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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이 타는 듯한 사랑(눅7:11-16)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2-12-01 (토) 18:13 11년전 9053  
내장이 타는 듯한 사랑
누가복음 7:11-16
 
 
예수님이 가버나움이라는 곳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조금 뒤에 나인이라고 하는 성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또다시 놀라운 생명 살림의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이 생명 살림의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나인 성에 한 과부가 외아들을 데리고 살았는데, 그만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상여가 나오고 있었고, 그 동내의 많은 이들이 상여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상여행렬과 마주친 예수님은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엽게 여기시며’, “울지 마라.” 하시고는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이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거라” 하시자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말씀은 13절의 ‘불쌍히 여기사’ 혹은 ‘가엽게 여기시며’로 번역된 말씀입니다. NIV성서의 ‘his heart went out to her’라는 부문으로, ‘예수의 마음이 그녀에게로 쏠리다. 가다, 동정하다’의 뜻입니다. 그냥 직역하면 ‘예수의 마음이 그녀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온전하게 누군가에게로 가는 것, 그것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요, 가엽게 여기는 것입니다. 목사님들과 지난주 영어로 함께 읽었던 구절인데 마침 김응교 시인의 [그늘]이라는 책을 읽고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던 차라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동사입니다.
‘스플랑크논’이라는 명사에서 나온 단어인데, 스플랑크논은 연민, 동정, 자비로 번역되지만 원초적인 뜻은 ‘창자,내장’이라는 뜻입니다. ‘내장학splanchnology’이라는 의학용어도 이 어원에 근거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우리말로 바꾸면, 아들을 잃은 과부를 보자 ‘예수님의 애간장이 떨리고,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르신들이 ‘애간장이 탄다’고 하실 때, 그것이 바로 ‘스플랑크니조마이’인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동사가 기적을 베푸시는 동기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4:14절에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병도 고쳐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베푸십니다. 누가복음 10:29-37절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도 ‘측은한 마음이 들어’라는 말이 등장하는 데 그것 역시도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내장이 떨려서, 애간장이 녹고 끊어져서 그대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들은 그 불쌍한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내장이 떨리지 않습니다.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5:11-32절에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탕자가 가산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그 못된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엽니다. 여기서 ‘측은히 여기다’라는 말로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고, 불쌍히 여기는 상태, 그것은 바로 내장이 활동한 결과요, 창자가 뒤틀려 참을 수 없게 된 결과입니다. 애간장이 녹고, 끊어지고, 창자가 꼬이고 뒤집혀서 생기는 마음이 ‘불쌍한 마음’이요, ’사랑의 마음‘입니다.
 
머리나 가슴처럼 겉 부분이 아니라 내장, 곧 속 부분이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참 인간과 참 신앙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산다는 것은 성경을 머리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새기는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머리에 새기지 않고 몸 속, 심장과 뼛속에 새깁니다. 예레미야 2:9절에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까지 타들어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에스겔 3:2-3절에도 보면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먹어서 뱃속에다 넣는 환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38절에 보면 진리와 생명이 나오는 장소가 바로 내장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 이른 것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장’, 내장이 타는 듯한 사랑이야말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을 홍순원 목사는 [간지럼 타시는 하나님]에서 ‘내장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하여 이 내장인은 미래를 구원할 새 힘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김응교 시인의 [그늘]이라는 책을 통해서 ‘내장(스플랑크니조마이), 영생, 타자’에 대한 고민을 했다면, 홍순원 목사의 [간지럼 타시는 하나님]을 통해서는 영성, 생명의 시대에 적합한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첫째로, 영생이라는 것은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지금 여기서 타자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느낄 줄 아는 내장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는 무조건 약자’라고 합니다. 즉,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과부와 고아입니다. 타자란 조건 없는 환대의 대상이며, 내가 모셔야 하는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있고, 레비나스가 1980년대 팔레스틴에 대한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에 대한 질문에 ‘팔레스타인은 타자가 아니라 적’이라고 해서 당시 철학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면, 타자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느낄 줄 아는 것은 ‘타자는 바로 나다’라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레비나스의 ‘타자는 무조건 약자’라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슬플 때 함께 슬퍼하고 기쁠 때 같이 기뻐하는 생명의 일체, 그것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의 아픔과 기쁨에도 적용됩니다.
 
둘째로, 내장인이란 타자에 대해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보시고, 내장이 뒤틀려서 그 고난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차라리 나에게 주라며 아픈 생명을 만지고 주무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타자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너무 쉽게 당신의 아픔을 안다고 하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타자의 아픔에 자신이 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 하여금 지금의 그 삶은 오롯이 당신들 책임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런 말 중 하나가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입니다.
 
이미 자기는 그런 시절을 다 겪고 이렇게 서있는데 당신들은 뭐하는가, 꾸짖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타자의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가 타자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자를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내장인이란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져 아플 정도로 타자의 아픔을 공유한다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타자의 고난 속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으면 자신의 내장이 찢어져 죽을 것 같은 그런 상태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최근 티베트독립을 외치면서 분신을 하는 이들의 심정이 이런 심정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차라리 내게 그 고통을 주십시오. 그것이 생각으로만이 아닌 삶으로 살아지는 것, 신앙인은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내장인은 서로 얽혀서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오장육부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긴밀하게 얽혀서 순환합니다.
 
하나가 나빠지면 다 같이 나빠지고, 하나가 회복되면 다 회복됩니다. 전체가 하나고, 하나가 전체입니다. 어느 한 부위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생의 삶을 살아가고 더불어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잘 봐야 합니다. 타자의 아픔과 고난이 남의 일이 아님을 봐야 합니다. 이번 겨울이 상당히 추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올해 미국 면적의 세 배에 달하는 빙하가 녹아내렸다고 합니다. 빙하가 녹으니 수증기가 발생하고, 수증기는 태양의 빛을 차단합니다. 녹은 빙하는 해수면을 높이고,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쓰나미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집니다. 공기 중 많은 수증기는 폭우와 폭설을 가져옵니다.
 
누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입니까?
모두가 공범이라고 말하지만, 주범은 미국이고, 후발주자 중국이며 이른바 강대국들입니다. 일차적인 피해는 누가 봅니까? 제3세계, 가나한 사람들입니다. 간혹, 부자들도 불시에 피해를 보기도 하지만, 자연재해 앞에서도 가난한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봅니다.
 
이것은 조금 먼 나라 이야기고, 4대강은 어떠합니까? 이미 재앙은 시작되었습니다.
강을 되살리려면 지난 4년간 설치된 보를 철거하는 방법 외에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최근 흉악범죄가 창궐하고 있는데, 그 역시도 우리 사회의 오장육부가 긴밀하게 얽히고 순환되지 못한 까닭입니다. 상생의 삶이 중요합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자신과 자신, 인간과 하나님, 서로 얽혀서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장이 타는 듯한 사랑,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대로 살아가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는 일은 오로지 나를 위한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내장이 타는 듯한 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성숙이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들리는 기적이며, 벙어리의 혀가 풀리는 기적이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인 성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기적을 읽었습니다.
 
그 기적의 시작이 무엇이었습니까? ‘스플랑크니조마이’, ‘가엽게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애간장이 타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마음, 내장이 타는 듯한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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