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고엘이신 하나님(출 6:6-7)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3-02-07 (목) 14:47 11년전 6625  
‘고엘’이신 하나님
출 6:6-7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오늘 말씀에서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가알’인데 그 뜻을 ‘구원하다’입니다. ‘가알’의 명사형은 ‘구원’인데, 히브리말로 ‘고엘’이라 합니다. ‘고엘’은 본래 가문의 한 사람이 곤경에 빠지거나 억울하게 죽었을 때 도와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누가 살해되었을 때에 ‘구원자’는 ‘피의 보복자’가 되고(민 35:19-27), 가장이 후손이 없이 죽으면 그 부인과 혼인하여 그에게 후손이 끊기지 않게 해야 했으며(룻 3:12, 4:5, 10), 누군가 경제적인 사정으로 곤란에 빠지거나 노예가 되면 빚을 갚아주거나 종살이에서 속량해 주어야 했습니다(레 25:23-28, 47-49).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어 주신다(욥 19:25, 시 19:15, 사 41:14)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원해주시는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리와 의무
 
출애굽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전에, 그리고 특별한 공로가 없는 가운데 온다는 점입니다. 아무 공로가 없지만, 종살이의 고통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으신 순간,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리가 되었고, 의무가 된 것입니다. ‘고엘’이신 하나님,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곤경에 빠질 때가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으며,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 아우성치십시오, 그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아니, 고엘의 권리와 의무가 있으시므로 반드시 개입하셔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이요, 믿음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곤경에 빠질 수는 있습니다. 강한 자도 곤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엘에 해당하는 경우를 보면 약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로서 약자를 억울하게 하는 가해자가 된다면, 하나님과 맞서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엘의 권리를 다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시에 두려워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가 ‘고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의미요, 그분을 돕는 조력자가 된다는 의미요, 그분을 닮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곤경에 빠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의 횡포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동자들, 입시지옥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우리 사람뿐 아니라, 무분별한 개발 때문에 파괴되는 생태계 이웃들 모두 곤경에 빠진 이들이요, 죽어가는 이들입니다. 이들에게 우리는 고엘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더불어 살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로에게 고엘이 되어주라는 의미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완벽한 고엘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고엘의 의무는 온 힘을 다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완벽한 고엘이십니다.
 
그런데 조금 막막한 때도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 혹은 사회체계 때문에 오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피의 보복자’가 된다든지, ‘형사취수제’ 같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노예적인 상황에 사는 이들은 있지만, 노예제도는 없으니 노예에 대한 어느 정도는 부분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성서를 편의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본래 의미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살해되었을 때, 조금 강도를 낮게 해서 누군가 육체적인 폭력을 당했을 때, 가장 속 시원한 방법은 ‘피의 보복자’가 되어 보복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논쟁들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우리도 고엘이지만, 완벽한 고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기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조금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의한 일을 보면 분노 때문에 참으로 힘들어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긴 하지만, 이젠 그런 분노 때문에 나를 다치지는 않습니다. 상처받지 않습니다. 분노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분노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능력 밖의 일입니다. 내 능력을 벗어나니까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요즘은 상처를 덜 받을까요?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분노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그렇다면, 고엘이신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 일로 분노하지 말자고 생각하니 저도 편합니다.
 
고엘이신 하나님,
그분께서 우리의 고엘이 되어주시고, 우리에게 이 세상의 고엘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엘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시대의 뜻 하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