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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마 12:20)

홍성표 (서울북노회,예수제자,목사) 2012-01-27 (금) 05:46 12년전 11004  

 알버트 슈바이쩌의 (Von Reiamrus Zu Werde(1906)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us(1910) 이래 예수 그리스도의 상은 여러가지로 회자 되어 왔다. 마술가( Masician), 열혈당원( the Zealot), 카리스마적 갈릴리안(the Galirean), 바리세인(the Paarisee), 철저한 현인(radical Wisdom Sage), 존경하지 못할 시골뜨기(antipatriarchal peasant)혹은 종말론적 예언자(eschatolosical Prophet), 냉소적 유대 촌뜨기(the peasant Jewish Cynic) 등으로 불리어져 오고 독일의 신약학자  타이센은 " 역사적 예수"를 " 떠돌이 설교자"(wanderprediger)라고 부르기도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랍비나 선생(teacher)으로 부르는 것을 본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선포자 설교자(preacher) 인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받은바 은혜대로 그 분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가 흔히 전통적 신학 이해대로  예언자, 사제 왕적 존재로서 말씀 선포와, 가르치는 자와 , 귀신( demon or dirty spirit)을 몰아내는 일(go out), 그리하여 많은 병들과 상처를 치료하고(cure), 치유(healing)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 son of man & Mesiah) 등으로 불리어진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치유자(Healer) 로서의 주님을 모셔 보고자 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병들고 아프며, 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 본래 이 말씀은 이사야 42:3 절의 말씀을 예수께서 인용하신 것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것이며"( 이사. 42:3) 상처난 갈대를 부러뜨리지 아니하며 (bruised reed he will break), 연기나는 심지를 없애지 않는다.( a smoldering  wick he will not snuff out)


일찍이 조실부모한 고아의 마음은 얼마나 아픈가? 먹을 것 입을것의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심하면 영향 실조를 겪고 성장과 발육이 더디며, 그로인한 각종 질병을 앓게된다. (요즘엔 너무 잘 먹고 잘못된 식 습관으로 비만이 유행이지만) 지구의 북쪽은 풍요가 문제이고 지구의 남쪽은 기아와 굶주림에 허덕인다.


같은 나라 같은 사회에 살면서도 가난한자의 상대적 박탈감의 상처는 얼마나 큰가?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도농간의 격차, 자라 잡힌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의 격차는 얼마나 큰가? 하여 자리다툼의 경쟁과 전쟁이 얼마나 큰가. 선택받지 못한 자의 상처 또한 크다. 


갈대는 참으로 연약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약해진다. 기름이 다한 등불은 연기만 흩뿌리고 빛을 발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 모든 것, 상한 갈대와 꺼진 등불은 쓸모 없게보이고 버려질 것으로만 보인다. 그 수명이 다 되었다고 보고 버려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비록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꺽여서 곧 사라질 것 같은 존재일지라도 결코 쉽사리 꺽지 아니하시고 끄지 아니 하신다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들의 가치 없음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함을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능력 위주와 승자의 찬가와 적자의 오만함으로 약자를 무시와 멸시의 눈으로 , 쓸모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마저도 주님은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외모 중시, 소유 중시, 물질과 자본 권력의 중시, 교권의 중시가 아니라 가장 쓸모 없는 것 같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며 기름이 다 되어 꺼져버린 심지도 없애지 않고 불꽃을 다시 피울 수 있다는 잠재성과 가능성(Potential& possibility) 을 보고 계시다는 것이다. 


늘 소자를 생각하고, 부모 없는 자(고아 orphan)도 거두시며, 미망인 (widow)과 나그네( Imigrant,  a traverler),를 귀히 여기시는 주님이 아니신가? 세상은 이러한 약자를 자신의 소유의 노예로 삼거나 노리개로 삼는다. 그들의 피와 땀을 통하여, 그들의 인격을 종속시키고 탐욕을 채우고자 혈안이 되어 산다. 


우리가 자랑하는 위대하다는 역사의 유산들이 바로 이러한 약자의 피로 이루어져 왔다. 오늘의 권력과 독점 재벌의 경우가 다 그러하다. 교권 역시 신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이들을 착취하는 기술에 달인이 되어 왔다. 

겉으로는 거룩을 가장하고 속으로는 자신의 업적과 명예의 바벨탑을 쌓아가며 신과 사람, 그리고 역사를 속이려한다.  겉으로는 민중을 위하는채 하고 실재로는 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며 거룩의 영광을 독점하여 신까지 우롱한다.


약자는 세상의 권력과 재난과  물질로부터 소외 되어 상한 갈대가 되고 꺼져가는 기름 없는 연기만 나는 등, 심지가 되어 간다.  주님은 위세 등등한  승자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실패와 넘어짐과 상처로 죽어가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에 관심을 기울인다.


주님은 로마의 식민지와 그의 권력에 기생하며 민족과 조국의 민중의 고혈을 짜고 그 혈세를 통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간교한 여우 헤롯 아래서 신음하는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고 빈 들에 나가 밤 세워 부르짖는다..


주님은 제국과 야합하여 거짓 평화를 선전하며 강요하고, 재벌과 권력에 기생하며 민중을 억압하고 멸시하는 검찰과 법원, 썩은 언론, 그리고 그들의 썩은 고기에 침 흘리며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룩과 값싼 은혜를 팔며 자신의 탐욕을 체워가는 교권과 타락한 종교 귀족들을 바라보시며  분노하신다. 그리고  불꽃 같은 눈동자로 그 들을 꾸짖고 책망하며 바라보신다.


그리고 주님은 치유의 사역을 멈추지 아니하신다. 예수님은  치유하는 말씀을 중풍병자에게(paralysis Mk 2;1-12, Jn. 5:1-9) 손마른자(Withered hand.MK.3:1-6),휘어진 척추병 자 (curvatture of spine LK13:10-17), 열병에 걸린 자(Fever.MK.1:29-32), 과다한 월경으로 인한 출혈 자(excessive menstrual bleeding MK.5: 24-34), 귀머거리(deafness( Mk.7: 31-37) 실성증( aphonia(dumbness MK 9:32-34), 소경(blindness MK.8:22-26), 10:46-52, Mt. 9:27-31, Jn.9:1-12), 말씀하시며  고치신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과 영혼의 전인적 치유를 감당하시기도 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치유방식(healing modality)에 는 "용서(forgiveness)" 가  있다. " 나의 아들아 너의 죄가 용서 되었다 .(My son, your sins are forgiven)" 


너의 죄가 용서 되었다. 일어나라 너의 침구를 걷어내고 걸어라 그리고 집으로가라(your sins are forgiven. Rise, take up  your parallet and walk? I say to you, take up your  pallet and go home.) 하나님으로서의 죄의 용서에 대한 행동들,  용서에 대한 능력( power to forgive) 그리고 예수 안에서의 믿음( faith in Jesus)이 필요하다.


치유자의 믿음은 용서에 대한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 이다.  그것은 심리학적 치료나 심리적 요법의 치료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것이 주님의 모든 치유의 시스팀이다. 우리 모두는 상한 갈대로산다. 우리 모두는 기름 없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가 자랑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내 놓을 아무것도 없다.  그저 상하고 꺼져가는 실존의 불안 뿐이다.  그 곳에 주님이 오신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우리의 꺼져가는 등에 성령의 기름을 부으신다.  내 너의 죄를 용서한다.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평안히 가라 하신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친구와의 사이에서, 동료와의 사이에서, 원수와의 사이에서, 선 후배와의 사이에서, 그리고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어둠에 붙잡힌 탐욕의 권력과 자본의 독점에서, 거룩을 가장한 교권의 간교함 속에서 상한 갈대로 꺼져가는 등불로 사는 연약한 모든 자여 주께서 말씀 하신다. 너의 모든 죄가 사함을 입었다. 편히가라, 일어나라 


주님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질병에만 관여하시는 치유자가 아니시다. 주님은 하나님의 집이  신의 제사를 빙자하여 가난한  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거룩의 상거래를 뒤 엎으시며 그 도적들에 대하여 회초리와 채찍을 드신다.


오늘의 교회 역시 기득권을 확보한 자들은  사회의 기득권자와 궤를 같이하며 그들의 구조악을 방관하는 것 만이 아니라 그들과 깊이 타협하며 교권의 맛을 즐긴다. 신의 이름으로 협박과 위협을 하며 세속의 권력과 자본의 쾌락에 푹 빠져 영과 육의 풍요를 누리며 민중의 진솔한 삶을 조소하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들의 노리개로 치부한다.


주님은 이것에 대한  치유자 - 예언자(healer- prophet) 자 이다. 성경은 자신이 경험하고 , 자신이 접한 은혜의 통로를 통하여 이해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무어라 할 비판적 시도를 하는 것은 신중할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평생을 바쳐서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진리의 보화를 찾고자 했던 신학자와 목회자 혹은 그와 유사한 삶을 살고자 한 자들의 노고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단지 한 개인의 삶에 대한 관심 뿐 아니라 제정일치의 시대에서 식민지의 제국들 로마 뿐 아니라 그 이전의 모든 제국들과 국가 혹은 조직들의 구조악에 대하여서도 분노하고  그것의 타협과 어찌보면 그 보다 못한 악에 절여 있고 안주해 있는 교권에 대하여 혁명(기존의 악과 죄에 대한 구조와 제도 혹은 기득권의 탐욕에 대하여 새로운것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의 대한  회복(restore)을 바라셨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는 21 세기의 사회 구조는 아니었지만,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모순된 사회 연결고리와  관계성에 대하여 결코 침묵하거나 방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 창조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각종 부조리와 악에 대하여서는 더욱 큰 분노를 느끼시고 바로 잡으려 하셨을 것이다.


이것을 나는 사회적 구조악의 치유라 부르고 싶다. 개인의 선함과 성실로서는 도저히 고치거나 바르게 할 수 없는 거대한 기존의 구조악에 대하여 교회가 침묵하는 것은 그 구조악에 대하여 더 큰 악을 잉태하게 하는 죄악을 저지른다 할 것이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처럼 한 생명과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께서  한꺼번에 어둠과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회의 현상을 보고 침묵하셨거나 그대로 지나치는 것을 허용하실까? 그런 모순은 없다. 


한 영혼을 사랑하시듯 역사의 상한 갈대와  거져가는 등불을 바라보시며 안타까워 하시고 밤을 새워 부르짖고 고뇌하셨을  것이 틀림 없다. 역사가 상하면 많은 생명들이 죽고 병들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사람들의 탐욕과 욕망은 이것을 위하여 머리를 짜내고 소위 전략이라는 고도의 기술을 생각해낸다. 사실은 자신과 모두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하게 될 어리석은 악의 계획임을 모르고서.


어찌되었든, 주님은 오늘 이 순간도 우리의 상함과 기름 없는 것을 위하여 그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부어주신다. 아 사랑스런 주님께서.   

참조( Jesus the Healer, Stevan L Davies. constium, New York, The Healing Church.Abigail Rian Evans  United Church Press Cleveland, Ohio)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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