톤은 우선 루터파와 개혁파(츠빙글리파와 칼뱅파)를 중재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성만찬을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지를 표현하는 가시적인 표지로 간주하면서 제단 위에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은 신앙에 대한 신비로 보았다. 이것은 루터파보다는 칼뱅파에 가까운 견해로 멜란히톤은 “숨어들어온 칼뱅주의”란 소리까지 들었다.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의 은총 중심신학에 인간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성을 덧붙여서 개신교 신학이 선행에 대한 약점이 있다는 지적을 보완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고 성서적인 유산에다 인문주의적인 전통을 접목시켜 합리적인 신학을 설계하는 것, 이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는 언제나 양극단을 피하려고 노력하였고 종교개혁운동이 반 지성주의적인 영성운동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학과 철학, 지식과 신앙, 계시와 이성이 서로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생산적인 결합을 할 수 있는 터전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 멜란히톤이 인문주의적인 소양을 가졌다고 해서 신학의 주제들이 합리적으로 다 해명되어야 한다는 식의 독단과 오만을 부렸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신앙의 신비들을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면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죽은 이후에 친구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적절한 때에 그리스도와 대화를 통해 이 세상의 삶에서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었던 신앙의 비밀들이 알려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삼위일체론이든 기독론이든 모든 교리들을 설명할 때 그는 언제나 기도의 형태로 마무리하였다. 1560년 4월 19일 63세의 일기로 멜란히톤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텐베르크 성(Castle) 교회당 성가대 석 밑에 묻혔다. 그 맞은 편 설교단 밑에는 루터가 묻혀있다. 지금도 비텐베르크 구시가지 광장에는 오른편에는 루터, 왼편에는 멜란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그가 독일의 종교개혁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우리는 신성의 비밀을 탐구하기보다는 더 많이 기도해야만 한다.(멜란히톤의『신학총론』에서)

 

 

<참고문헌>

 

필립 멜란히톤, 이승구 옮김,『신학총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

Hill, Charles Leander. trans., Melanchthon: Selected Writings, eds., E. E. Flack and L. J Satre, Augsburg, 1962.

Hillerbrand, Hans J. ed., The Oxford Encyclopedia of the Reformation, vol. 3.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Lindberg, Carter. ed., The Reformation Theologians, Blackwell Publishers, 200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편,『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유산』,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2008년 총회 회보 11월 호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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