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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위기 속에서 새 지평을 여는 삶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3-02-14 (목) 08:00 11년전 6465  
욥기, 위기 속에서 새 지평을 여는 삶                 욥기 1: 13- 22, 13: 20- 28,
    -절망에서 신앙으로-                                 19: 23- 27, 42: 1- 6
 
1. 욥기의 책
구약성서의 위대한 지혜문학의 기념비인 욥기는 수 세기에 걸쳐 최고의 찬사를 받아 왔습니다. 투터는 욥기가 성경의 어떤 책보다도 장엄하고 아름답다고 높이 평가 했습니다. 테니슨(Tennyson)은 욥기를 고대와 현대의 가장 위대한 시라고 불렀으며, 카알라일(Carlyle)내 생각으로는 성경에서나 성경 밖에서나 이와 같이 뛰어난 저술은 아무것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욥기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면 주로 1- 2장과 42장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욥은 경건의 모델- 신앙을 잃지 않은 가운데 무자비한 운명의 돌팔매질과 화살들을 인내와 침착성으로 겪어낸 사람- 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욥기의 서문(1-2)과 결어(42)에서만 들어 맞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주요부분에서 욥은 전혀 인내의 귀감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폭풍과 같이 울화를 터뜨리며 하나님께 항변하며 울부짖습니다. 단지 맨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그를 꾸짖고 난 후에야 그는 폭풍우 후의 정적 같은 그 무엇에 깊이 빠져들면서 자신의 거칠고 성급한 항변을 뉘우칩니다.
먼저 욥기의 이해를 위해서 서문과 결어의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욥기의 저자는 경건함으로 유명하고 그의 의로움에 따른 하나님의 호의로 축복을 받은 사람인 욥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욥의 신실성은 하늘회의의 일원중의 하나인 사단(Satan), 고소하는 자(Adversary)의 의심을 받았습니다. 야훼께서 하늘회의에서 내 종 욥을 자랑했을 때, 기소를 담당한 이 천사는 욥의 섬김이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의심하여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오리까 라고 냉소적으로 반문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욥의 재산과 가정을 빼앗아 버린다면 그의 신앙도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야훼와 내기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손실들은 욥의 신앙을 흔들어 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슬픔가운데서도 주신이도 야훼시요 취하신 이도 야훼시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하고 참았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좀더 심한 시험을 제안하였습니다. 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역겨운 부스럼이 나게 되어 성읍에서 떨어져 혼자 잿더미에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아내의 충고도 무시하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저주함으로써 입술로 범죄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세 친구들-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곤경에 처한 그를 위로하러 왔습니다. 결어에 의하면 결국 야훼는 욥의 기도를 들어주고 그에게 전보다 두 배로 갚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선한 민간설화에서처럼 욥은 그 후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2. 욥기 저자의 이미지(image)
욥기의 주인공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우스땅의  한 에돔족장입니다. 우스는 에돔 근처의 팔레스타인 남동쪽에 있었음이 분명하고(31:2, 25:19-24, 4:21), 욥의 친구들도 이곳에서 왔습니다(2:11). 욥기의 저자가 외국인이라는 가설이 논의 되지만, 팔레스타인 변두리 지방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지혜자라고 보는 것이 정론입니다. 쓰여진 시기는 대체적으로 예레미야 시대와 제2이사야 시대 사이라고 합니다.
욥기 저자는 역사 속에서 영위되는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문제는 영원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제기된 종교적 문제입니다. - 생각하고 사랑하며 기억하고 소망하며 살고 죽는 이 고독한 인간- 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시인은 인간실존의 깊은 곳까지 면밀하게 살펴 인간의 문제를 규명하였습니다. 욥은 실존하는 인물, 그런 까닭에 우리들 각자라고 자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욥기는 무죄한 사람의 고난이라는 인간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문제- 그리고 이것의 다른 면인 하나님의 정의의 문제- 는 훨씬 더 깊은 문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의 성격을 탐구할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단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관계가 좋은 일에서나 나쁜 일에서나 무조건 신뢰하는 관계가 아니라 건강과 명성과 가정과 장수 등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좋을 때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넌지시 말합니다. 여기서 욥이 지닌 신앙의 본질은 훨씬 더 깊은 차원까지 천착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경험의 세계전반에 걸쳐 논의가 이루어진 후에 야훼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해답을 줍니다. 그때에 욥은 묵묵히 승복하고 회개합니다. 이로부터 위기 속에서 새 지평을 열게 되는 삶, 새로운 중심축이 생겨납니다. 욥은 겸손하게 회개하는데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기의 책 전체에 비추어 읽어야 합니다.
 
3. 욥과 친구들의 대화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살펴 보겠습니다. 친구들의 대화에는 고대지혜문학에 널리 퍼져 있던 상벌에 대한 교리가 있습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덕행은 번영, 건강, 장수라는 상을 받고, 반대로 죄는 가난, 질병, 요절이라는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명기 사가에 의하여 이스라엘 민족사에 적용되었습니다. 세 친구들은 이러한 응보의 교리로 삶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대화는 성경에서 가장 통렬한 구절중의 하나인 욥의 탄식으로 시작됩니다. 예레미야의 고백들 가운데 하나인(20:14-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20:18). 이 구절은 보기 드문 상상력에 가득 찬 말로 쓰라린 실존의 비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욥의 갈망은, 그가 하나님과의 의미 있는 관계로부터 멀어졌을 때 느끼게 된 삶에 관한 허무감에서 나왔습니다. 욥은 자기가 태어난 날에 빛이 영원히 비치지 말고 또 자기를 잉태한 밤이 결코 광명을 보지 않았더라면 하고 바랍니다.
엘리바스는 욥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면서 욥을 위로하려고 애씁니다. 처음에 엘리바스는 모든 사람이 죄악 되므로 욥도 하나님께 항변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겸손히 고백해야 한다고 점잖게 충고합니다. 친구들은 한결같이 잘못이 진정 욥에게 있기 때문에, 치유책도 그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11:14ff, 22:21참고). 욥이 완강하게 자신의 죄 없음을 주장하자 친구들은 맹렬하게 욥을 비난합니다. 하나님의 엄위함을 옹호하면서 친구들은 상벌에 관한 정통주의적인 공식에 따라 하나님의 정의를 입증하려고 합니다. 친구들은 필사적으로 정통주의를 고수하며 욥의 위험스러운 말속에서 자신들의 안전에 위협을 느낍니다.  서구문명의 역사가 풍부하게 보여주듯이 정통주의는 언제나 이단을 두려워해 왔습니다. 참으로 예언자다운 정신으로 욥기의 저자는 이단의 창조적인 힘을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참으로 신학적인 교의들- 종교까지도- 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할 때 강렬한 힘을 발휘하였기 때문입니다.
세 친구는 자신들의 정통주의 속에서 지나치게 독선적이었고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에 자신만만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완고함으로 인해 욥에 대해 진정한 동정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4. 프로메테우스적인 도전  
욥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있는 자신에게 친구들이 위로가 되지 못하는 허망한 말만 하고 있다고 응수합니다. 그들은 욥의 병을 진단한다고 주장하지만 쓸데없는 의원일 뿐입니다. 그들의 경건한 조롱에 화가 난 욥은 점점 감정이 격화되어 자신의 죄 없음과 순전 함을 주장합니다. 욥은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도 죄를 지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기는 비교적 의로우며 어쨌든 자기가 받는 벌이 자기 죄에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14:1-6).
그러나 곧 욥의 말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잘못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비참함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그는 부르짖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심술궂은 원수처럼 등장한다고 고발합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피조물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폭군(9:18-19), 야수(,9), 배반하는 원수(-14)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거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기가 하나님이 파수꾼을 세워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큰 원수, 신화적인 바다의 괴물(티아맛 또는 라합)과 같다고 합니다(-12). 극도로 비참한 처지 가운데서 그는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 만 있다면 자신의 정신적인 고뇌가 끝날 것이기 때문에 침 삼킬 동안만이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내버려두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
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7:17-19).
서문에서 욥은 자신의 엄청난 불행에도 불구하고 입술로 범죄치 않는 매우 온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욥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욥의 고발들은 너무도 대담한 도전이기 때문에 정통 유대인에게 이단적으로 보였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백록에서 하나님께 대담한 질문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전능 자에게 도전하는데 한 술 더 뜨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순전 함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27:6, 31:36) 그는 실제로 자기자신을 하나님에 관한 재판관으로 내세우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어떤 때는 하나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또 어떤 때는 자신의 무죄함이 입증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만나 대등한 입장에서 공정한 논쟁을 벌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31:37) 프로메테우스처럼 욥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반역하며 도전을 거는 거인의 모습입니다.
 
5. 욥의 탄원, 영혼불멸의 신앙
정신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안 내내 욥은 하나님의 저 멀리 있음과 감춰져 있음- 얼굴을 가리우시는 하나님(13:24)- 에 의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점차로 뚜렷하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확연하게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것을 보고 인간이 그 심연을 측량해 보려고 애쓰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게 됩니다(9:32-33).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를 완전히 초월합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 초월자, 절대적인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인간존재는 땅에 묶여있는 피조물이며 인간의 본성을 물들이고 있는 죄의 권능아래 붙잡혀 있고(4:17-21, , -16, 25:4-6) 죽음의 지배아래 종속되어 있습니다(, ).
욥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지만 어느 날엔가 어떻게든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감히 소망합니다. 그때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다리가 놓여지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 사이의 모순이 해결될 것입니다. 여기 저기서 그는 중보-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의 판결자(9:33-35) 또는 자기가 죽은 후에라도 자기를 위해 말해 줄 하늘의 증인(-21)- 에 관하여 말합니다. 이것은 헨델의 <메시야>(Messiah)에서 음악으로 된 저 유명한 구절의 의미입니다. 거기에서 욥은 자신의 신원자(Goel)가 자신의 처지를 대변해 주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19:25-27).
장공은 그의 논문 <욥기에 나타난 영혼 불멸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리고 내 양심은 결백하다 그런고로 이 현재의 참상에 대하여 무슨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는 것이 그의 속임 없는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경건
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13:15-16).
만일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결백한 사람을 무고하게 매장해 버릴 이유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욥이 붙잡고 놓지 않는 가장 큰 진리였습니다. 그 신념이 그에게 잠깐이나마 스올에서 부활할 희망도 보게 하였으며(-14), 아벨의 피가 땅을 적셨을 때 하늘에 계신 증인이 이를 변호해 준 이야기를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16:18-19). 심지어 옛 이야기를 싣고 고요히 서 있는 비석에 호소할 생각도 나게 한 것이었습니다(-24).
대체 의인이 곤고할 까닭이 무엇인가, 무고한 피가 땅을 적실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성은 이것을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과 직접 문의 하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 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13:3).
, 그는 하나님과 변론하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그의 문의와 간원, 그의 탐구와 기도는 마침내 그를 피스가의 높은 봉 위에 까지 인도하였고, 거기서 그의 오랜 간구에 대한 확증의 세계를 전망하게 하였으니 곧 욥기 19 25-2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1) 하나님이 반드시 그의 결백한 것을 변호해 주시리라. (2) 그가 틀림없이 그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것이라 하는 두 가지 위대한 신앙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때 어떻게 이것이 성취될 것인가는 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가 참으로 나타내려고 한 것은, 그야 살든지 죽든지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의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며 또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사실 욥은 사후의 영혼불멸에 대하여 똑똑하게 끊어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신앙인으로 음산한 스올을 그는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강렬한 정의감은 이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영혼불멸의 위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의라는 터전에 뿌리를 박고 욥의 결백한 양심에 그 작은 싹을 돋게 하였습니다. 마치 작은 상수리나무 열매가 위대한 장래의 가능성을 품고 가시덤불 속에서 그 조그마한 싹을 돋힌 것 같이.
(이상은 장공의 논문 참조)
 
6. 폭풍우 가운데서 만난 야훼
칸트는 이름다움숭고함(Sublime)의 차이를 공식화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대상의 형태에 대한 개념으로서 한계가 있고 형용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숭고함은 형태화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개념으로서, 형용할 수 없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여 아름다움이 인간이 조절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감정에 있다면, 숭고함은 인간이 조절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하는 감정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이러한 숭고함의 감정을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신비라고 정의하면서, 이것은 신을 만나는 피조물의 근원감정, 누미노제(numinose)의 감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볼 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회오리바람을 타고 나타나는 야훼의 신현은 매우 강력한 숭고함의 장면입니다. 욥의 고소를 받고 폭풍과 함께 등장한 야훼는 거꾸로 욥을 향해 질문하는 것으로 자신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8:2-3).
여기서 허리를 동인다는 말은 씨름의 은유(metaphor)입니다. 대장부가 씨름을 하듯이 한번 싸워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훼는 길고 긴 두 번의 연설(38-41)을 질문의 형태로 시작합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38:4). 그리고 야훼는 첫 번째 연설에서 땅과 하늘과 바다 등의 우주창조에 대한 이야기(38:4-21), 눈과 바람과 비와 강과 사계절 등의 기후에 대한 이야기(38:22-38), 그리고 사자와 염소와 말과 독수리와 같은 동물에 대한 이야기(38:39-39:30)를 하고 있습니다. 요점은 야훼가 우주의 창조자이고 관리자이며 전능 자인데, 피조물에 불과한 욥이 감히 어떻게 야훼와 대적하려고 하느냐의 말입니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 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40:2).
우주 창조의 숭고함 앞에 선 욥은 루돌프 오토의 표현처럼 무섭고 두려운 신비매혹적인 신비 속에 사로잡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껏 당당하게 야훼를 송사하던 욥은 이제 거꾸로 야훼의 숭고함 앞에서 침묵을 지킵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 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입니다
(40:4).
그러나 야훼는 계속해서 욥을 몰아세웁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40:9). 야훼의 말은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보다는 욥을 압도하고 전율케 하는 숭고함 그 자체입니다. 야훼는 그 후에 숭고함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베헤못(40:15-24)과 리워야단(41:1-34)에 대한 두 번째 연설을 감행합니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신화적 동물입니다. 특히 리워야단은 입에서 횃불이 나오고 불똥이 튀며, 콧구멍에서 펑펑 연기가 쏟아지는(41:19-20) 모습에서 용을 연상시키는 신화적 동물이기에 충분합니다.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우주를 운행시키는 초인격적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웨는 숭고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욥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다그칩니다. 그러나 욥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한마디 회개에 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해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3, 4-5).
  여기서 욥은 귀로 들은 야훼와 눈으로 본 야훼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귀로 들은
야훼는 전통과 관습이 전하는 신명기적 인과응보의 신학, 도덕적 질서의 신입니다. 눈으로
본 야훼는 신명기적 인과응보의 신학을 초월하고, 선악이라는 도덕적 질서의 피안에 존재하
는 그런 초인격적 신입니다. 욥기의 이 부분의 말씀은 전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하나님에 관
한 개념에 바탕을 둔 그릇된 관계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가 인격적인
신뢰와 승복의 관계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로 바뀌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7. 새 지평의 신앙
  욥은 이제 자신의 자만의 죄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하나님- 전통적인 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과의 관계에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위기를 당한 사람은
처음은 전통적인 신앙으로 대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형태의 신앙이 형성됩니다.
새로운 신앙은 새로운 현실과의 만남 혹은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신앙입니다.
  욥은 위기의 경험을 통해 새 지평의 삶을 열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체 당하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재형성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항의하면서,
나님을 의심하면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했고 그
의 신앙도 변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단지 개인에게 번영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
주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을 당하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자신의 위대성과 만났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절망과 고난을 겪는 동
안 욥은 자신 안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 생명력은 하나님이 주신
욥의 장엄한 모습, 위대한 자아, 거룩한 영혼입니다. 이것은 새 지평을 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은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는 절망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항의하면서,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나님을 의심하고 반역하며 도전을 거는 거
인의 모습 속에서 이제까지 믿어온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관점에서 인간문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은 고통 속에서 태동되었고 환난 속에서
길러 졌습니다. 신앙의 기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신앙의 결단에 의
해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욥기는 생명은 고난보다 강하다고 일러 줍니다. 생명은 어떤 고난도 뛰어 넘습니다. 욥의
의심, 항의, 좌절, 분노는 생명의 꿈틀거림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비명소리입니다. 생명이 위
협 받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소리가 비명소리입니다. 죽음은 비명소리에 놀라 도망
치고 맙니다. 이것이 생명의 힘, 즉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생명력은 우리 안에 거하시
는 하나님의 숨, 루아흐입니다. 욥기는 위기 속에서 새 지평을 여는 오늘의 삶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참고한 책
1. 버나드 W. 앤더슨. 구약성서이해 (강성열 노한규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2. 장공 김재준 논문선집 욥기에 나타난 영혼불멸관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1  
3. 이경재. 욥과 케보이 대한기독교서회 2009
4. 에리카 슈하르트. 왜 내게 이런 시련이 (강승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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