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불평과 감사 사이

김승환 (강원노회,생명,목사) 2012-11-13 (화) 11:32 11년전 5152  
불평과 감사 사이
(시 100, 살전 5:16-18)
 
 
추수감사주일에 무슨 말씀을 전할까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중에, 감사하게도 두 개의 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전광 목사님이 쓴 <<평생감사>>라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카톡을 통해서 받은 짧은 글인데, 작년 가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산울교회의 국명호 집사님이 보내주셨어요. 가정사역을 하시는 송길원 목사님의 “아름다운 기도”라는 글입니다. 오늘은 이 두 글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두 마을 이야기(전광, <<평생감사>>, 74-79면)
 
오래 전에 두 마을이 이웃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한 마을은 감사촌이고 다른 마을은 불평촌이었습니다. 불평촌 사람들은 봄부터 겨울까지 무엇에든지 불평과 불만을 쉬지 않았습니다. 봄에는 황사 때문에 먼지가 많다고 불평했고, 여름에는 너무 덥고 토지가 많다고 불평했으며, 가을에는 나무 잎사귀가 많이 떨어진다고 불평했고,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고 춥다고 불평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겨도 혹시 잘못되지나 않을까 의심과 염려로 감사하지 못했고, 언제나 불평 속에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감사촌에 사는 사람들은 정반대로 어떠한 일에도 감사했습니다. 고생을 해도 감사하고 시련을 만나도 감사했습니다. 봄에는 꽃향기를 감사했고, 여름에는 시원한 나무 그늘로 감사했으며, 가을에는 탐스런 열매를 감사했고, 겨울에는 나무 가지에 하얗게 쌓인 눈물로 감사했습니다.
하루는 불평촌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 가서 사람들이 말끝마다 감사하는 소리를 듣고 몹시 놀랐습니다. 그곳에서 약간의 감사를 배워 감사를 살짝 흉내만 내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집안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잇, 감사촌에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괜히 감사만 실컷 하고 왔네”
 
불평도 습관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불평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의 눈에는 장미꽃의 가시만 보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불평이 인격 그자체입니다. 그는 불평의 눈을 가지고 있어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불평의 조건으로 보이고, 불평의 입을 가지고 있어 입을 열면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문제는 본인만 불평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를 불평 인생으로 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감사를 습관화하면서 살게 되면, 감사가 인격 그 자체가 되며, 저절로 감사의 눈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보는 것마다 감사의 조건이 되며, 입을 열면 감사가 샘솟듯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그는 한평생을 감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감사가 행복해지는 연습이라면 불평은 불행해지는 연습입니다.
 
어느 날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열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 부인은 계속해서 이것저것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불편하다, 시트가 지저분하다, 청소도 제대로 안 돼 냄새가 지독하다, 심지어 승무원도 불친절하다고 갖은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이때 부인의 불평을 듣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자신들을 소개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자입니다.”
필 박사가 물었습니다.
“부인께서는 어떤 종류의 제조업에 종사하는지요?”
그러자 남편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제 아내는 항상 불평을 만드는 제조업자입니다.”
 
이 시간, 나는 매일 갖가지 불평을 계속 찍어내는 제조업자는 아닌가 생각해보십시다. 불평을 다량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 힘들다고, 조금 어렵다고 불평하고 원망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감사하는 자세는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지만, 불평하는 자세는 만사를 그르치게 합니다.
 
우리는 감사가 아닌 불평으로 일관한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통해서도 이러한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의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노예생활은 짐승처럼 취급받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홍해를 건널 때만 감사했을 뿐 가나안 땅을 향하는 동안 내내 광야에서 불평거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처음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는 받아먹었을 때는 그 맛이 “꿀 섞은 과자 같다”(출 16:31)고 감사했는데, 나중에는 힘든 광야생활에 금방 지쳐 똑같은 만나를 받아먹으면서 “기름 섞은 과자 맛 같다”(민 11:8)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들은 길이 평탄하지 못하다고 불평했고,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 고기가 없다고 불평했고, 지도자가 못마땅하다고 불평했으며, 심지어 몸에 좋은 음식들을 먹지 못해 정력이 떨어진다고 불평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삶은 불평 제조업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불행해지는 연습을 하다 결국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을 한 발자국도 밟아 보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불평 인생을 살 것인가, 감사 인생을 살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만, 불평은 사탄을 기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매일 우리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항상 낙심하라! 쉬지 말고 원망하라! 범사에 불평하라! 이는 너희를 향한 사탄의 뜻이니니라.”
 
(좀 무리한 단순화가 아니냐 말할지 모르지만,)감사는 하나님의 뜻이고 불평은 사탄의 뜻입니다. 감사를 택하든 불평을 택하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같은 환경이지만 감사하기로 작적한 사람의 삶은 풍요롭고 행복합니다. 반대로 불평하기로 작정하 사람의 인생은 피곤하고 불행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얼굴빛을 평온하게 만들지만, 불평은 우리의 얼굴빛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면 불평제조업자가 아닌 감사 제조업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공장이 불평이 아닌 감사를 찍어내다 보면 늘 기쁨과 축복이 넘쳐날 것입니다.
 
2.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이렇게 말하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하고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전혀 불평 불만을 안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사물의 이치에 맞지 않은 현실 속에서는 불평 불만을 느끼는 게 당연하고, 불평 불만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올은 얘기입니다.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밑바탕에 인간과 역사에 대하여,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믿음과 사랑이 바탕이 된 가운데 행해지는 불평과 그런 것 없이, 불평을 위한 불평을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트 니이버의 말을 깊이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함을 주시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시고, 순간마다 즐기며 살아가게 하소서
곤란한 일을 당할 때면 평화로 가는 통로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죄악이 많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내가 원하는 그 모습으로 생각지 말게 하옵소서.
 
이점과 관련하여 가정사역자로 유명한 송길원 목사님의 “아름다운 기도”라는 글을 음미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3. 아름다운 기도/송길원
 
나의 아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오른손잡이인데 아내는 왼손잡이다. 그래서 급관에 따라 국그릇을 왼쪽에다 늘 갖다 놓는다. 별거 아닐 것 같은 그 차이가 신경을 건드린다. 거기다 나는 종달새형이다. 새벽시간에 일어나 설친다. 늦잠을 자면 무조건 게으르다고 여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올빼미 형이다. 밤새 부엉부엉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든다. 도대체 맞는 구석이 없다.
 
나는 컵은 즉시 씻어둔다. 물 한 컵을 마셔도 마신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언제 해도 할 일이며 내가 다시 손을 댈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그게 안 된다. 찬장에서 꺼내 쓸 그릇이 없을 때까지 꺼내 쓰다가 한꺼번에 씻고 몸살이 난다.
나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나와 달리 아내는 떠나야 할 시간에 화장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가가서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화장품 뚜껑이라는 뚜껑은 다 열어놓고 있다. 나는 그게 안 참아진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낸다.
“아니, 이렇게 두고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향 다 날아가고, 뭐 땜에 비싼 돈 주고 화장품을 사. 차라리 맹물을 찍어 버르지. 황 부어 버려. 맹물 무어줄까 그래”
 
거기다 나는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거의 없다.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성경책까지 들이밀었다.
“여보, 예수님이 부활만 하시면 됐지, 뭐 때문에 그 바쁜 와중에 세마포와 수건을 개켜 놓고 나오셨겠어? 당신같이 정리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 정돈 못하는 사람에게 정리정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고 싶으셨던 거야. 그게 부활의 첫 메시지야. 당신 부활 믿어. 부활 믿냐고?”
 
그렇게 아내를 다그치고 몰아세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야, 이 자식아. 잘하는 네가 해라, 이놈아. 안 되니까 붙여놓은 것 아니냐.”
 
너무 큰 충격이었다. 생각의 전환, 그렇게 나 자신을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게 있다.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이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화가 치민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 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 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야단을 칠 때는 전혀 꿈적도 않던 아내가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이다. 잘 닫는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세게 잠갔던지 이제는 날더러 뚜껑좀 열어달라고 한다. 아내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
 
그렇게 철들어진 내가 좋아하는 기도가 있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하나님에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중년이 되었을 때 인생이 얼마나 덧없이 흘러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평안히 살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늙어 여생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우둔함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 드리는 기도는 나를 변화시켜달라는 것이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이런 기도를 드렸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4. 범사에 감사하라
 
여기 제단에 참으로 귀한 열매들이 봉헌되어 있습니다. 무, 배추, 사과, 배, 감, 밤, 고구마, 감자....모두 얼마나 귀한 것들인지 모릅니다. 이 가운데 많은 것은 시장에서 사온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귀한 은총을 먹고 이땅에서 자란 것들입니다. 또 우리가 정성껏 키운 것들도 꽤 있습니다. 작고 볼품은 없을지 몰라도, 여기 있는 이 고구마와 감자는 교회 앞 텃밭에서 거둔 것이고, 이 밤들은 앞뒷산에서 주운 것입니다. 직접 키워본 사람은 알 거예요. 꼭 자기 자식과 같아서, 아무리 볼품없어도 내 새끼는 귀하고 사랑스럽잖아요. 또 오늘 특별히 셋넷학교 선생님들이 배추와 무를 바치셨는데, 이것은 셋넷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직접 키운 것입니다. 생각하면 정말 눈물겨운 것이고, 그래서 이분들이 거둔 것을 꼭 제단에 바치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제가 특별히 부탁을 드렸는데, 이 학생들이 어떻게 이 원주땅에 오게 되었습니까?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오면서 온갖 죽을 고생을 다했던 청교도들처럼 고생을 하면서 이 땅에 오게 되었잖아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올 때 바다에서 기근과 전염병으로 40여명이 죽었습니다. 막상 미국땅에 도착은 했지만, 낯설고 물설은 곳에서 모든 게 서틀렀습니다. 가져온 씨를 뿌렸으나 현지 기후와 맞지 않아서 뭐 하나 제대로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럴 즈음에 마음씨 좋은 인디언들이 와서 옥수수씨와 고구마 감자씨들을 주면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얼마간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가을,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감격의 추수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추수감사예배의 시초였습니다. 셋넷학교 학생들도 그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잖아요. 그래서 이분들이 거둔 이 예물이 정말 귀하게 느껴집니다.
 
이 열매들을 보면서 참으로 감사의 심정을 갖게 되는 것은 이들 중 어느것도 그 동안 자신들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가운데 어언간에 열매맺은 것들입니다. 왜 내가 있는 곳은 이렇게 토질이 박하냐, 햇빛이 안 드냐, 그러면서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씨앗이 자라는 곳을 탐하여 자리를 옮기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귀한 열매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모든 열매들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되 보기에 화려한 구중궁궐로 오시지 않고 지구촌의 한 귀퉁이, 변두리 가운데 최고 변두리라고 할 수 있는 유대땅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그곳도 말구유에 오셔서 어려서부터 피난살이를 하셨고, 여러 해 후에 고향에 돌아오신 뒤에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셨습니다. 나사렛이 어떤 동네입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던 그런 동네입니다. 그런 곳에서 묵묵히, 불평하지 않고 30년을 사셨어요.
 
불평만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감사하게 사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기를 즐겨하셨고, 밤에도 또한 기도하고 주무셨으며, 이곳저곳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불평불만을 퍼뜨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전파하셨으며, 늘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극히 작은 일들에도 감사하시고, 또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 믿음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보십시다. 어떤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작다면 얼마나 작은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작은 것에도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축사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의외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5천명이나 되는 군중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잖아요. 어느 곳엘 가시든지 이처럼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하시므로, 가시는 모든 곳이 기적의 현장이 되었던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곳에선가,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도 있긴 합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심하게 책망하셨지요.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0-24) 그러나 그때에도 예수님은 곧바로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열심히 섬겨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열매가 보이지 않아 속이 상하셨지만, 어찌 보면 작다면 가장 작은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감사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끝내는 십자가 위에서도 그리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를,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하시고 기도하신 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고 당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일생은 감사로 시작하여 감사로 끝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 속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햇빛이 비취나 바람이 부나 일 년 삼백육입오일, 전천후 감사로 이어지는 일생이셨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는 말씀 그대로이셨습니다. 오늘 제단에 바쳐진 이 열매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빼닮았습니다.
 
맺는 말
 
바라기는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 이처럼 귀한 열매로 바쳐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열매의 성장과정과 우리의 삶의 궤적이 다르지 않으니, 또 이 열매를 키우신 하나님께서는 기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여러분과 저를 키워오셨으니, 우리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귀한 열매인 줄 믿습니다. 부족한 점 없지 않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사 품고 사랑하사 애지중지 키워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보시고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고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 사랑 생각하며 우리 모두 힘을 내야 할 줄 압니다. 나 자신을, 서로를 위로 격려하고 일으켜 세워야 할 줄 압니다.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며, 장래에도 우리와 함께하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며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