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본질을 찾아가는 신앙(마태복음 12:1-8)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2-11-06 (화) 11:26 11년전 6223  
본질을 찾아가는 신앙
마태복음 12:1-8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은 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2:23-28절과 누가복음 6:1-5절에도 이 말씀이 나오는데 대략적인 기록연대를 보면 마가복음이 50-70, 누가복음이 53-58, 마태복음이 55-80년 사이니 최초의 연대로 살펴보면 마가복음, 누가복음, 마태복음의 순서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안식일 논쟁에 대한 말씀만 놓고 보면 마가, 누가, 마태복음의 순서로 기록연대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안식일 논쟁에 대한 것을 마가복음에서 인용하면서 보태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안식일 논쟁에 대한 본래의 기록은 마가복음입니다.
 
먼저 마태복음의 저자가 보탠 부분은 1절 부분에 시장하여라는 부분과 5-7절에서 민수기 28:9-10절의 인용(5)이 더해졌고, 호세아 6:6절의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는 말씀이 12:7절에 더해졌습니다. 12:6절에서는 예수님은 성전보다도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표현입니다.
삭제한 부분은 마가복음 2:26절에 나오는 아비아달 제사장의 이야기입니다. 그 일은 정확하게는 아비아달 제사장 때가 아니라 아히멜렉 제사장 때에 있었던(삼상21:2-7) 일입니다. 그리고 27절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하는 말씀이 삭제되었습니다. 이러한 첨부와 삭제를 통해 볼 때에 마태복음의 저자는 구약성서에 상당히 능통한 사람이었으며, 예수님의 신성을 부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안식일 논쟁의 의미
 
이 사건은 5-6월경 밀이 익을 무렵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안식일에는 39가지 노동을 금지했는데 그 중 하나가 추수작업입니다. 밀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추수작업에 해당한다는 당시의 법 해석(판례)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법 해석을 기초로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3절 이하 다윗과 관련된 일은 사무엘상 21:2-7절에 의하면 이러합니다.
제관들은 안식일마나 새 빵을 하나님께 드리고 묵은 빵은 오직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아히멜렉 제관은 다윗이 굶주린 것을 보자 법규를 무시하고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빵을 주었습니다. 예수시대 율사들은 사람의 목숨이 위태할 때에 한해서 안식일 법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밀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목숨이 위태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8절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은 법률만능사상을 물리치시고 인권을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안식일법의 준수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사람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이런저런 법 조항을 만들어 자기들의 체제를 옹호하고, 공고화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의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서 힘쓰기보다는 39가지나 되는 금지조항을 만들어 놓고, 이와 유사한 행위는 어떤 일이든 금지를 했습니다. 안식일법의 근거는 십계명 중 4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너나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가축이나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 계명은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일 년 365일 쉴 틈 없이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이들에게는 단 하루만이라도 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가축까지도 쉬게 하라고 한 것은 가축이 일하게 되면 누군가 그 가축을 부려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아예, 쉼의 걸림돌이 될 모든 것들을 차단하지 않으면,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기에 안식일법의 준수는 중요했던 것입니다.
 
노예들의 쉼을 보장하는 의미에서의 안식일법이었던 것이지요. 이 말씀은 창세기 11절의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세상 창조의 순서가 이러저러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권선언입니다. 당시 파라오는 신이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그 신을 섬기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파라오까지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파라오뿐 아니라 노예생활을 하는 나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누구는 신처럼 누구는 노예처럼 부려지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인권선언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문자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법 39조항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요?
 
불붙이기. 불 끄기. 망치질. 긁기. 표시하기. 모양대로 자르기. 쓰기. 지우기. 짓기. 무너뜨리기. 씨 뿌리기. 쟁기질. 추수. 추수단 묶기. 타작. 곡식 씻기. 도리깨질. 체질. 방아질. 반죽. 빵굽기. 양털깍기. 표백. 재료배합. 염색. 실뽑기. 베틀에 실얹기. 방적. 천 짜기. 다 된 물건 치우기. 매듭짓기. 매듭 풀기. 찢기. 바느질. 덫 놓기. 도살. 껍질이나 가죽 벗기기. 무두질. 공공장소에서의 운반행위 . 39가지다. 이들 금지조항 외에도 이와 유사한 일은 어떤 일이든지.
 
그런데 나중에는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형식들이 자기들의 체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마구 갖춰지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 안식일날 무화과 열매 하나나 그보다 무거운 것을 나르면 안식일을 깬 것이다. 안식일에. 무화과 반쪽을 드는 것은 허용되지만, 만일 그 반쪽을 바닥에 놓았다가 다시 들어 올린다면 그것은 안식일 날 짐을 나른 것이다
2) 누군가가 과일 하나를 들고 나르던 중에 안식일이 시작되면. 그 사람은 그 과일을 즉시 손에서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안식일 날 짐을 나른 것이다.
3) 안식일 날 틀니를 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틀니가 빠지면 자기도 모르게 떨어진 틀니를 집을 것이요, 그로써 안식일 날 짐을 나르게 되기 때문이다.
4) 안식일 날 정원을 거니는 것은 금지된다. 그것은 정원을 거닐다 벌레 먹은 이파리를. 보게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이파리를 따게 되고. 그로써 안식일 날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5). 안식일날 거울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거울을 보다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자기도.모르게 그 머리카락을 뽑을 것이요. 그로써 안식일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마른 무화과 한 송이 무게에 해당하는 식물. 다른 것과 혼합하기 위해 넣는 한 잔의 포도주. 한 모금으로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우유. 상처에 바를만한 소량의 물.어린이에게 바를 만한 양의 기름. 한 장의 세관 통지서를 쓸 만한 종이. 글자 두 자를 쓸 만한 잉크. . 개의 펜을 만들 만한 갈대 등등 이상을 움직이거나 옮기는 것은 짐을 진 것이고 노동을 한 것이다
 
이러다 보니 안식일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해서 있는 법이 되어 버리고 그래서 원래 취지에도 맞지 않게 된 것이다. 그날 벌어 먹고살기도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은 꼼짝도 없이 굶주리게 되지만 부자들이야 안식일이 되기 전에 미리 먹을 것을 분비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적인 안식일법 위반
 
오늘 본문과 연결된 이야기들은 복음서에 공통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입니다. 그 역시도 안식일법 위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안식일법, 본질을 잃어버린 안식일법을 해체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행위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로 비치고, 이 때문에 예수님은 살해위협을 당하게 되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안식일법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알았지만, 그 족쇄를 깨뜨리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법의 본래의 의미를 회복할 수 없으므로 의도적으로 안식일법을 위반하신 것입니다.
 
본질을 찾아가는 신앙
 
본질을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본질을 추구하면서도 본질을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먼저는 종교지도자들이 껍데기를 본질처럼 포장했기 때문이고, 본질이 무엇인지 알더라도 마치 예수의 시대와도 같은 껍데기 율법 신앙에 사로잡혀 있어서 본질을 추구하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깨닫는 지혜와 그것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껍데기(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가 죽음을 각오하고 그 일을 했던 것과도 같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기복신앙적인 틀에 붙들려 있습니다. 이 사회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잘 되는 것이 축복이고, 그러한 축복을 내세에까지 가져가겠다는 욕심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본질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겉으로는 정의, 평화, 사랑을 말하지만, 그 본질로 들어가 보면 끊임없는 자기 욕심의 실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 배를 채우는 사람들은 성령을 망령되게 하는 죄를 짓는 것이요,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을 찾아가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보시고 웃기지 마라.” 하신다면, 그 얼마나 허망한 신앙생활입니까?
 
본질을 알아도 실천하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용기도 필요합니다. 껍데기가 전부인 줄 아는 이들의 공격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본질적인 신앙을 찾아가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면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아는 순간에 무거운 십자가가 아니라 쉽고 가벼운 멍에임을 알게 되고,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이 진리의 길이기에 기쁘게 걸어갈 수 있으며, 남이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자기만족 혹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신앙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저는 그것을 황금률에서 찾습니다.
 
마태복음 7:12절에서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 5(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와 예언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이웃을 대할 때에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일입니다. 그 이웃이 누구입니까? 단지 사람뿐입니까?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라고 주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포함합니다.
 
본질을 찾아가는 신앙, 본질을 찾았다면 개인구원의 영역에 머무르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가 아니라 이웃을 하나님 대하듯 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의 법이 문제가 있다면, 그것과 싸우고, 권력이 문제가 있다면 그 권력과 싸우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모든 영역에서 그러합니다. 그 기쁨을 공유하고 나누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들풀교회 교우 여러분!
본질그것의 다른 말은 진리요, 그것의 다른 말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도덕경 1장에서도 말하듯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하듯, 하나님을 찾아가지만, 우리가 평생에 그분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꾸준히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삶의 기쁨을 느끼고,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웃의 삶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구나! 그 기쁨을 나누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열려있습니다.
 
껍데기 화려한 것에 혹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신앙인지가 중요한 것이지 큰 교회를 다녔는지, 어떤 직분을 맡았는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질에 얼마나 근접하였으며, 그 본질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껍데기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분의 소중한 삶을 비본질적인 껍데기에 붙잡혀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