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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연말에 새해 목회 를 구상해 본다.

이선규 (서울남노회,대림다문화센터,목사) 2011-12-13 (화) 12:02 12년전 2399  
 

     연말 에 한해를 돌아보며!

 목사님 아직도 이런 것을 쓰세요?

아직까지도 구식 휴대폰을 가지고 계시냐는 질타의 소리이다. 벌써 휴대폰을 교체 한 것이 6번째인 것 같다.


이번에 바꾸기 전에는 다시는 유혹에 넘어지지 않으리라. 그동안 사용하면서 여러 가지 기능도 익혔고 정도 들어서 그럴 만도하다. 

그런데 가까운 분이 슬슬 연세 드실수록 감각이 있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물건을 내어민다.


 자신이 값을 부담 한다는 유혹에 여지없이 이번에도 나의 의지의 허약함을 또 한 번 되풀이하게 된다.  

그 후 불편함은 또 한 번의 홍역을 치 루어야 할 것 같다. 이제는 내 방식대로 살리라고 다 짐 하기를 그 몇 번이던가? 마침 마차를 끌고 가는 길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나그네가 등짐을 지고 길을 가고 있었다. 도중에 빈 길마를 맨 소 한 마리를 만나 같이 가게 된다. 나그네는 문득 이렇게 생각 한다.

기왕 길마로 갈 바야 등에 맨 짐을 싣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

나그네는 등짐을 벗어 옮겨 소 길마에 한결 편하게 걸어간다.

다시 기왕 가는 길이면 소를 타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그네는 소를 타고 보다 안락 하게 갈수 있었다. 


소를 타고 가다보니 기완이면 보다 빨리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소 엉덩이를 후려 댄다. 

소가 걸음을 빨리하자 이제 더 빨리 달리고 싶어졌다.

마냥 채찍을 휘둘러 달려간다. 점점 째 찍 이 강해지자 이에 격앙된 소가 마냥 미친 듯 날 뛰는 바람에 나그네는 소 등에서 사정없이 나가 떨어져 팔다리가 부러지고 길마에 실었던 짐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이 우화를 생각하면 바로의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사람은 소 길마에 짐만 싣고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타려고 든다.

타면 빨리 가고 싶고 빨리 가면 달리고 싶다. 달리던 소가 천천히 가면 나그네는 불만이요 또 불행하게 여기며 타고 가던 소에서 내려 걷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나그네는 불만을 토하게 된다. 


산업화 사회는 안락과 편리를 위한 상향을 지향 하지만 그 상향은 불안정한 주변 여건 여 건 때문에 하향할 가능성을 항상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상향만 타다보면 소 길마로부터 내동댕이쳐져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마는 하향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큰 것을 왜 모를까? 

곧 행복은 편리나 안락과는 별개의 차원인 것이다.


소 길마에 짐만 지우고 걸어가는 혹은 소에게 채찍질만 하지 않는 분을 지켰던들 이 나그네는 팔다리를 부러뜨리고 짐바리를 분실하는 불행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 한국인은 내 나름대로 한다는 나름 의식보다 남처럼 나도 한다는 남 나름 의 식이 강한 편이다. 곧 타인 지향 성이강하다.


교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른 분이 이런 방법 저런 식으로 목회에 성공 하였다더라  소문 이 나면 그런 분이 개최하는 세미나에는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다.


우세한 외래 문명은 그것을 형성시킨 어엿한 정신적 척추가 뒤 바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신적 척추는 마치 소 갈비추리 듯 빼어 놓고 ‘겉인’ 물질문명을 도입해서 추종해 온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연말이면 개인이나 단체는 결산으로 한해를 평가 하게 된다.  이럴 때 어떤

이들은 많은 유익으로 넉넉한 결산을 하리라


그러나 또 다른 이들의 대차 대조표엔 황당한 적자 잔고로 인하여 회한의 감정이 무거운바  위처럼 밀려오는 분도 많으리라 본다. 


어느 잡지에 난 기사 이다.  대한 통증 학회의 설문조사에서 통증 환자들은 우울 증 수면 장애 기억력 감퇴 등을 함께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통증 환에게 무 통증 은 꿈이라고 한다. 하지만 무 통증 역시 통증만큼이나 무섭다. 통증은 생명을 파괴하려는 것들의 침입과 공격에 대한 경고이며 동시에 이런 공격을 극복하려는 방어 수단이라고 한다.

통증 을 느끼지 못한다면 신체 조직의 손상을 알 수 없고 위험을 인지 할 수도 없으며 대처 할 수도 없다. 이런 선천성 무 통증 환자는 대개 20세 이전에 사망 한다고 한다. 그런데 무 통증 환자도 있다.


이웃의 고통이나 비탄을 볼 때 느끼는 통증이 그것이다. 신경 세포나 척 추 이상은 통각 장애를 일으키지만 정신적 무 통증은 공감 능력의 이상에서 비록 된다고 한다. 지금 우리사회는 이웃의 패배와 고통에 대해선 어떤 연민의 정감도 느끼지 않는 이들 이 늘어만 가고 있다. 


통각 장애는 신체를 위협 하지만 공감 장애는 파괴 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연말을 맞이하여 앞만 보고 달려 오다보니 이웃과 소외 된 자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 하는 연말에 따뜻한 온정이 스며드는 연말,  정신적 통증이 감각 되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10:24절)


나 나름의 삶을 유지하되  이웃의 아픔이 나의 고통으로 다가와 함께 웃고 울어 주는 새해 목회를 구상해 본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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