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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표

주의 성소와 성산에 거할자 (2) 시편: 15:2

홍성표 (서울북노회,예수제자,목사) 2012-01-15 (일) 03:06 12년전 3340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sanctuary)와  성산(holy hill) 에 거할 자 누구냐? 
첫째는 정직한자요, 오늘은  옳은(righteous)일을 행하는 자요
그의 심장(heart) 으로부터 진리를 말 하는 자 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는 제 각기 다르고 다양하다. 어떤이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어떤이는 자신의 질병의  치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이는 가정 불화의 문제와 자녀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하여,, 어떤이는 사업의 번영을 위하여, 이민 교회는 사람들을 만나고, 외로움을 달래며 직업의 정보를 위하여, 또 유학생 들은 한국 음식이 그리워서 등의 참으로 여러가지, 천차만별의 이유가 있다. 

어떤 경우는 친구나 이웃의 권유 ( 소위 전도)에 의해서, 혹은 교회의 전도 프로그렘의 일환으로, 목사의 유명세를 듣고 호기심에 오는 경우, 교회에 유명 인사가 나가기 때문에. 심심해서, 심지어는 결혼 대상자를 찾기 위해서 도 교회에 출석하는 예들이 많다. 

어떤 이유든 다 가능하고 타당성이 있으며, 그 것을 거절하거나 막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정말 주의 성소와 주의 성산에 거할 자격은 1)옳음을 행 하는 자 이어야 한다고 말 한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성소와 성산에 머물 자격 상실이다.

오랫 동안 한국 교회는 성장의 미명 아래 세 불리기 경쟁을 전투적으로 해 왔다. 세를 키우는 것은 사람의 머릿수 를 늘리고, 헌금의 액수를 늘리며, 화려하고 큰 예배당을 짓고, 이러한, 교회의 양적 성장은 곧 목회와 목사의 성공을 가름하며, 지역과 사회 에서 인정받는 토대가 된다.

성공한 목사는 좋은 차를 타야 되고, 좋은 집에서 살고 , 다른 사람의 대접을 받아야 되며, 심지어 권력자와 유명 인사와 어깨를 나란히 해야 되는 것이 척도가 되어왔다.  시골이나 소외 된 지역에서  초라한 목회를 구가 하는 자는 무능하고 실패한 자 처럼 취급 받는 것이 현실이다.

총회의 임원이나 노회의 교권 주의자들은 이들이 노회의 임원과 총회의 임원이 되어야 하는 관례를 만들어 왔다. 대개의 경우 교회의 임원 선거 때가 되면 얻어 먹을 거리가 있어야했다.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선거 자금을 위하여 집을 팔기도하고, 빚을 지기도하며, 이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는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상상 못할 일들이 버젖이 전개되고 활개를 쳐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목회를 잘 하고  노회나 총회에서 행세깨나 하는 경우에는  목사와 장로가 짜고 노회나 총회에서 주요 부서에 들어가도록 담합하고, 그 것을 사전 모으하며 , 소위 자기 패거리의 그룹이나 거슬리는 개인 들은 제거하고 소외 시키거나 왕따를 시킨다. 참 어떨 때는 이런 공동체에 속해서 산다는 것이 참 비애를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소위 교권의 리더들은 전국 교회의 넷트 웍을 통하여, 자기 이해 관계나 인맥으로연결 된 사람을 교회 요소요소에 심어 교뤈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세력을 유지하며 세를 불려나가는 정치를 편다.

선거때만 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세를 괴시하거나 빙자하여  후보들에게서 금품을 요구하며 목에 힘을 주고  인맥이나 자기 교권 세력을 통하여 선거 자금을 당당히 요구하기도한다. 지금 세간에는 돈 봉투 사건으로 떠들석하다.  그러나 또 뒤에는 이런저런 거래들이 오가는 행태가 없을까?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의 진리는 매몰 되고 사장 된다. 그 곳은 성소도 아니고 성산도 아니다. 사람들은 물적 토대의 성공을 보고 그를 우러러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세사리이고 하나의 마크(mark) 에 불과하다.

나도 한 때 이 유혹에 빠져 큰 교회를 바라보며 부러워했다 그런 교회를 평생 지향하며 폼을 내고 으시대고 싶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 물론 교권 주의자들의 방해도 있었지만 , 지금은 퍽 다행이고 감사 할 일이다.  그들 무리로부터 탈출하게 하신 주께 감사를 드린다.

사람들은 헤롯의 화려한 궁전을 사모한다.  그 궁전의 향기로운 목욕탕을 그리워하고, 부귀영화의 꿈을 그리워한다. 카나다 토론토의 한 외각에 있는 장군이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을 그리워하며 지은 엄청난 집이 있다. 그 집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마치 귀신 들의 집 느낌이다.  글세 그 것이 진실로 사랑의 표현 이었어야 될까? 보는 자와 이해의 차이가 있겟지만 말이다.

아마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엇던 사랑의 애틋함도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그녀를 사랑하는 다른 방법도 있을 수가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사랑의 표현은 다 다를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주의 성소와 성산에 거 할 수 있는 자는 옳음과 공의를 행 할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2) 심장으로부터 진리를 말해야 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보편적(universial) 이어야한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을 따라 변하지 않는 절대 불변의 법칙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며, 스승과 제자의사랑과 존중의 관계, 사람의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것, 돈이나 물질 보다 사람의 생명이 우선 되는 것 등은  시 공간의 차이로 달리 해석 될 수 없는 진리가 되어 왔다..

만일 우리가 사는  오늘이 이러한 진리의 법칙이나 규칙을 상실했다면, 그 것은 비극이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포스트모던니즘(postmodernism), 탈산업 사회 이후의 삶의 원칙은  절대 진리는 없다.  라고 주장하는 상대주의 만이성행 한다면, 진리란 설 곳이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오직 강자와 승자 만이 살 수 있는 승자 독식, 적자생존, 정글의 법칙이 진리를 대신한다.

불행한 사회다. 희망을 잃은 사회다. 거기에는 심장, 마음의 중심에서 부터 말 하는 진리와 진실이 매몰 된다. 도덕과 윤리, 가치와 의미, 이상과  유토피아 는 짓 밟히고 삭막한 경쟁과 전쟁의 성패 만이 존재한다. 권력과 자본의 전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의 논리, 그리고 자신의 죄악을 감추기 위한 변명과 자기 합리화(self identify) 만이 진리를 대신한다.

입술은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 성령을 외친다. 기도의 시간과 횟수, 화려한 예배당 과 물적 토대를 자랑한다. 그러나 고난받는 구세주 ( Suffering saviour)는 설 자리를 잃는다.  우리는 옳음을 행하려 고뇌해야 한다. 적당히 자신의 위치와 부질 없는 하찮은 명예를 지키려 거짓된 행동이나 진리와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 해서는 아니 된다. 그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아니라도 후손에게서라도 정당한 죄가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의도적이고 계획된 죄를 알면서도 짓는 것은 악질이다. 이러한 악으로부터 속히 돌이켜야 한다. 이 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다. 이런 복을 받으려고 기도하고 애쓰고 힘 써야 한다, 맛을 잃고, 빛을 잏은 어둠이 더 밀려 오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썩을 권력과  맘몬을 의지하지 말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아니하며  쇠 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옳음과 공의를 행하며 마음의 중심과 심장으로부터 진리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만이 주의 거룩한 성소와 성산에 거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체제나  공산주의, 그리고 다양한 사회주의 체제라 할지라도 조직과 세력의 헤게모니 다툼이 없을 수야 있겠는가? 홉스가 말 한대로 " 만인대 만인의 투쟁" 과  모택동이 말한 " 불가피한 전쟁" 을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 만드는 역사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말하며 외치는 자 들이 강단에서는 평화를 말 하고 내려오면  세속의 무리보다 더한 더러운 오물처럼  두 얼굴의 삶을 살아서야 되겠는가? 거기에 어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귀한 구원의 도리가 자리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악세사리인가? 목사와 장로가 하나 되어  교권의 세 불리기를 한다면 무슨 종교개혁, 무슨 사회와 역사 개혁을 외칠 명분이라도 쌓을 수 있다는 말 인가? 이게 세상을 모르는 바보의 말인가? 이제 이러한 목사와 장로들이 있다면 교회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된다.

맑은 물에서는 고기가 못 산다. 그러면 더러워지고 오몀된 물에서는 고기가 살 수 있는가? 그 고기를 먹고 사람이 온전한 건강을 유지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맑은 물을 보고 그 물을 마실 수 있어야 비로소  건강을 유지하고 살 수 있다.  물이 우리 신체의 70% 이상을 이루고 있지 아니한가? 

오늘의 한국 교회는 소위 한강의 기적처럼, 선교의 기적을 이루었다 떠들어댄다.  기도를 가장 많이하는 교회, 전도의 불길이 타오르는 교회. 세계에서 큰 교회가 가장 많은 교회, 그래서 오늘의 한국의 기적을 이루는 영광을 이루었다? 세계에 미국을 제와하면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 정말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더 많이 만들고  세워야한다 그런데 무슨 경쟁이나 하듯이 소명이 아니라 교단이나 교파의 경쟁, 아니 전쟁을 하듯 방법과 기술을 요한다.

아! " 예수가 없는 예수교회" 그 숫자를 늘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도 우리는 선교의 삶을 멈출 수는 없다.  우리의 강단 위 에서 진리와 진실이 외쳐지는 성소와 성산이 되어야한다.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외쳐져야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감격이 있고, 부활의 능력과 소망이 잉태 되어야 한다.

 그 곳에서 어둠은 물러가고 희망의 빛이 비쳐지며,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선포 되고, 믿음과 사랑 소망이 살아 역사해야 한다. 그 곳에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며 함께 더불어 사는 운명 공동체가 탄생해야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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