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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ic] 시골의사 박경철과 여호아증인 인턴의 대화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1-12-26 (월) 10:26 12년전 4806  

여호아증인과 토론해보신 경험이 있나요?

수년 전 일입니다.
열차 옆 자리에 계시 분이
제가 신앙서적을 읽고 있는 것을 보시고
말을 걸어오시더군요.
여호아증인으로 오랜 연륜이 쌓인 '골수'였던 것 같습니다.

계속 말을 걸어오셔서 책을 덮고
진지하게 토론을 했었죠.
저한테는 추억인데요,
그분에게는 아마 그 전에 겪어보지 못한 '역경'이었을 겁니다.

그때도 수혈 문제가 나왔었는데
이 문제에 관해서 여호아증인들은
정의(definition)와 관련된 혼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피와 관련된 개념에
현대 의학의 수혈 방식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포함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응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키지요).

기존의 개념에 수혈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꾸겨넣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래의 글은 5~6년 전,
한신대 철학과 2학년 수업 때 학생들에게 보충설명한 내용입니다.
논증분석을 연습시키는 과정이라
성경과 관련된 구체적인 평가는 하지 않았습니다.

* * * * * *

이 예제는 훈련용으로서 값어치가 큽니다. 생생한 현장감이 담겨있어 흥미로운데다가, 논증구조를 남기고 털어 내는 실습용으로 적합합니다. 이런 논증들이 흔히 뒤죽박죽이기 쉬운데 이 예제는 자기 집단 변호를 위해 다수의 사람이 오랫동안 다듬어서 이런 단점이 별로 없습니다.

이 글은 박경철의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책 “사명과 신념 사이”라는 글에 나옵니다. “여호아의 증인” 신도인 인턴 여의사가 환자에게 수혈하지 않아 생긴 문제로 징계위원회를 소집됩니다. 그 전에 저자와 인턴이 따로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어린 자식의 운명까지 부모의 신념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누구든 삶보다 죽음의 문제가 중요할 수 있다. 이차돈의 순교나 천주교 박해 때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수없이 죽어간 순교자들처럼, 왜국의 개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열사들이나, 타인의 피를 수혈 받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당신들의 죽음이 다 같은 선택의 문제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아이의 삶 혹은 신념이 다른 타인의 삶에까지 개입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자식이야 어쩔 수 없이 그렇다 치더라도 지난번에 앰뷸런스에서 자네 때문에 적시에 수혈을 받지 못한 환자는 왜 자네의 종교적 신념으로 그런 상황에 처해야 하나? 그만큼 자네의 신념이 절대적인 것인가?"

내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은 이랬다.

"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앙은 확신이다. 그것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맹목성이 존재한다. 믿음이란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다. 나는 내 종교를 믿고 있고 믿고 있다는 말은 곧 ‘따른다’는 뜻이다. 선생님의 관점에서는 ‘왜 다른 사람의 죽음에까지 개입하느냐?’라는 질문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믿음’을 확신하는 내 관점에서는 그냥 두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이다. 만약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해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면 아예 ‘믿음’ 자체를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소수로서 존중받지 못함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내 믿음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내 관점에서 보면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녀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틀린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수혈의 의미를 이야기하거나 에이즈나 간염 등의 사례를 들어서 수혈금지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자의 말대로, 여호아증인 인턴(이하 ‘인턴’)의 논증에 수혈의 의미나 에이즈나 간염 등의 사례는 의미가 없습니다. 종교적인 신념에 근거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수업시간에 설명했지만 다시 여기서 인턴의 논증을 재구성해보기로 합시다(편의상 각 진술에 번호를 붙이겠습니다).


1. 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2.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앙은 확신이다.

3. 그것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맹목성이 존재한다.

4. 믿음이란 문자 그대로 믿어버리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다.

5. 나는 내 종교를 믿고 있고 믿고 있다는 말은 곧 ‘따른다’는 뜻이다.

6. 선생님의 관점에서는 ‘왜 다른 사람의 죽음에까지 개입하느냐?’라는 질문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7. 그러나 ‘믿음’을 확신하는 내 관점에서는 그냥 두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구원이다.

8. 만약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해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면 아예 ‘믿음’ 자체를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9. 그러므로 비록 소수로서 존중받지 못함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내 믿음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이슈가 뭔지는 알고 있으니 넘어가고, 이제 인턴의 결론이 뭔지 봅시다. 9번입니다. 인턴에게 속으로 물어보십시오. “다시 한번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쉽고 간단하게 결론을 말해주실래요?” 그러면 인턴이 그럴 겁니다-“나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수혈도 거부하겠다는 말이외다”

계속 인턴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 근거를 다시 한 번 말해주실래요?”


전제들을 결합시키는 역할을 조건문이 잘 하니까, 근거를 찾을 때 논증예제에 있는 조건문을 살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조건문은 정언문으로도 전환될 수 있으므로 꼭 조건문에 연연해할 필요 없습니다. 내용적 타당성 쪽으로('63빌딩' 논증을 여러 방식으로 타당하게 만들어보았던 것 떠올리세요) 재구성해도 됩니다.

문맥을 봐도 8이 근거일텐데 무슨 뜻일까요? ‘이중 잣대’의 의미를 7을 통해보면 <내가 구원을 추구하듯이 남의 구원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8의 의미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남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온전한 믿음이다>

 

8. 남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온전한 믿음이다.

∴9.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수혈도 거부해야한다

 

8만가지고는 9가 매끄럽게 도출이 안 됩니다. “수혈 거부가 다른 사람에게 대한 구원이다”는 의미의 전제가 필요하지요. 그것이 바로 7입니다. 따라서 주(main)논증은 아래와 같습니다.

 

7. 수혈 거부가 다른 사람에게 대한 구원이다

8. 남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온전한 믿음이다.

∴9.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수혈도 거부해야한다 (7과 8로부터)

 

7과 8 전제를 중간결론으로 하는(즉 이것을 정당화시키는) 근거가 있는지 인턴에게 물어보십시오. 예제에서 8에 대한 근거는 없고 7에 대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6은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는 진술에 불과하니 논증재구성에는 필요 없습니다. 5는 실천성을 중요시하는 진술입니다. 9를 더욱 타당하게 도출하는데 보강하는 전제로 사용해도 됩니다. 그러나 동의할 수 있는 이런 주장은 메인 논증의 근거 역할보다는 이 논증의 무대장치나 도입 진술이라고 간주하고 재구성에는 넣지 않아도 됩니다.

  결국 4가 7의 근거가 됩니다. “수혈 거부가 모든 사람에 대한 구원임이 경전에 써있는데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경전’에 대한 언급은 숨은 전제라고 볼 수 있는데 평가하기 쉽게 분리해서 전제로 넣으면 재구성은 이렇게 보강됩니다.


*a. '수혈 거부'는 경전에서 그렇게 써있다. (숨은 전제)

4.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

∴7. 수혈 거부가 다른 사람에게 대한 구원이다 (a와 4로부터)

8. 남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온전한 믿음이다.

∴9.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수혈도 거부해야한다 (7과 8로부터)

 

이제 1~3이 남았습니다. 1은 도입이니 재구성에 안 넣습니다. 2와 3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런 주장입니다. “신앙에는 확신(≒맹목성)이 있다”

수업시간에 언급했듯이, 이 주장이 어떤 것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4에 대한 근거가 될 수도 있고,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인턴의 행동 전체를 변호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이런 근거가 동원되면 그 때부터 이성적 대화는 종료되며 이후에는 벌어지는 일에 관해서는 피차간에 정당화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맹목적인데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이제 평가를 해봅시다.


8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고 결국 7이 문제가 됩니다. 인턴이 이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시했으니 a와 4를 검토해봅시다. a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경전에서 관련 문구를 찾아 이것이 특정한 상황에만 부합되는 주장인지 아닌지 같은 주제의 다른 진술과 배치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4번 전제는 의외로 깨기 쉽습니다.

수업시간에 언급했듯이, 반대논증(논리적 유비)를 제시하시면 됩니다.


경전에서 실천 불가능한 진술 하나 뽑아서 a 전제의 ‘수혈 거부’ 자리에 대입하고 나서 결론을 받아들이냐 인턴에게 묻는 것이지요. 사실, 성경 해석에서 문자주의(문자적 의미 중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는 자충수를 가지고 있는 헛소리입니다.

 

(7 ․ 8)→9 논증 가지고도 반대논증을 할 수 있습니다.

 

7. 전쟁은 다른 사람에게도 구원이다.

8. 남의 구원을 위해 힘써야 온전한 ‘신념’이다.

∴9.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전쟁을 해야한다.

 

인턴이, 나는 ‘양심적’이고 너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 '양심적이란 말을 무슨 의미로 쓰고 있는가?' 반문하십시오. '양심적'이란 말이 애매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이쯤해두지요.

참, 여호아증인들에게 존경스러운 점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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