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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왜 우리를 주목 하느냐

박용래 (대전광역노회,대전장로교회,원로목사) 2013-02-19 (화) 12:07 11년전 2782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3:11-26                                                                        2012.02.05. 박용래 목사
 
오늘 本文은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베드로의 설교 내용입니다.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 이후부터 예루살렘 거리에는 새로운 영적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한 뒤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 다니면서 예루살렘 거리는 더욱 큰 화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심히 놀라기도 했고 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다시는 이런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핍박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솔로몬 행각에 가득 모였을 때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1.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1-12)
성전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치유 받은 사건 후에 나타나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첫째 치유 받은 병인도 감격과 불안이 교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병인이 치유 받은 후에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치유해준 사도들이 떠나가면 효력이 정지되지는 아니할까 위기의식을 가지고 사도들을 주목하고 따라다녔습니다.
둘째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오는 많은 사람들은 치유 받은 앉은뱅이를 구경하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치료되어 건강하게 걸어 다닐 수 있을까 ?
이 불가능한 일을 누가 행할 수 있었을까를 주목하면서 사람들은 사도들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상황은 다르지만 메시야가 탄생했을 때에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주목받았던 일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주목하고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메시아요? 당신은 엘리야요?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사람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세례 요한에게 대한 자신들의 기대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렇소, 내가 바로 약속된 메시아요"라고 말했다면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더욱더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유혹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대답은 "아니라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답변했습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에서 세례요한과 똑같은 설교를 발견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충만해진 베드로는 이미 한 편의 설교로 삼천 명의 회심 자를 낸 초유의 설교자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시기에 불치병인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입니다. 기대에 차서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든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마치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미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큰 이적과 기사들이 많았지 않느냐? 그런데 왜 겨우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으로 기이히 여기느냐는 말씀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살아계신 주님께서 더욱 많은 일들을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사건은 나의 경건과 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확고히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를 나타내려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나타내고 자랑하려고 힘을 씁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은혜가 임하면 자기가 믿음이 좋고 대단한 영력(靈力)이 있어서 이적과 권능을 행하는 것처럼 은근히 자신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떠한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나의 능력과 지혜로 이루어졌음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하는 소영웅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광을 받기를 좋아하도록 유혹해서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사도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진정한 희생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소개하고 만나게 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삶의 방향을 돌이켜서 구원받은 백성들이 되게 할 수 있을까가 사도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하면 내가 세상에서 좀 더 높아 질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가 아닌 내가 높임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발견합니다.
오직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spotlight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 하느냐?는 말은 우리가 아니라 생명의 주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생명의 주를 주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내려고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은혜 받으시고 오직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내고 주님만 주목하면서 주님의 이름만 높이면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 너희가 못 박은 예수그리스도(13-18)
우선 우리는 13-15절 사이에서 {너희가}라는 말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고 있는 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13절에 너희가 ... 넘겨주고, 역시 13절에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절에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15절에 너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지금 솔로몬행각에 모여 있는 이 사람들을 베드로는 바로 {너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강하게 죄를 책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으셨는가를 목격한 사람들이며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설교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죽음과 고난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바! 바라바!" 외쳐 댔던 그들의 잘못된 함성이 바로 자신들의 함성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가장 통렬한 어조로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5절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이같이 하여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재림의 주로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아 라는 친근한 칭호로 호칭을 바꾸면서 그들이 그렇게 영광의 주를 죽이는 일에 동참한 것을 알지 못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이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감싸주거나 이해한다는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들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은 무엇을 하는지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고 그것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18절까지의 설명을 통해서 솔로몬의 행각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왜 죄인들이며 왜 구원받아야 하는 사람들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부터는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 백성들에게 참으로 유쾌한 날이 이르게 될 것이라 설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심판의 왕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으로 주님 앞에 회개하는 자만이 멸망을 받지 아니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와야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속죄하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랜 역사속에 예언해 주신 것을 성취하신 것이고 구원의 길을 세상에 마련하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회개하고 죄 용서함을 받는 자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평강을 얻는 참으로 유쾌한 날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아침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확실히 고백하고 주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구원의 기쁨을 얻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 (19-26)
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유대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므로 모든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무지하고, 마음이 완악하여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참혹하게 죽인 사실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만이 구원받는 길이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희망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죄에 필요한 두 가지 행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은 삶의 방향을 돌이키라는 말입니다. 이말의 의미는 행위를 고치며 삶의 목표를 바꾸라는 뜻입니다. 옛 행위를 버리는 것이 돌이키는 것이요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버림의 의미는 바로 이런것입니다.
이전에 죄를 유발하게 했던 자기의 생각, 사상, 주의, 哲學, 잘못된 관념과 방식을 자신에게서 완전히 떼어 내는 것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버림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거기에는 친구를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정을 끊어 버려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 담배, 음행을 버려야 합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버림과 돌이킨다는 것은 희생을 감수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는 자기의 버림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움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런 버림과 돌이킴이 없이는 회개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회개를 위하여 버려야할 바를 버려야 합니다. 희생이 있어도 회개하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회개하는 길만이 용서받고 구원받아 축복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길을 걸어야 생명의 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길을 걸어야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이 길을 걸어야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이 길을 걸어야 내 잔이 넘치도록 새로운 복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살이 썩어서 떼어 내어도 감각이 없는 세대, 죄의식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윤리, 도덕, 예절, 양심이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에서 돌이키는 회개운동으로 새 역사의 물결을 일으켜야 이 세상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새로운 영적 물결이 출렁거리도록 앞장서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 주님이 우리를 살리고 우리 가정을 살리고 이 땅에 새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모든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해내야 합니다.
이 길에서 다윗이 살아났고
이 길에서 베드로가 살아났고,
이 길에서 Paul이 살아났으며 이 길에서 우리 모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길에서만이 민족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지 않는 기독교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판 그리스도인들은 회개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설교가 웃기고 즐겁게 하는 것만 좋아합니다. 진정한 설교는 회개를 통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설교입니다.
 
회개는 죄를 아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고 버리는 것입니다. 희생이 따릅니다. 아픔이 따릅니다. 버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현대인들은 회개를 설교를 싫어 하는 것입니다. 희생을 싫어하고 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 속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놀라운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죄 없이함을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죄 없이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없이 한다는 말은 씻어 내리다, 지우다, 말 살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파피루스 위에 글을 썼는데, 잉크는 보통 산()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잉크처럼 파피루스를 부식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단지 표면에 살짝 칠해져있었던 것입니다. 거기 써있는 글씨를 지우려면 그저 스폰지로 씻어 내면 깨끗하게 지워졌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죄를 없이 한다는 말은 죄의 흔적조차 없이 지워버린다는 뜻입니다어떻게 하면 그렇습니까? 회개하면 그렇습니다. 이것이 큰 복입니다. 가장 큰 복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의학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사람의 양심 속에 더러워진 죄를 깨끗하게 지워버릴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만이 더러워진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지워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는 용서받아야할 죄인입니다. 내 죄를 회개합니다. 죄에서 돌아서겠습니다. 모든 죄를 버리겠습니다. 어떤 희생이 따른다 해도 아픔이 따른다 해도 죄를 회개하고 돌아서겠습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죄를 씻김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우리의 더러운 죄를 흔적조차 없이 깨끗하게 지워 버리신다는 약속입니다.
세상에 큰 복중에 가장 큰 복인 것입니다.
 
2) 유쾌하게 되는 날이옵니다.
두번째 약속된 복은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19)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쾌하게 되는 날은 휴식과 위안, 원기 회복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언제인가 뉴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뉴욕의 밤거리에 한 젊은이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는데, 무엇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경찰관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는 아버지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당시 뉴욕의 저명한 재벌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경찰은 곧 그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옛날에 그런 아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잊었다며 방탕한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경찰은 전화를 바꿔주어서 아들이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아버지께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 말에 아버지는 "그래, 너를 용서한다. 좀 더 빨리 돌아왔으면 좀더 빨리 용서했을 텐데 왜 이제야 돌아왔느냐"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하고는 절대로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용서란 사람을 자유 케 하며 소망을 줍니다.
 
이오늘 본문에 19절에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 이라는 말씀은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받는 날이 우리는 자유케 되는 날이요 유쾌한 날, 기쁜 날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을 때 모든 불안에서 죄의식에서 해방을 받는 기쁜 날, 참 평강이 넘치는 유쾌한 날이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문에 흐르고 있는 죄의 쓴 뿌리를 뽑아 버리고 우리의 마음에 축복의 통로를 가로 막고 은혜의 통로를 가로막고 기도 응답의 통로를 가로 막고 있는 죄악의 견고한 진을 무터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고 자유를 얻는 날이 바로 유쾌한 날이요 축복의 날이 평강의 날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의 가문에 흐르고 있는 더러운 죄의 상속을 끊어 버리고 우리의 가정에 사탄이 만들어 놓은 죄악의 쓴 뿌리를 뽑아 버리고 사탄이 우리의 마음속에 죄를 버리지 못하게 묶어 놓고 있는 죄의 견고한 진을 파헤져서 무너트림으로 참으로 여러분의 가문에 막혀 있는 축복의 통로가 열려지고 은혜의 통로가 열려지고 기도응답의 통로가 열려지고 세상에서 금은보화로 살수 없는 참으로 인생 최대의 축복이 되는 유쾌한 날 오늘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유쾌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지금 부터는 그 유쾌한 마음을 간직하시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유쾌한 날의 감격을 간직하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성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모두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사탄과 싸워서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의 그날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키고 유쾌한 날에 감격과 기쁨을 간직하고 하늘의 축복의 통로가 되고 은혜의 통로가 되어지는 아름답고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선 것이 사도들이 한 것처럼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청중을 향하여 너희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를 주목하지 말고 생명의 주님을 주목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생명의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서면 죄 사함을 받고 유쾌한 날이 이르게 되어 축복의 통로로 구원의 통로로 은혜의 통로로 기도응답의 통로로 사용되도록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속에 언제나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이뤄져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실망하지도 말고 유혹을 받아 넘어지지도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통하여 변화를 받고 이 땅에 축복의 통로로 살아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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