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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 선 자의 여정과 희망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3-02-14 (목) 08:05 11년전 3140  
길 위에 선 자의 여정과 희망                                                           빌립보서 3: 7- 16
 
사도바울의 일생은 길 위의 선 자로서의 여정에 비유 될 만 합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동분서주 하면서 선교적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거기서 다시 다메섹, 예루살렘으로, 또 안디옥에서 출발한 선교여행으로, 마침내 로마로, 끊임없는 여정의 생을 보냈습니다. 이 지리적 연대기는 갈라디아 1-2장과 사도행전의 자료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선교여행에서 동족의 적대적 대응으로 인하여 죄수로서 로마에 압송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 로마가 그의 여정 마지막 정착지가 되지만 그는 그곳의 감옥에서도 새롭게 길 떠날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당시 세상의 끝이었을 지금의 스페인까지 가고자 원했던 것입니다(15:23).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또 실존적으로 그는 부단히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면모를 보여 줍니다. 과거 그리스도의 핍박 자에서 그 전파 자로, 바리새인과 베냐민 지파의 일원이라는 태생적, 전통적 굴레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토라와 할례의 신봉자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 자로 그는 치열하게 자신의 과거와 싸우면서 현재를 성찰하였고 용감하게 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생의 역동적 면면을 자기 삶의 종점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하늘의 시민권 자로서 본향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여겼습니다. 길 위에 선 자로서 바울은 하늘을 향한 미완의 여정에서 부닥친 역경을 견디고 극복하는 방식이 생생히 드러난 곳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2. 새로 찾은 길, 목표
바울은 한 때 그의 태생의 배경과 그 경계 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특권과 혜택의 조건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라는 좀더 월등한 가치를 위해 그 모든 과거의 자랑거리들을 유익이 아닌 해로 여겼다고 주장합니다(3:7-8). 그리스도를 알고부터 그의 과거를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 자발적으로 폐기 처분하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새로 찾은 길은, 그리스도를 만난 뒤 무엇보다 바리새적 유대교(Pharisaic Judaism)에 대한 헌신적 믿음에 종지부를 찍고, 크리스천 유대교(Christian Judaism)로 바꾸게 됩니다. 동시에 예수는 그리스도나의 주로 그의 믿음 속에 자리매김 되면서(3:8),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통한 개인적 의의 구현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Justification by Faith)는 구원론으로 바꾸어 집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선교 일선에서 얻은 그의 체험을 통해 과거의 율법적인 유산에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그 판단은 토라와 할례, 이스라엘과 유대인 됨의 명예로운 언약적 유산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새 시대, 새 구원사적 삶의 정황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뛰어넘는 새로운 목표를 찾은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의 목적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3:9)은 지금 걷고 있는 길인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미완의 즉 길 위에 선 자의 여정의 목표가 됩니다.
 
3. 고난의 사귐과 부활신앙
빌립보서 그리스도를 앎에서는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비밀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추구라는 목적의식이 나타납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무엇보다 그의 고난을 아는 것, 즉 고난의 극치인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나눔, 교제, 교통이란 의미를 지닌 코이노니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3:10). 그것은 그리스도가 겪은 고난의 결정체에 동참하여 몸소 겪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감각과 정서, 의미의 나눔에 가까운 코이노니아입니다. 그 코이노니아는 죽음의 형태나 방식에 있어 그리스도와 같아짐으로써 비로소 완성됩니다.
예수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을 모셔오시고, 곤궁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형제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 속으로 들어 가십니다. 이러한 예수의 고난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대해 본 회퍼(D. Bonhoeffer)목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정의는 희생자들을 향하십니다. 하나님은 불의와 폭력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공의를 세우십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가해자들의 죄악을 대리하는 속죄를 보았습니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종의 표상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자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4:25).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헌신에 죄의 용서가 놓여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우리의 새로운 의가 놓여 있습니다.
다음, 그의 부활의 권능,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은 케리그마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실질적 촉발 점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공감대가 초기교회의 생성과 발전에 막강한 활력을 주었습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교회 내에 부활의 사실성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의혹과 다채로운 사색이 있었습니다(고전15). 그럼에도 부활신앙은 대대로 그 생명력을 유지하여 그 과학적 사실성을 증명하기 난해한 지금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을 규정하는 주요한 정체성의 표지(identity-maker)로 존속되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의 힘은 개인에게 죽음을 극복하는 힘이 되고 공동체에게는 그 생존을 영속화하고 생활의 활력을 북돋는 소망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그 신비적 요소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나눔이란 주제와 결부될 때 그 신비가 풀리고 의미가 확연해집니다.
 
4. 인내와 희망의 두 증인, 만델라와 몰트만
만델라(Nelson Mandela)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긴 여정>(A Walk to Freedom)에 의하면, 그는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이 언젠가는 기필코 무너질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언젠가는 아파치는 물러나고 전혀 새로운 정의의 세대가 도래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이런 믿음이 그의 현재의 모습을 결정짓고, 그 험하고 긴 감옥생활을 인내하며 희망찬 새 날을 기다리게 한 것입니다.
40대 초반에 수감되어 70대에 접어드는 1만일을 감옥에서 생활하다가 27년 만에 석방된 만델라, 세상과 절단하여 폐인이 되기에 충분한 여건이었으나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절망하지 않고 인종차별주의의 죄악은 정의의 하나님과 세계 양심세력에 의해 무너질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타임>지가 그의 석방을 보도하면서 평했듯이, 이 긴 감옥의 세월은 만델라를 강철같이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고 수난의 민족을 희망으로 이끌어 갈 자질의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감옥은 넬슨 만델라를 강철로 만들었습니다. 그를 죽이려 한 감옥이 오히려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유의 투사로서 1964년 로빈슨 감옥으로 끌려갔고, 앙드레 말로가 말 한대로 세상보기 드문 성숙한 사람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만델라는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더 큰 어떤 숭고한 의미, 즉 좌절과 패배의 참된 의미까지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이 일생을 통해 몸소 깨달은 인간 존엄성과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보복과 미움에 대한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련의 인내가 한 개인이나 세계에 가져다 주는 보화를 만델라는 실증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터득한 인고의 결실로서 고난의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예지를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는 몰트만은 그의 <하나님 체험>(Experience of God)에서 나치 군의 포로로, 또 영국군의 포로로 3년여를 벨기에, 스코틀랜드, 영국 등지에 끌려 다니면서도, 어떻게 다른 동료들과 같이 포기하거나 자결하지 않고 인내하며 희망으로 살아 났는가 하는 자신의 여정을 잘 보여 줍니다. 히틀러 제국이 붕괴되면서 제3제국의 도덕적 부패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많은 독일 나치 군들이 내면적 허탈감에 빠지는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버렸고, 희망이 없기에 삶에 싫증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목숨을 끊었습니다. 바로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 났습니다. 그러나 목숨만은 끊지 않고 새로운 생명의 희망을 갖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인가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성탄절이나 다른 명절에 습관적으로 교회를 나간 것 외엔 전혀 기독교적 배경이 없는 그였기에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전쟁터에 나갈 때 히틀러가 준 것은 괴테의 시집과 니체의 책이었으나 이 책들은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 희망을 준 것은 포로수용소에서 한 군목이 그에게 시편이 달린 신약성경을 준 바로 그 책에 있었습니다.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하나님이 이런 포로수용소에도 계실까 의문을 제기해 보기도 했으나 몰트만은 이 성경을 읽으며 자신의 황폐한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철조망 뒤에, 아니 철조망보다 더 미세한 모든 것의 배후에도 존재하심을 확신 했습니다. 몰트만은 성경을 읽으며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건물을 맴돌았습니다. 그 예배당은 고통 속에서 빛을 밝혀주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 같았으며 그의 희망은 거기서 자랐다고 고백했습니다.
석방되면 양자물리학을 공부하려 계획했으나, 몰트만은 그대신 신학에 입문하여 희망의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이 땅의 인간들이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모순상태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부패에 둘러싸여 있지만, 우주의 회복과 완성을 향한 희망을 안고 살고 있으며, 그 완성의 증거는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부활이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다면, 미래는 현재로 바뀔 수 있습니다. 결국 그의 수용소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이 그의 매일의 경험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류함으로써 현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몰트만은 어느 날 포로수용소에서 해방될 것을 믿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어느 날 완전한 정의로 지배할 미래가 있으리라 믿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미래의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희망 속에서 오늘의 어렵고 절망스런 여건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그 날을 기다리며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몰트만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희망과 희망의 신학은 이런 고난의 처지에서 시작되었으며, 2차 대전 뒤 죄책과 절망에 빠진 독일인에게 만이 아니라 방황하는 세계에 새로운 희망을 주었습니다.
 
5.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한 기도
한 인간으로서 또는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긴 삶의 여정을 끝까지 아름답게 사는 덕목이 인내요, 그 인내는 희망이 받들어 주고, 그 희망은 신앙이 밑 받침 해 준다는 동서고금의 교훈이나 성서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분단 반세기를 넘는 민족적 비극에 대하여 또 다시 물으며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전쟁 당사자인 독일인이나 일본인이 아니라, 그 피해와 억압의 장본인들입니다.  해방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반세기가 넘는 오늘에까지 남북분단으로 통일의 희망이 아니 보이는 까닭을 어찌해야 합니까? 기독교교세가 세계적이요 그 규모나 활동이 세계 제일을 자랑하면서도 분단 반세기를 넘고 있으니 잘못된 점이 너무나 많은 것 아닙니까?
함석헌 옹은 세계의 오물을 뒤집어 쓴 창녀 같은 한반도요, 세상의 온갖 죄악을 다 집결시킨 고난의 여왕 같은 존재라며, 이는 시련의 세계를 구원할 능력을 키우려 하시는 신의 섭리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혹하여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의 한반도의 고난과 아픔을 인류를 구원하려는 예수의 대속의 십자가로 믿고 싶어하나 그만한 의식과 자질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장공 선생님은 지금의 한반도는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면에서 가장 소망적입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양심적인 기독자가 있어, 하나님의 의로운 사랑을 수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여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의 광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목하고 기도할 것은, 올해는 정전협정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최소한의 의미에서, 한국전쟁을 매듭짓고 평화체제의 원년으로 삼기 위하여 평화통일의 예지와 결단, 희생과 용기로 출발할 때입니다.
6. 푯대를 향하여 오직 한 일
푯대의 목표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은 바울에게 이제 남은 과제는 끝까지 그 목표를 향해 오직 한 일, 일심으로 쫓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3:16). 목표와 이상이 있어야 하되, 이를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추구하고 어디까지 왔든지 간에 지속적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적극적 사고나 경쟁심과 열심, 또는 건전한 자존심(a healthy sense of self-esteem)등을 성공의 비결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열심과 열정은 그 정도를 넘어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또 다른 자원을 갖습니다. 어원을 밝히자면 신 안에서(En theos) 즉 우리의 속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때 실로 거기에선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무서운 힘이 생깁니다. 천둥이나 번개불 보다 더 무서운 힘이 폭발합니다. 이런 힘,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그 무엇이나, 죽음까지도 우리를 떼어 놓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 왕의 위협을 물리치고 출애굽을 하였고, 바울이 로마제국이나 유대교의 세력을 극복하며 새 나라, 그리스도 주권의 토대를 놓았고, 루터가 교황청의 중세기 1천 년을 정복하며 새 교회상을 회복하였고, 웨슬레가 대영제국의 국교를 넘어 감리교를 시작했던 모든 힘들이 다 이런 신적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시대와 역사의 흐름을 역류하여 새 역사 새 사명을 위해 오직 한 일로 푯대를 향하는 삶을 본보여준 본보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성자라 불리던 가가와 도요히꼬(1888-1960)는 젊은 20대 초반에 폐결핵의 악화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어느 밤 고요히 성경을 보며 기도하다가 그는 새로운 영감 속에 깨닫습니다. 죽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얼마나 더 보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 빈민굴에 들어가 빈민들을 돕는 일을 시작 했습니다. 죽는 날만 기다리던 그는 죽지도 않고, 그 뒤 50년을 더 살며 일본과 세계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널리 알리며 빛을 남겼습니다. 그의 자서전의 이름이 <사선을 넘어서>입니다. 죽음을 기다리던 그가 그 죽음을 넘어 덤으로 살면서 그리스도의 정신대로 살았던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의, 아니 나의 남은 생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나도 모르는 시한부 인생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금년 한 해 그 시간이 얼마나 남았든, 나는 주어진 하루하루를 이웃과 세상, 교회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쁘게 최선을 다하며 오직 한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때에 나의 영혼과 육체도 건강하고 그 기쁨과 희열은 한없이 넘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여준 삶의 목표를 향해 절대 순종하며 일념으로 살되,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선교를 위해 에큐메닉한 연합운동으로 함께 일한다면 그 효율성은 더 크리라 확신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3:13-14).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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