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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따른 이들, 죽어서도 사는 자들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3-06-05 (수) 19:04 10년전 3408  

그리스도를 따른 이들, 죽어서도 사는 자들           이사야 61:1-2

혜인 국희종 선생 14주기                           히브리서 11:32-40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장이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개관은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설교에 공통적으로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가 하나님을 반대한 이스라엘의 배반의 역사인 반면에, 히브리서 11장은 신앙의 역사입니디. 비록 히브리서 11장이 자연스럽게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 메시지는 미래지향적입니다. 사라와 라합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영웅들은 당대에는 성취되지 않았던 희망을 가지고 살았지만, 지금 그리스도안에서 그 모든 희망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의 인내는 후세에 두고두고 귀감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미래에 그들의 소망의 닻을 내렸던 사람들입니다. 아울러 많은 신앙의 조상들의 명단 뒤에는 지금까지 믿음을 지키기에 충성한 무수한 무명의 성도들의 이름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의 유산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이런 유산을 헐값으로 교역하려는 사람들도 있음은 슬픈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무조건 과거를 상화하거나 조상들의 허물에 대해서 눈을 감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래에 닻을 주는 일을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뒤를 따르는 후손들이 없이는 우리의 믿음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여러 세기를 통한 연대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특권과 동시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죽음과 부활의 신앙에 대한 고찰을 해보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의 삶에 대한 반성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혜인 국희종선생의 14주기를 맞아서, 그의 복흥 지역 의료선교에 대한 조명을 하며 그 신앙의 의미를 가다듬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집니다.  

히브리서 12 1절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11장에서 진술된 구약의 믿음의 위인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이 신앙을 지켰던 대상인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흉탄에 쓰러지기 전날 밤의 그의 일기문이 그의 사후에 발견되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건너다 보았을 때 나는 약속의 땅을 보았다. 우리는 앞서간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며 우리도 언젠가는 들어갈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위로와 힘을 얻어야 합니다.

1. 죽음의 대한 이해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죽음을 육신과 영혼의 분리로 이해했습니다. 육신 안에서 마치 옥살이처럼 마지못해 거주했던 불멸하는 영혼이 죽음으로 해방되어 신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영혼이 죽음으로 육신과 분리된다는 사상을 플라톤한테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신학은 이런 분리를 플라톤과는 다르게 이해했습니다. 신학자 카를 라너(Karl Rahner)는 영적 생명의 원리인 영혼이 죽음으로 육신과 다른 관계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라너에게 죽음은 언제나 두 가지를 뜻합니다. 외부에서 주어진 불행, 곧 단절과 파괴를 뜻하는 한편, 인격적 자기완성, 인간이 자신을 완성에 이르게 하는, 내면에서 우러난 인간의 행동을 뜻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완성은 이기적인 자기를 극복하고 비워서 순수한 사랑을 이룬 것으로 추정됩니다.

2.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신앙 이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세계 속에 오셨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정복할 수 없는 개인 악과 공동체로서 집단 악 등 거대한 심연 같은 죄악, 그리고 그 죄의 열매로서 모든 인간들의 더러움과 부끄러움과 악독을 대신 짊어지고, 그의 몸으로 속죄제물 삼아 십자가에서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죄 없는 인격으로서의 죽음의 짐에 눌리어 하나님으로부터 까지 버림받는 절대고독까지도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티끌만한 원망이나 궤휼도 없이 자기를 죽인 자들에 대한 용서를 빌며 사랑의 화신으로 마감 숨을 내쉬셨습니다. 이것은 만인대속의 죽음으로 표시된 것이었습니다. 이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의 아멘 으로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신약과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제2 이사야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에 비추어 이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의 소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이스라엘인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사람으로 축소된 것입니다. 그의 대속적인 희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스라엘인들이 그의 주변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문이 모든 나라들에 활짝 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며, 그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읽고 오늘 너희들이 들었던 이 말씀이 이루었다.고 선포하시면서 자기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4:16). 이 구절은 이사야 61장이 시작되는 부분인데,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제2 이사야가 기록했고, 예수 당시에는 이것을 고난 받는 종의 노래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무명의 예언자는 제2 이사야(40-55, 기원전 587-538) 말기에 활동한 힘차고 아름다운 문장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유배기간이 상당히 지나 이스라엘 공동체가 정화의 단계를 거친 시기에 살면서, 고통의 의미를 뚫어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자신들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온 세상과 창조세계전체에 확대되리라는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2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곧 우주의 창조주라는 깨달음으로 민족신 신앙을 극복하고 창조의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노래 했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40:28) 그는 자연과 역사를 분리하지 않고, 자연은 역사, 곧 인간 문화에 조건을 부여하기 때문에 치유된 백성은 자연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역사와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영혼의 불멸성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부활, 공동체의 회복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55:12)

이런 제2 이사야의 전통을 발전시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창조된 모든 생명이 구원되기 위해 신음하고 있다는 우주적 비전을 제시했고, 사도신경이 육신의 부활을 공식적으로 받아 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는 나의 부활, 우리의 부활이 우주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음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부활의 구체적인 형태와 장소와 영원성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숨겨져 있는 신비이지만, 사랑의 힘을 신뢰하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지구와 우주를 당신의 생명 안에 영구적으로 안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3. 혜인 국희종선생의 복흥 지역 의료선교의 대요

혜인님의 회고에 따르면, 1960년 9월 8, 그 동안 기도와 준비 끝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복흥에 도착하였습니다. 1961년 여름 기도 중 주의 도우심으로 비탈밭 1,140(지서뒤편)을 사들이고 그 아래쪽 땅을 고르고 헌 목재를 사서 한옥(초가) 4간을 세웠습니다. 완성된 한옥의 절반은 진료실과 숙소, 반은 집회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복흥에서의 전도 활동은 성서집회, 특히 소년, 소녀들의 주일학교 모임은 실로 성황을 이루었고, 집회소는 집회 때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붐볐습니다. 살아계신 주의 영이 강하게 역사해 주신 것으로 여겨집니다.<국희종 선생의 삶과 신앙(1)>

복흥 지역 선교는 주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회상됩니다. 혜인님의 낮은 곳의 사람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하면서 인간 구령의 뜻을 품고 복음을 전도하였습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인간의 생각과 방법만으로 가능했겠습니까? 당시에 내가 목격한 혜인님은 예수님을 뜨겁게 흠모하면서 열정적으로 기도하면서 성서 말씀을 공부해 가신 분이었습니다. 어찌 주의 영, 예수의 영이 역사하지 않았겠습니까? 혜인님은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의료선교와 성서 말씀과 뜨거운 기도와 힘찬 찬송으로 모여 듣는 이들에게 매우 재미있게 호소력 있게 감동적으로 전하셨습니다. 혜인님은 교회사적으로 경건주의자들과 대각성운동의 무디 목사와 생키(Snnkey, 1891)선생의 뜨거운 마음과 감격에 가까운 분이셨습니다. 특히 생키의 찬송 357, 주 믿는 사람 일어나는 즐겨 부르던 찬송입니다. 혜인님의 기록대로 집회 때마다 회당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붐볐습니다. 이는 오순절 성령 역사의 집회 현장이었음을 목격한 대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시 주일학교와 주일에 성서 말씀을 증거했던바, 정말로 성령의 체험을 한 것으로 은혜를 받은 바, 있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의 모임자체였던 것으로 회상되는 것을 감사할 뿐입니다. 당시 기억되는바, 학생들 중에는 김남호사모와 송정숙 권사, 김연숙 김명숙, 임봉기 형제들 여러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혜인님은 결코 소위 성령충만에 취한 소위 성령파나 기복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매우 지성적이고 헌신적인 숨은 성자 형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던 독립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일본의 야나이하라 선생의 <가신>(기쁜소식)과 여러 무교회 <성서연구> 책들 중에 특히 <야나이하라 전집>을 읽어가는 중에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주안에서의 교제가 하나님나라의 교제요,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것인가. 참으로 감탄과 감사가 가슴에 치밀어 오름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러한 계기가 그로 하여금 강직한 독립 전도자의 순례 길을 걷게 했다고 회상됩니다

혜인님이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은 1968 42세 때였습니다. 거기 얽힌 일화들이 있습니다만 잘 극복하시고 모범적 가장이며 그래도 훌륭한 가정을 이룩하심에 본보여 주었습니다. 김남호 사모와 함께 결혼 30년이 되고 신동, 신영, 신욱, 신철을 다 고등교육을 시켜 가정을 이루게 하였고 전 가족이 신앙을 계승해 가리라고 믿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혜인님은 50대 중반에 광주로 나오시게 되었는데 이에는 자녀교육도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작용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1998 7 17 제헌절, 복흥 모임에 젊었을 때부터 관계를 지니고 있던 형제자매가 약 30여명 모여 나와서 참으로 반가운 한때를 보냈습니다. 그때 혜인님은 유언으로 나는 이제 언제 부르심을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주 예수님께로 가면 그곳에서 여러분을 지켜보면서 기도할 것입니다. 주의 재림이 날로 가까워 오고 있는 시대에 사단의 공격도 거세니까 신앙에 굳게 서서 영의 싸움에 임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말씀 그리고 사랑) 오늘 여기 모임에 수고를 많이한 박동래 선생을 비롯한 여러 형제 자매들이 다 그 당시의 증인들입니다.

더 추가하여 가맛골 평심원(370여 정보) 이야기를 하면서1961년부터 가맛골 깊은 계곡 숲속에 잡목으로 집을 지었던 일, 평심원을 명명하고 그 현판을 써주신 한국신학대학장 장공 김재준 목사를 언급하고, 또 광주 제중병원 중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숨은 봉사를 하며 그리스도를 전하신 전도 어머니 김정숙전도사을 잊을 수 없음을 언급합니다. 주식이며 부식을 등에 메고 산을 넘어 다니면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도우셨습니다.(말씀 그리고 사랑) 김정숙 전도 어머니는 알고 보니 나의 고향 부안읍 교회 김수현 목사 사모이셨습니다. 나는 한 때 그분의 정성된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회상합니다.

  이 부분에서 내게 대한 신앙과 목회와 신학순례도 언급하시며 혜인님은 무교회이지만 이상의 언급하신 교회에 계시는 분들을 냉한 시 한적은 없고, 오히려 존경으로 대하고 그러한 형제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 주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모두 나의 혈맹이자 참된 친구이며 형제로 알고 있다고 운운 합니다. (말씀 그리고 사랑)         

4.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역사이해

우리들은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신, 피안과 차안, 삶과 죽음, 신과 인간, 그리고 성역과 세속, 등등 일체의 인간사와 세상사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전자를 긍정시하고, 후자를 부정시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전형적인 이분법적 이원론자로 살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원론적 실재관과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양자를 구별하되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고귀한 실재로 간주하면서 양극으로 분리시키지 않고 통합하여 조화와 균형을 도모하려는 통전적 실재관을 형성해야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에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죽어 입장할 거라고 믿어진 피안세계에서가 아니라 그때 거기서 현존하는 나라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영원이 관건이 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피안세계가 아닌 그때 거기 현세에서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신 사실입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다른 추종자들과 함께 친교를 맺으며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현세적 삶이 바로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실현하는 삶이라는 믿음이 우리 마음에도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현세에서 모든 사람과,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약자들과 친교를 맺고 저들을 새 삶으로 이끌 때마다 그때 거기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서 사는 동안 진정 예수를 본받아 따르는 삶을 신실하게 살게 될 때 여기서 지금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고, 그 정도만큼 새 하늘과 새 땅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도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는 말씀대로, 우리는 육신부활을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가 상호 일치의 유대를 맺는 가운데 완성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 부활을 통한 인류와 세상의 완성이란 차안 세계로부터 피안 세계로의 귀환이 아니라 인류와 세계가 질적으로 새로운 충만함에로 이르게 됨을 뜻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5. 마감하면서, 우리의 그리스도 신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우리가 현실적으로 번민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바,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부활신앙이 21세기에 접어 들면서 인류와 우주만물이 처한 냉엄한 실제상황을 바르게 대처해나가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들인 서구 열강이15세기 이래 세계도처에서 방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면서 무자비한 인명 살상과 인권유린, 재화 약탈과 자연파괴 행위를 자행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식민통치는 다른 모습의 경제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획책했으며, 1990년대 냉전 해체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시장질서를 구축하면서부터 소위 20:80으로 불리는 부의 편재 구조가 날로 심화되어 오늘날에는 양극화 현상이 극에 달한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오늘날의 부조리한 세계질서 안에서 강자이자 부자 집단의 종교라는 엄연한 현실과 가난한 예수 따름을 통한 십자가의 구원, 부활신앙이 어떻게 화해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태계 파괴가 지속됨으로써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삶의 터전이 훼손 당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심각하게 위협당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이 진정한 해답으로 과연 신빙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또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냉엄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초탈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초월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적 해답일 수 있는가를 자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죽어서도 사는 자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사명을 사는 자들은 죽어서도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여러 세기를 통한 연대성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증인된 감격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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