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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젊은이들 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선규 (서울남노회,대림다문화센터,목사) 2011-11-08 (화) 15:24 12년전 2819  
신들의 사회시민 k,교회를 떠나다.

‘1990년대의 개신교도가 감소하는 현상을 분석했다. 권위주의 시대국민을 빼닮은 성도되기를 거부한 자율적 시민이 민주화 이후에 나타났다. 이들이 민주화 이후 구시대의 상징이 된 개신교를 떠나고 있다.’(한겨레 747주간 )

위 글은 금주 한겨레 주간 신문에 실린 요약의 글이다.
일반 교계에서 뿐 아니라 일반 언론에서 기독교의 미래의 주역인 청년들이 떠나고 있다니 그 심각성을 더해 주고 있다.
글의 내용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요약 글에서 보는 대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원인이 교회의 권위주의라고 못 박고 있다 .
히브리어에서 “권위”에 대한 글을 찾아보면. ‘오즈’로 ‘능력 ’힘’과 관계하여 사용되고. 희랍어 ‘액수시아’는 하나님께만 적합한 ,행동의 절대적 가능성을 나타낸다.
왕정이전시대 통치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통치권을 행사하다 보면 권위라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뒤 따라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권위는 자칫 하면 권력 힘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만이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개한 사회 일수록 더 많은 권력의 이름으로 권위를 행사하게 되고 그래서 부패와 부정이 난무하는 사회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어떤 사람이 줄이 있다고 그 권위를 앞세워 그것을 악으로 이용하여왔고 그 끈을 끓지 못하기에 악순환은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하나님만이 법과 권력 이라는 권위의 원천이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탈권위적인 사회 로 전환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당한 권위까지 무시 하는 것은 아니다. 정당 하게 행사되는 권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존중을 해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도 한때 권위주의가 성했던 시대가 있었다. .
아버지가 술을 먹고 아내가 정성껏 차려놓은 밥상을 이유도 없이 뒤엎어 버리고 아내를 구타하고 맘대로 첩도 두고 하는 그러한 사회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그런 가정을 흔히 보고 자랐다.
이제는 민주화와 함께 그러한 권위주의는 상당히 희석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권위주의가 없어진 것은 좋은데 권위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다. 어느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교수를 감금하고 구타한 사실도 있었다.
권위주의를 배척 한다고 하면서 권위자체를 말살 해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이러한 권위주의를 외면하는 것으로 본다.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 한 행사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다.(야고보3:17절) 세상의 이치에서 볼 때 작아진다는 것 참 으로 어리석고 바보 같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가 작아지는 그 곳에서 우리는 어느 세상과는 다른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작아지기를 어색해 하고 낯설어 하는 것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새로움에 길들여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움과 낯 설음,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육화 하시어 우리와 같은 피조물 까지 작 아 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수모를 당하시면서 까지 보여 주고자 하셨던 세상, 새 하늘과 새 땅, (계21:1)이 자리 하는 자리가 아닐까?
정현 종님의 ‘섬’ 이라는 단순한 시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이 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 사람 가운데 있다.
사람다운 사람은 찾기가 어려운가 보다 .
그는 우리가 동경하고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섬처럼 한번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보기 힘들지만 한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 그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드러나지 않아 우리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분명히 있다. 누구일까?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려울지 모른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말이다.
나의 삶의 자세를 세상의 상식적인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나 자신이 작아지고 또 작아져야 하는데 그것이 쉬 울리 없지? 자존심을 뭉그러뜨려야 하는데? ‘작음’ 작아진다는 것 작아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이며 신앙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니겠는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리라.
나의시간, 나의 공간, 을 비우면 비울수록,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세상 의 눈으로 보아 바보가 되고 어리석어 보이면 보일수록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 하늘 나 라가 이 땅에 내려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하게 될 것이 아닌가?
그때에 젊은이들이 돌아오는 날을 소원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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