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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살기 위하여

김승환 (강원노회,생명,목사) 2013-06-10 (월) 13:26 10년전 3686  
천국을 살기 위하여
(창 32:22-32, 머 13:44-52)
 
천국을 흔히 하늘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천당, 하늘에 있는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천국)은...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셨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마 5:3)이라고 하셨으며,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 13:31)라고 하였습니다. 그 어떤 말씀도 “지금 여기”(now and here)에서의 삶과 무관하게, 우주공간 어디엔가 떠있는 나라, 혹은 집이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들어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어떤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것, 그 설레임과 고뇌와 용단과 그로 말미암은 기쁨의 전 과정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과정에 왜 설레임만이 아니라 고뇌와 용단이 수반됩니까?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도 귀하고 아깝지만, 더 귀하고 본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 귀하고 아까운 것을 기회비용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지불하고 선택을 하면 그 소중한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 값을 너무 아까워하여 선택을 포기하면 결코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쉽게 풀어서 옮길 수 있겠습니다. “정성껏 살어. 숙제는 꼭 하는 습관 들이고. 힘들어도 그걸 해내면 천국을 살게 될 거야.”
 
야곱 얘기를 해봅시다. 창세기 본문에서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여종, 그리고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나루를 건넙니다.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습니다.(22-24절) 그 유명한 ‘얍복나루터의 씨름’ 이야기 배경인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소설을 읽다 보면 처음 몇 장만 읽어도 느낌이 있고, 가수의 노래를 들어도 그렇습니다. 조용필 노래를 들을 때 다르고, 이미자 노래를 들을 때 다르며, 임재범 노래를 들을 때 다르고, 소녀시대 노래를 들을 때 다릅니다. 자, 이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를 읽을 때 어떤 느낌, 어떤 인상이 드십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야곱, 참 열심히 살았구나”, 싶습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22-23). 최소한 처자식은 확실하게 건사하지 않습니까? 돈도 제법 벌었고, 여러 종들, 말하자면 직원을 여럿 거느리는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입니다. 한 인간을 평가할 때 이 정도면 “됐다. 합격”, 도장을 찍어줄만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것이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살아보니까 알겠습니다. 솔직히 자기 한 몸 건사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게 인생입니다. 한 남자로서 한 여자의 남편 노릇 하는 것도 가벼운 게 아니고, 내가 낳은 자식들 건사하는 건 쉽습니까? 그런데 보세요. 야곱은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건사하고 있습니다. 두 아내와 두 여종이라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러 여자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거기서 여러 자식들이 태어났는데, 그중 한 명도 버리지 않았어요. 요즘 얼결에 자식 낳아놓고 무책임하게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또 직원 거느리고 재물 관리하는 일은 쉽습니까? 매순간, 열심히 일해야 가능합니다. 머리를 쓰고, 정성을 기울이고, 사랑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성실이 축적되어야 어느 만큼의 성취라도 가능한 게 인생입니다. 그걸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고,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야곱의 부지런함을 나름대로 배워서 우리 모두 어느 만큼의 성공을 이루기를 사모해야 할 줄로 압니다. 공자도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말을 했지만, 우리가 최소한 자기 한 몸은 건사해야 하고, 더 나아가 자기 가정, 자기가 벌여놓은 일은 어떻게든 잘 갈무리하여 최소한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하고, 나 때문에 더 좋아졌다, “당신 때문에 힘이 납니다”, 뭐 이런 소리는 듣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까지는 오늘 이야기의 배경일 뿐이고, 본론은 아직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24절에서 우리는 야곱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이 정도면 웬만큼 됐는데, 왜, 무슨 이유로 야곱은 자기 식솔들을 다 건너가게 하고 홀로 남았을까요? 자기 인생의 숙제가 뭔가를 아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만큼 세상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 이룰 만큼 이루어보았기에 도리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더 배우기 원하는 사람, 이제는 세상적 성취를 넘어서서 도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움켜쥐고 살아왔는가, 그게 전부가 아니라면 다른 뭐가 있는가? 넘어서, 넘어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또 그것을 넘어서, 더 이상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답을 얻기 위해 깊은 밤 홀로 남아 기도자리에 서는 영의 사람, 그가 바로 야곱이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매 단계마다 쉽지 않은 숙제를 감당하면서 성장하는거지만, 지금 이 순간 야곱에게 떨어진 숙제야말로 어렵고도 두려운 숙제였습니다. 어쩌면 그건 그 동안 자신이 이루어온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정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건 죽을 각오 없이는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그 어렵고도 두려운 자리에 이제는 설 수밖에 없다는 걸 야곱은 압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직 홀로, 그 자리에 서는데,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봅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변화인데, 신비하게도 누군가 나타나 그의 씨름상대가 되어준 것입니다. 기도의 신비입니다. 아무리 벅차고 힘들어도 이건 내가 피할 수 없다, 붙어보자,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무릎을 꿇는 순간, 어디선가 수호천사 같은 존재가 나타나 그 기도를 돕기 시작하는데, 바로 하나님의 응답의 손길이지요. 그래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고 말씀하신 줄 압니다. 그렇게 응답을 준비한 채로 씨름상대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야곱은 온 힘을 다해 씨름을 합니다. 밀고, 당기고, 기를 쓰고, 몸이 부서지도록,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아.....! 그 결과는 무엇이었지요? 축복! 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아냈다는 사실보다, 저는 이 부분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는데, 하나님과 묻고 대답하는 경지, 본질을 놓고 하나님을 상대(相對)하는 경지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30) 얼마나 아름다운 영적 성숙이요, 얼마나 소중한 간증입니까? 그때의 씨름이 얼마나 처절하였는지, 이때 야곱은 환도뼈가 어긋나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대가가 얼마나 황홀한 것이었는지를 31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브니엘의 아침햇살, 그 찬란한 광채!
 
참으로 멋진 인생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멋진 인생, 이 찬란한 인생을 살도록 지음받은 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인 줄 믿습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 그분의 입김으로 생령이 된 존재, 그의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받고 새롭게 그의 자녀가 된 존재, 그의 말씀과 성령을 받아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 감이라”(요 14:12)는 가슴 벅찬 꿈을 유업으로 받은 거룩한 존재, 무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가능성입니다. 그러므로 굳게 믿고, 용감하게, 끈질기게 도전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조급해하지도 말고, Challenge and response!, 그때 그때 주어진 숙제를 무한축복 무한영광으로 알고 해내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언간에 그 자신이 대안(alternative)이 되고 대책(solution)이 되고 새로운 세상이 됩니다. A. 링컨이 말하기를, “나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지요. 해야 할 숙제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의 얼굴은 확실히 다릅니다. 10년 20년 30년 꾸준히 숙제를 해내서 한걸음 한걸음 성장한 사람과 번번히 그 기회를 흘려버리고 적당히 요령피우면서 남에게 기대면서 그저 편한 자리에서 안주하며 살아온 사람의 얼굴은 달라도 엄청 다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찬란한 광채가 있지만, 다른 한 사람의 얼굴에는 침침한 어둠이, 비겁이, 꾸리꾸리한 냄새가,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두 가지 뜻깊은 날을 기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교회의 창립기념일이고, 다른 하나는 총회선교주일입니다. 먼저, 그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역사 속에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한량없이 감사합니다. 그러나 뜻깊은 날에 비해서 오늘 우리의 형편과 처지가 그다지 만족스럽지만은 않아서 송구스러운 마음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서 자기 처자식들을 잘 건사하고 모든 소유와 함께 건너보내는 야곱처럼, 지금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어느 만큼은 성장해서, 우리 스스로도 뿌듯하고 떳떳하게 여길 만큼은 됐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하나님 앞에서, 별로 안 그런 것 같거든요. 세월은 흐르는데...우리가 감당해야 할 숙제는 점점 쌓여만 가는데....“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음성은 더욱 더 가슴 속으로 파고들고....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잠 못 이루고 뒤척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긴 말 하지 않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우리 모두 더 성실하십시다. 나의 작음과 한계를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며 오늘 내가 감당해야 할 공부, 내가 감당해야 할기도, 내가 감당해야 할 헌신, 내가 감당해야 할 희생, 요컨대 내 몫의 숙제를 소홀히하지 맙시다. 떳떳하고 찬란한 기쁨이냐 침침하고 꾸리꾸리한 부끄러움이냐? 하루하루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부디, 하루하루 후회없는 선택으로 지금 여기 나의 삶 속에서 천국을 사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13.6.9. (원주) 생명교회 주일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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