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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한 달란트 종의 대화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2-11-11 (일) 22:19 11년전 6162  
 
1986.jpg

 
1.
 
어느 대학교 학부생들의 공개 세미나에 청중으로 다녀왔습니다. 여러모로 흐뭇한 광경들이 많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학생들이 종교 문제를 다루면서 “기복주의”를 언급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프리젠테이션에 함께 뜬 것은 ‘식사기도 하시는 할아버지’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의 정식 명칭은 “은혜”(grace)인데요, grace라는 영어 단어에 “식사 감사기도” 의미가 생길 정도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원래 사진이었습니다. 작은 광산이 있는 소읍(小邑) 보베이(Bovey)에서 '1919-1'년에 엔스트롬(E. Enstrom)이 찍은 것을 그의 딸이 나중에 유화로 옮긴 것입니다. 작은 테이블 위에 가정용 성경, 안경, 오트밀 죽, 식빵 등이 있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 노인의 모습이 기억나실 겁니다. 이 사진 속에 작가는 전쟁 때문에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여전히 감사할 것이 많다는 메시지를 담았던 것이죠. 자족의 감사인데요, 이것을 ‘기복주의’라니요. 신자가 아니더라도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면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쉽습니다.
 
2.
 
성경 말씀을 볼 때도 못내 아쉽게, 이러한 맥락을 놓치게 되는 구절이 종종 있습니다. 단, 주의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구절 자체의 난해함 때문인 경우가 많지요.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주인과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대화(마 25:24~27)입니다. 이 구절들이 품은 미세한 뉘앙스를 감지하지 못하면 그 다음 구절들이 주는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주인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가혹하고 냉정하게 이익을 남기도록 독촉하는 주인으로 말입니다. 비록 이 비유의 핵심이 달란트를 맡은 종들에게 있다 할지라도 주인의 성품이 어떻든 상관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서 모으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분이심을 떠올리는 분도 계시던데요, 주인에 대한 종의 생각은 본문에서 맥락상 부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연상은 본문이 주는 메시지와는 거리가 멉니다. 만일 이러한 종의 생각이 긍정되었다면, 땅을 파서 주인의 돈을 보관한 종의 행동은 오히려 적절했다는 평가를 받아야하겠지요.
 
종의 생각이 부정되는 맥락 속에서 보아야만 주인 대답(26~27절)의 진의에도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돈놀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이익을 남겼어야 한다는 주인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고 보시면 안 됩니다. 종의 변명이 지닌 자가당착을 주인이 멋지게 드러내고 있는 구절일 뿐이지요. “자네가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자네는 돈을 땅에 파묻어야 할 것이 아니라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겨서라도 이자를 남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나를 그렇게 판단(생각)했기 때문에 돈을 묻었다(행위)는, 이러한 종의 생각과 행위가 안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주인에 관한 종의 생각이 어떤 것이길래 그 생각대로라면 그 종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경계를 하는 돈놀이라도 했어야 했을까요?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이라는 표현 속에서, 종은 주인을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분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혹하고 냉정하게 결과만을 따지는 주인이라고 여겼기에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익은 고사하고 손실이라도 피하기 위해 두려운 마음으로 돈을 땅에 묻어 보관했던 것이죠.
 
주인에 관한 이 종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달란트 비유의 입장이니 우리는 이제 종의 이러한 생각을 뒤집어서 우리 하나님께 대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앞의 다른 두 종의 경우에서도 배여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받은 똑같은 칭찬 속에서 이익과 손해라는 결과적인 측면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임무에 임하는 과정과 태도에 대한 칭찬만 있는 것이죠.
 
 
3.
 
최선(最善)이라는 단어는 중의적입니다. 하나는 최악의 반대말로서 가장 좋은 것을 뜻하며, “결과”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게으름(26절)의 반대말로서 주어진 조건 속에서 전력(全力)을 다한다는 것을 뜻하며,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주목하고 있는 청지기의 자세는 좋은 결과가 아니라 좋은 과정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런 저런 회한들을 갖게 되는 계절입니다. 대학수능시험도 막 끝났고요. 전력을 다했으면 너무 괴로워 마십시오. 주님은 좋은 평가를 해주십니다.
 
                 - 전북기독신문
 
 
'grace'의 파생 의미(식사 감사기도)가 이 그림으로 인해 생겼다는
제 말은 순전히 저의 직감 내지 추정입니다.
이 그림이 영어권 가정의 식탁 앞에 있다보니
그런 의미가 따라붙었겠지요.
언제 대학도서관에서 1900년대 초반의 영영사전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여기에 이 의미가 없으면
제 가설이 매우 그럴 듯 하겠습니다. 
 
금지단어가 들어가 있다고 올려지지 않아
이상하게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
 
기장 홈페이지가 개편되면서
글자체가 조금 바뀌었거나,
기존의 글에 프로그램어가 들어가 있는 현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바로 잡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감안해서 읽어주십시오.
 
샬롬.
 

구자은 2012-12-05 (수) 11:43 11년전
샬롬! 신목사님! 오랜만에 목사님의 컬럼을 읽었습니다. 저도 부족하기만한 한달란트 종과 같은 모습인 것을 봅니다.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시되는 현실앞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목사님의 좋은 과정의 목회가 하나님앞에 신실한 종이라 여겨질 것이라 확신하면서, 저도 좋은 과정을 통해 최선을 열매를 맺어가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차가운 날씨에 건강하시고 행복한 목회와 가정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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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솔문 2012-12-05 (수) 15:55 11년전
구목사님, 너무 반갑습니다. 저에게 두달란트 의미가 커서 그동안 한달란트를 건성으로 보았는데 최근에 그 의미가 보여졌습니다. 제 별명이 두달란트, 다른 말로 삐급(B급)이니 목사님은 적어도 '삼달란트'는 되실 겁니다. 요즘 저희 예배당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예배당 지으실 때 공사장 옆 콘테이너에서 기거하셨던 목사님이 떠올랐습니다. 한달란트는 절대 아니군요. 안부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신] 목회칼럼 다른 분들이 잘 활동하시기 시작해서 저는 바통을 넘겨드리려고 합니다. 독자로 관심은 갖고요. 앞으로 새글이 없어도 이해해주셔요. 일종의 '광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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