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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문화원과 오도석 원장 탐방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2-07-13 (금) 08:15 11년전 6980  
성천문화원과 오도석 원장 탐방


지난 10일 유성에서 총회 회의를 마치고 저녁 7시 통일강좌까지 생각지 않게 4시간을 벌었다. 평소 주성천교회를 찾아보고 싶고 뿌리공원을 가보고 싶었다. 먼저 대전 유성구 지족동 871-7에 있는 주성천교회를 찾았다. 진귀한 도자기와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입구에서부터 정말 엄청난 작품들이 눈을 의심하게 한다. 2층 본당에 가서는 아예 강단, 성가대석, 회중석 전체가 국내 최대의 전시장을 보며 이게 무슨 일인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오 원장이 미국 뉴욕 경매장에 가서 직접 구입했다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 수십여 점을 감상할 수 있는 운보전시관을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 도자기 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진귀한 도자기들이 진열된 전시실, 그리고 1만 여 점의 수석전시실, 그리고 신윤복의 '미인도',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비롯한 진귀한 조각 작품들을 모아놓은 '샘물갤러리', 분재 작품들을 모아놓은 '샘물분재원'과 등 모두 7개 전시 공간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운보전시관의 커다란 도자기는 운보가 도자기에 직접 붓으로 산수를 그린건데 십장생이 새겨진 도자기는 국보급이라고 한다. 2005년 뉴욕 전시회 때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단다. 그리고 운보의 대표작인 '시집 가는 날'은 신라 호텔과 이 곳, 단 두 곳에만 있는 작품이고 서해안 파도리 갯벌에서 구해온 천년학바위도 있고, 조각가 문신의 작품도 있어 놀랍다.

이제 당회장실인 것 같은데 마주 앉았다. 금년 1월 1일 아예 목사직을 반납, 문화원장으로 자연인이 됐고, 종교적인 폐쇄적인 공간인 본당을 아예 전시문화공간으로 내놓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니 너무나 파격적이라 할 말이 많다.

오원장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政治'가 아닌 '正治'라고 한다. 막힌 물을 뚫어 정상적으로 흐르게 하는 것처럼 이 세상을 바르게 흐르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다. 종교를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살고 싶고 공주 마곡사 전 주지 범진 스님과 친하게 지내는데 불교의 '깨달음'과 기독교의 '거듭남'을 비교하며 종교를 초월해 소통하고 싶다고 한다.

성천문화원의 '聖泉성천'은 '거룩한 샘'이란 뜻이다. 오 원장은 들풀 하나에서도 감동을 받고 따뜻한 소통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오 원장은 유교의 '중용'과 도교의 '도덕', 불교의 '득도', 기독교의 '영성'에 대해 강조했고, 히브리어 '카도쉬(거룩)'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진정 마음의 도가 열린 사람은 공의롭고, 득도하고, 덕이 되고, 빛이 됩니다. 중용과 득도와 대각과 영성은 다 절대자의 마음을 나타내지요.” 특히 '카도쉬'는 '거룩'이란 말로 '따스하다', '감동되다', '소통되다', '대화가 되다', '아름답다'는 의미로 세상에 감동과 공감을 주고, 아름답게 소통하도록 도덕과 종교와 영성이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26년간 목회생활을 하면서 부흥강사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았다고 한다. 그중 바티칸에 갔을 때가 가장 인상 깊었는데 사람들이 콩나물처럼 몰려드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 때 대전을 바티칸처럼 문화의 르네상스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결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육체보다 정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며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로 작품 분재를 만들거나 귀한 예술작품을 구매해서 아름다운 생명의 문화를 만들고 공유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름다운 것을 보면 무조건 가슴이 뛰었다며 감동을 주는 사람은 신이 보내준 사람이란다.

성천문화원에는 승리기독학교라는 일종의 대안학교가 있다. 청소년들이 공부의 목적도, 삶의 방향도 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서 시대와 역사 속에 바른 가치관을 가진 참된 리더로 교육하고 싶서 만들었다고 한다.

오도석 원장은 '십팔기'와 '쌍절곤'을 통해 다져진 근육질 몸매 덕분에 젊은 시절 한국의 이소룡이라는 의미로 '오소룡'이라 불렸으며 주방장, 분재전문가, 수석전문가, 목사를 거쳐 문화원장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57년 경북 영주에서 영생농장을 경영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5남 2녀중 셋째로 태어난 오원장은 아버지로부터 농장 일을 배웠고 분재를 자연스레 익히게 됐다. 그는 농원에서 과일나무를 다루다가 타고난 미각과 요리에 대한 감각으로 한식요리사 자격증을 딴 후 경북 영주 현대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다.

냉면 뽑는 기술이 일품이라 식당 사업이 번창일로에 있던 29세에 '주님의 부르심으로' 총회신학대학에 입학,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 1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11년에는 미국의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영성신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6년 동안 국내ㆍ외에서 수많은 성회를 인도해온 부흥강사이자 목회자인 그는 세상과 소통하며 선교의 큰 비전을 이뤄가기 위해 주성천교회를 개척해 담임해 왔다. 평상시 종교계의 개혁을 부르짖던 그는 금년 1월 1일자로 교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이제는 자연인으로 돌아와 분재를 가꾸며 성천문화원 경영에만 전념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분재원이나 수석전시실, 갤러리 등은 종교색깔을 버리고 모든 사람이 와서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누구나 더불어 같이 살려고 한다. 사람의 생명은 유한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EQ(감성지수)와 SQ(영성지수)를 높여서 건강해지도록 막힌 곳을 뚫어주는 '거룩한 샘물' 성천문화원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는 참 자유인이었다. 진리가 자유케 하니 거칠 것이 없나보다. 물론 그로하여금 자유케 되는데 까지는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이제까지 전파한 복음과 진리를 확실하게 몸으로 살고자 하는 실천에 연유하리라 본다. 작품만 보지 않고 오원장을 직접 만난 것은 행운이다.




오도석 원장 : 대화를 해보니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1,800여 명까지 모였던 교회 - 다 세상으로 파송하고 200여 명이 모인답니다.


본당에 올라가는 계단에도 작품들이


2층 수석전시관 1만 여점



본당


강단


찬양대석이었던 거 같습니다.


진귀한 작품들이 즐비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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