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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와 증도선교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1-12-16 (금) 13:16 12년전 8054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와 증도선교


시찰회에서 멀리 전남 신안군 증도에 다녀왔다. 증동리교회에서 김상원 목사의 친절한 안내로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생애를 DVD로 보고 순교현장을 돌아보며 많은 감동을 받고 왔다.

순교자 문준경(文俊卿 : 1891~1950) 전도사는 1891년 2월 2일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 문재경씨의 3남 4녀 중 3째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아가며 유복하게 성장하여 1908년 3월 17세가 되던 해에 남편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지도면 등선리 정근택(정운삼씨 삼남)씨와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남편의 무관심속에서 20년간 시부모님을 모시며 살았다. 그동안 시아버지의 배려로 국문을 깨우칠 수 있었고 시부모님을 잘 모신다 하여 정씨가문의 효부로 인정받으며 살다가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시어머니는 큰 시숙이 모셔 가자 홀로 남게 된 문전도사는 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시댁을 떠나 큰 오라버니가 살고 있는 목포로 나왔다. 단 칸 셋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면서 한 때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었으나 비슷한 나이 또래였던 문경자 집사의 설득력있는 전도로 1927년 3월 5일 북교동교회(당시 목포교회, 전라도 지역 최초의 성결교회)에서 첫 신앙생활(37세)을 시작하게 되어 1928년 6월 세례를 받고 1년 후 집사 직분도 받게 되었다.

북교동교회에 출석하게 된 문준경 전도사는 장석초, 김응조, 이성봉 목사의 가르침에 은혜를 받아 1928년 6월에는 목포에서 가까운 압해도 지역에 다니며 목포교회 일부지역을 맡아 전도에 힘썼다. 이에 이성봉 목사의 추천으로 1930년 서울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에 청강생(남편이 있다는 이유)으로 입학한 뒤 첫 방학 때 신안군 임자도로 내려가서 임자진리교회를 개척하고 20명의 신자와 60명의 주일학생을 모았으며 가을학기에 올라와 교회개척 보고 후 정식 신학생이 되어 1935년에는 증동리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시면서 신안군의 수많은 섬들을 여자의 몸으로 나룻배(풍선)를 타고 다니거나 갯벌에 빠지는 등 어려운 여건 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다. 특히 의사로서, 산파로서 사람들을 치료하였고, 장티푸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집에 들어가 환자들을 돌보고 장례를 치루는 등 새벽같이 큰 바랑 같은 것을 둘러메고 나가 누룽지나 잔칫집 음식을 거둬 가난한 집에 나눠주는 왕거지요 참목자요, 섬 사람들의 어머니였다. 그러면서도 문전도사는 찬송을 잘 부러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어서 예수님을 전하는 탁월한 복음전도자였다. 그런 문 전도사를 보고 샤머니즘이 강했던 섬사람들이 하나 둘씩 예수를 영접하여 여러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후 1943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됐고, 이 과정에서 문준경 전도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수차례 고문을 당했으며, 1950년 6·25 전쟁 때는 공산 인민군들에게 체포되어 목포에 압송돼 옥살이를 하다 아군의 인천상륙 소식에 공산군이 도주하여 옥중에서 풀려나자 그 당시 이성봉 목사의 잠시 머물다 가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교인들을 돌보기 위해 증동리로 돌아왔다가 공산 인민군들에게 다시 체포되어 두 손을 뒤로 묶이고 눈을 가리운 채로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깔려있는 아름다운 섬 증동리 앞 솔무등(터진목)에서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3시 경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죄명으로 날카로운 죽창에 찔리고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 간에도 자신의 양딸 백정희 전도사와 교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당신들도 예수님을 믿어야 살고, 육신은 죽지만 영혼은 천국과 지옥이 있으니 부디 예수 믿고 천국가라며 전도하고 60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문 전도사는 한국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대표적인 순교자이자, 신앙적 모범의 삶을 사신 분으로 문 전도사가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배소가 되었고 교회가 세워져 증도는 마을 곳곳 마다 11개의 교회가 자리잡고 있고 90% 이상의 주민이 기독교인이며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증도 주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신앙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영향은 신안군 전체로 퍼져나가 14개 면, 1004개 섬(천사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 섬 일대에 약 100여 개의 교회가 세워져 지금도 그 영향력이 각 교회에 미치고 있으며, 신안군 복음화율 역시 35% 이상으로 국내에서 기독교인 비율이 제일 높은 곳이라고 한다.

1953년 호남지방회에서 증동리교회 입구에 세운 순교비에 "밀알 한개가 따(地)에 떠러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나니라"(요 12:24)는 말씀처럼 문 전도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한 알의 밀알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어 한국교회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 증동리교회 출신 전 한기총 대표회장 이만신 목사, 성결교 전 총회장 이만성 목사, 전 총무 이봉성 목사, 장로교단 CCC를 설립하신 김준곤 목사, 한신대 총장을 역임한 고재식 박사, 한국교회 치유상담의 전도사 역할을 한 정태기 목사, 그 외 법관, 기업가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명이나 배출하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 전도사가 사랑한 섬 증도는 천국의 섬답게 민박집 상호 역시 시루섬, 에덴, 은혜, 성지, 에벤에셀 등이 보인다. 천국의 섬이라는 책이 발간된 이후 CBS 최초의 드라마 '시루섬'을 방영한 바 있으며, 기독교대한성결교단 순교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증동리교회와 순교지 사이에 대규모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2010년 8월 27일 착공)을 건립중에 있어 거의 완공단계에 이른 것을 보았다.

이어서 순교지에 있는 묘지와 기념비 앞에서 은혜를 나눈 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보물섬 카페(Treasure Island)에서 점심을 먹고 신안해저 유물전시관도 둘러보고 대초리로 나오면서 짱뚱어다리도 건너보고 아름다운 해수욕장도 보았다. 다시 차를 타고 조금 가니 대초리교회가 나오고 은사 한신대 정태기 박사의 생가라는 황토집도 보였다.

조금 더 가니 1953년부터 지켜온 장인정신으로 세계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자연과 시간의 흐름에 맞춰 살아가는 세계최초 슬로시티 협력기업 증도 소금세상이 나온다. 잠시 소금박물관을 둘러보고 연륙교로 나왔다.

이제 무안 - 고속도로로 줄포 - 변산 - 새만금으로 군산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 역사관을 보고 청풍횟집에서 저녁을 먹고 귀가했다. 미 상원부의장 신호범 박사의 특강으로 시작한 성지순례 일정은 너무나 은혜롭고 부끄럽고 감동적인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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