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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본 받으라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2-12-12 (수) 17:37 11년전 4494  
나를 본 받으라                                              누가복음 9: 23-24
Join in imitating me                                         빌립보서 3: 17- 4: 1
 
세익스피어는 위인에 대하여 세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유형은 날 때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인데, 천혜적으로 위인 형의 사람입니다. 둘째 유형은 노력해서 위대해지는 사람인데, 공부와 훈련, 그리고 많은 수고 끝에 위대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인격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셋째 유형인데, 위대한 인간이 될 것을 강요당한 위인입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도록 강요당하는 강제성, 그 속에서 위인이 되는 인격이 생기고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아형성을 이루는데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s)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려면 위대한 신앙인 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굉장한 성자가 아니어도, 꼭 내가 저분 같았으면 좋겠다, 저분은 누구일까?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거기에 감동을 받고 바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중요한 타자가 실은 가짜 교인이요, 위선자요, 믿음과 생활이 영 일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사람을 한번 겪고 나면 그 충격 때문에 일생 동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요한 타자는 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3:17)고 합니다. 본 받을만한 사람, 나에게 본을 보여주는 사람- 이 중요한 타자가 우리 각자에게는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 생애와 운명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이상의 문제요 목적의 문제입니다. 현실적 불행이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적 실패입니다. 그러나 이상과 목적의 상실은 미래적 실패입니다. 목적이 잘못되고 이상이 빗나갔을 때에 그 미래는 희망적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슬픔이 있고 좌절이 있게 됩니다. 왜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까? 단 한번 밖에 없는 삶이 아닙니까?
함께 나를 본 받으라(imitators together of me), 이 말씀은 인간적으로 좀 지나친 말이 아닐까 여겨지지만, 문맥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말 할 수 밖에 없는 당위입니다. 결코 교만이 아니요, 바울의 진실 고백이요 정열 고백입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채 재판장인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을 받는데,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그 중요한 시간에 오히려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 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전 26:29). 이것은 바울의 전도자로서의 마음이요 권면입니다. 내가 믿어보니 정말 너무 좋습니다. 같이 믿읍시다. 내가 예수 믿어보니 이렇게 행복합니다. 정말 우리 함께 행복 합시다- 이러한 마음이요 권면입니다. 이 마음을 말로 표현한 것이 나를 본 받으라(join in imitating me)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찾았을 때에 너무 기뻐하는 것 같이,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돌아오면서 함께 즐기자 하는 것 같이 말입니다. 잃어버린 탕자가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버지가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같이, 이 기쁨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스스로 만족하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본래 그는 강요 당한 위인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율법학자요, 바리새인이요, 더욱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데 가담했던 자입니다. 다메섹에 피해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던 주무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고 완전히 변화되어 새사람이, 즉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감격하고 만족해 합니다. 바울은 이제 예수께 사로잡힌바 된 포로가 됩니다. 포로가 된 사람, 강요된 사람입니다만 이제는 그가 가는 길이 복된 사명의 삶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노예성에서 자원성으로, 강제성에서 자발성으로 생의 전환자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포로된 사람, 붙잡힌 사람, 강요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만족하고 조금도 후회함이 없습니다. 목적과 현실에 다 만족해 하며 감사 감격하며 그에게 주어진 사명적 삶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but one thing I do)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따라아가노라(3:13-14)고 고백합니다. 즉 바울은 아직 미완성의 상태이지만 그래도 앞을 향해 온 몸을 기울이고 달려가겠다는 결의가 담긴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도 후회함이 없는 만족하고 감격하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바울이 얼마나 부럽고 자랑스러워 보이며 행복해 보입니까?
사도 바울은 데살노니가 교회에 너희는우리와 주를 본 받는 자가 되었다(you became imitators of us and of the Lord)(살전1:6)고 합니다. 여기 삶의 양식이 예수님, 바울의 일행,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상통하는 맥을 이루고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와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며 자기를 비운 그리스도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2:5). 온몸을 바쳐 사랑하고 그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지상의 목적으로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를 본으로 하고 조금이라도 그와 같은 길을 가고 그의 모습을 자기 안에 실현해 보려는 노력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즉 자기 겸허의 마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비록 그 안에는 의로운 분노의 불길이 숨겨져 있었으나 그의 종교의 최후의 언어는 심판이나 형벌이 아니고 사죄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가 자기의 생 전체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 그의 생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던 그의 목적의 단일성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키에르캐고르의 마음이 순결하게 되기 원하면 한가지 일 만을 뜻하는데 있다고 한말이 진리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순결을 성취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명을 수행함에 가장 건장한 인내심을 가졌지만, 그를 낙심케 할만한 각가지의 장애에 봉착하셨습니다. 민중의 냉담함과 제자들의 불신실함과 교회와 국가의 권위자들의 반대와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과 중죄수가 당하는 공적인 수치와 그리고 한 순간, 하나님까지도 그를 버리셨다는 절망의 의식 이런 극도의 고뇌 중에서도 그는 자기의 의지를 견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주신 잔이 아무리 쓴 것이었을지라도 그는 이것을 받아 마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전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라는 한 귀 절로 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주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자들에게도 그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의지 그것 하나만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에게 시범하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 일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전 )고 하였습니다. 이런 목적의 단일성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에게 너희는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실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 즉 용감하고 자비하고 불의와 비타협적이고 그리고 사랑하신 모든 인격의 요소를 발견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쫓으라 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에 그들이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강박하는 힘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위대한 스승에게 사숙하여 그를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이며 영광스러운 일인가!
본 회퍼 목사는 1935 <나를 따르라>를 집필하므로 그의 신학하는 삶의 갈 길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1933년 전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히틀러의 선풍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터 위에 선 그리스도교의 무력함을 직시한 것입니다. 독일은 국민 전체가 등록된 그리스도인이면서 저들은 시시비비를 가릴 아무런 능력도 없었으며, 설령 그것을 인식 한다고 해도 판단에 따라 행동하기에는 이미 마비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까닭은 정치와 믿는다는 일은 전혀 관련이 없다는 오랜 교리가 저들을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를 닮는다는 수도원도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자기 게토나 온실 같아서 거기서 나올 염두도 못했지만 나오면 곧 얼어 죽어 버릴 것이었습니다. 이에 본 회퍼 목사는 나를 따르라 가 그 난국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길임을 직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 될 사람들을 찾아 첫번째로 하신 말씀이 나를 따르라 입니다. 이 말씀에 응한 베드로의 형제, 요한의 형제의 결단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가담케 한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본문, 누가복음 9:23-24의 뜻을 살펴 보겠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뜻을 집약한 것은 마가복음 8:34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이것은 마태와 누가복음에 전승되었는데, 누가복음에는 날마다라는 말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앞에 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를 믿는 (신뢰하는) 구체적 행위입니다. 그의 옳음을 믿습니다. 그의 뜻을 믿습니다. 그가 하려는 일이 옳은 것이라고 믿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이 같은 결론이 가능 할까요? 그의 길을 다 모르는데, 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그를 따르기로 결단한 것은 계산을 넘어선 행위입니다. 참 따름은 그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계산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 누구, 그 무엇보다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사랑의 고백을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를 본받는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모양새도 닮는다는 말이 있는데, 믿고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그에게 거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길은 그를 닮는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됩니다.          
나를 따르라고 권고하는 분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2천년 전의 십자가가 아니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조건 없는 사랑이 대전제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 삶의 방향이고 기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반복하는 것이 그를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그의 대열에 참여하여 오늘의 삶과 역사에 창조적으로 참여하라는 명령입니다.
여러분, 함께 나를 본 받으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이 위대함을 보십시오. 그실 강요된 사건이었으나 이제는 자원하게 되었고, 스스로 만족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 생명의 길이기에 강요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하였습니다.
본 회퍼 목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예수로 보고 예수의 중심은 그의 십자가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런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 믿었기에 나치의 그 무서운 위협에도 감히 반 나치운동의 선봉에 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후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들은 다 불의와 억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위해 십자가 정신으로 과감하게 살았고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이 세계는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과 희망이 깃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예수를 믿고 그를 본 받는다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반성 함으로써 정말 예수님을 따르기로 새롭게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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