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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 / 궁극적 관심 Ultimate Concern 5) Fourth Dialogue 네번째 대화 (원문/번역)

이준원 (충북노회,우암교회,목사) 2013-11-01 (금) 09:10 9년전 6746  
Ultimate Concern - Tillich in Dialogue by D. Mackenzie Brown
 
 
Fourth Dialogue
네 째 대화

 
Professor: Our topic is socialism as a quasi-religion. Since we have no questions or comments from any of you as yet on the work of the last session, we may proceed with this subject as prepared for today.
교수 : 오늘 우리의 주제는 유사 종교로서의 사회주의입니다. 여러분이 지난 시간의 대화에 관하여 어떤 질문이나 코멘트가 없기 때문에 예정대로 오늘의 주제를 다루어 보십시다.
 
Can Socialism Replace Christianity?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가?
 
Student: The first question for our consideration is: "Do Communism and socialism meet the needs of modern man to such an extent that Christianity in its organized form has become obsolete?" This question is directed to everyone. And any impressions that you now have would be appreciated.
 
학생 : 우리가 생각해 볼 첫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제도화된 기독교가 폐물이 될 정도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현대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여러분 전체에게 던져진 것이므로 어떠한 소감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Student: Well, it seems to me, from the discussions we’ve had before with Dr. Tillich, that this "ultimate concern" is so universal that no one can avoid it now or will ever be able to avoid it. When it is misdirected toward some sort of finite vocation or finite end and like Communism or socialism, the lack of true ultimacy must sooner or later become apparent because finite ends eventually reveal their own limitations. In this way, I do not think Christianity or other religions proper can be considered obsolete. We can say that Communism and socialism or even capitalism will serve for a while as quasi-religions, but in the end they cannot satisfy the highest aspirations of humanity.
 
학생 : 틸리히 박사님과 나눈 토의를 참고해 본다면, 궁극적 관심이란 너무도 보편적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회피할 재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궁극적 관심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유한한 사명과 목적에로 잘못 방향 지어질 때 진정한 궁극성의 빈곤이 조만간에 현저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그 까닭은 유한한 목적들은 결국 자체의 제한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나 다른 기성 종교들이 폐물로 사료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혹은 자본주의마저도 당분간 유사 종교로서 행사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종당에는 그들이 인간성의 최고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Student: I think that the element lacking is the spiritual element. Communism and socialism are not rooted in the spiritual at all. They deny it, as a matter of fact. As Dr. Tillich says, the basic thing in man — in everyone — is the spiritual, which is lacking in socialism and Communism.
학생 : 저는 빈곤한 요인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전혀 정신적인 것에 뿌리 박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사실상 부정합니다. 틸리히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사실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Student: You are looking at it from your own point of view. If you had ever talked to a socialist who was really involved in the thing, you would realize that a hard-core socialist actually believes he has the answers for himself and others. You’re looking at it from the outside.
학생 : 당신은 너무 주관적인 입장에서 사회주의를 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당신이 문제 속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사회주의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면, 철저한 사회주의자는 자기 자신이나 달른 사람들을 위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고 실제로 믿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당신은 너무도 그것을 관망만 하고 있습니다.
 
Student: Well, socialism does have the same eschatological — such a funny word, I like the sound of it — hope that Christianity does: the belief that eventually, in the future, at some point in time, God — or a new way, a new state of things — will break into history. Christianity and Communism both talk about a point in time when history will be changed.
 학생 : 그런데 사회주의는 기독교와 동일한 종말론적(참으로 이상스러운 낱말인데 그 어감이 그럴 듯합니다.) 희망을 소유합니다. 그것은 곧 결국 미래 시간의 어떤 계기에 이르러서 신(또는 새 길, 사물의 새로운 상태)이 역사 속으로 돌입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공교롭게도 역사의 전환기에 있어서 시간의 한 초점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Student: We are overlooking the greatest appeal of the Communist and socialist ideologies, the promise in these theories of a heaven on earth. They promise an earthly paradise. I think this is the main reason Christianity declined in the nineteenth century. People were oppressed, and there was nothing in the future except death. After death, perhaps, they would find paradise and perhaps not. Socialism promises something tangible here on earth that would be better than that.
학생 : 우리는 지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들이 풍기는 절대적인 매력 곧 지상의 천국에 대한 약소글 묵과하고 있는 성 싶습니다. 그들은 지상의 낙원을 약속합니다. 19세기에 기독교가 쇠퇴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백성들은 억압을 당하였고 미래에는 죽음 밖에는 아무것도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혹시 죽은 후에 저들은 낙원을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죽음 이후의 낙원보다 월등한, 이 땅 위에서의 구체적인 것을 약속하여 주었습니다.
 
Student: I read a book called The Naked God by Howard Fast, who has written a number of books – Citizen Tom Paine and others that are reasonably well known in America. He was an intellectual who went into the movement about 1943 and was completely captivated by it. He was gripped by the humanistic aspects and thought he was doing good for other people. He feels that most people in America that go into the Communist party are good, wholesome, well-meaning people who think it is a good movement that will help others. He soon learned that the leaders had no respect whatsoever for individuals except in so far as they brought in money, went out and worked, and completely put themselves at the disposal of the movement. The point I finally got out of the book was the fact that no utopia has ever worked completely. And eventually people — even the peasants in Russia who think they are going to see Heaven on earth — will see that it is not coming. No one has ever worked out a way whereby people really can rule themselves as a perfect utopia. I believe they will lose faith in socialism and Communism just as they did in Christianity. Perhaps then they will be reawakened to the fact that they need something that Christianity or the other organized religions can supply, which socialism cannot supply. It never has and apparently never will. History has proved that it doesn’t work.
 
학생 : 저는 미국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시민 톰 페인’(citizen tom paine)과 그 밖의 여러 책들을 저술한 하워드 패스트(Howard fast)나체의 신’(The Naked God)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1943년 경에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힌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을 행하고 있다는 인본주의적인 국면과 사상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공산당에 가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량하고 건전하며 선의적인 동시에 그것은 남을 돕는 훌륭한 운동으로 생각한다고 그는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당원들이 돈을 바치거나 나아가 일하며 그 운동을 위해 자기들 전체를 희생하지 않는 한 어떠한 개인들도 존경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책에서 마지막으로 찾아낸 초점은 유토피아는 건설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에 가서는 지상천국을 보리라고 믿는 소련의 농부들마저도 그것이 오지 않음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완전한 유토피아를 위해 자기 자신들을 사실상 지배할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은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도 잃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모르기는 하나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기독교나 그 밖의 조직화된 종교가 공급해 줄 수는 있어도 사회주의가 공급해 줄 수 없는 요소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유토피아는 현재나 미래에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였습니다.
 
Student: I think that a reawakening in Christianity is apparent, at least in its organized forms as we see it today. But I think there is a very great need to rediscover our symbols and what they mean. And the Christianity of today does not seem to be fulfilling this need. As Dr. Tillich says, these symbols may not be dead or useless, but they do need to be revitalized.
학생 :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기독교가 조직된 형태에 잇어서나마 새롭게 각성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사실이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절실한 요구는 우리의 상징과 그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기독교는 이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성싶습니다. 틸리히 박사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상징들이 사멸되었거나 무용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생명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Student: You made the remark a while ago that, because Communism or socialism are concerned with the finite, they cannot meet man’s need for confrontation with ultimate concern. Now I am confused about this "being concerned ultimately," which some socialists and Communists certainly are. They may not have "ultimate concern" as we see it, but their finite concern is ultimate at the moment, at a given moment in time.
Does religion mean that we are "ultimately concerned," or does it mean that we are concerned with something "ultimate"? This is not clear to me. For if it means that we are ultimately concerned, then Communism and socialism are just as religious as anything else. Could you throw some light on that, sir?
 
학생 : 당신은 조금 전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유한한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궁극적 관심과 접촉하려는 인간의 요구에 응해 주지 못한다고 논평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궁극적으로 관심되어 있다는 문제에 대하여 혼돈을 느낍니다. 그것은 어떤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은 분명히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궁극적 관심은 없을지 몰라도, 그들의 유한한 관심이 어떤 주어진 순간에는 궁극적인 것입니다.
종교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궁극적인어떤 것에 관심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저에게는 분명치 않습니다. 만일 종교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된 것을 뜻한다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어느 무엇에 못지 않게 종교적입니다. 박사님, 이 문제에 대하여 해명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Dr. Tillich: I am very grateful for your question. I think that you have come to the point of the problem. There are innumerable ultimate concerns which are concerned with the ultimate. And the whole question is: What is the ultimate? When we criticize particular forms of Christianity — Roman Catholic absolutism for example, or Protestant dogmatic fanaticism — we deny that the ultimate is really involved in these forms. Here, exactly the same thing occurs as in socialism and nationalism, or what have you, namely, that particular expressions of ultimate concern become confused with that toward which they point: the ultimate. And in this sense religion and quasi-religion share the same distortion. Perhaps I will not say more at this moment, because this is your discussion.
틸리히 : 학생의 질문에 대하여 먼저 고맙게 생각합니다. 학생은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였습니다.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둔 궁극적 관심은 무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곧 무엇이 궁극적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 카톨릭의 절대주의나 개신교의 교리적 광신주의와 같은 기독교의 특수한 형태들을 비판할 때 그 형태들 속에 궁극적인 것이 참으로 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이와 동일한 사실이 사회주의나 국가주의에서도 야기되며 따라서 궁극적 관심의 특수한 표현들과 그것들이 지적하는 궁극적인 것과의 혼동이 일어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와 유사 종교는 동일한 왜곡을 지녔다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의 토의 시간이니만큼 이 이상 말씀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Student: We talk about religions being obsolete. Let me pose this question. Here is Christianity, which as a religion has obviously been misunderstood for approximately nineteen hundred years. Does this not reflect on the wisdom and authority of its founder? Wouldn’t you think that a man who is the Son of God — or whatever you believe, part of God, part of the Trinity — wouldn’t you think that, when he came to earth, he would organize this religion in a way that would make it clearer to those who were to follow it?
학생 : 우리는 종교들이 폐물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한 마디 하고자 합니다.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근 1900년 동안 분명히 잘못 이해되어 왔습니다. 기독교는 그 창시자의 지혜와 권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신의 아들(또는 신의 일부분이나 삼위일체의 일부분)인 인간이 세상에 와서 추종자들에게 보다 선명한 방법으로 종교를 조직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까?
 
Student: If Christ had done something like this, when he came, it seems to me he would have been denying the humanity in man. This is the very essence of the meaning of Christ — that we are human but are seeking this new being which we can find in Christ. And being human, we are inevitably led into error and distortion, but have the possibility through Christ of overcoming it. If this element of error had not remained, the meaning of the symbol of Christ would be gone.
Student: But Jesus, as the symbol of the cross, retained the principle of self-denial and self-criticism, so lacking in Communism and so necessary in true religion.
학생 : 만일 그리스도가 와서 그런 일을 하였다면, 그는 인간성을 부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본래적 의미는 곧 우리가 인간이지만 그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인간이기 때문에 오류와 왜곡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것을 극복할 가능성을 얻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오류의 요소가 없다면, 그리스도라는 상징의 의미는 사라질 것입니다.
 
Self-Criticism in Christianity and Communism
기독교와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자기 비판
 
Professor: Should we really agree on the statement that the quasi-religions do not have self-criticism and self-sacrifice? We have many examples of the self-sacrifice of Communists and other extremists, for what is to them an ultimate concern. And we have examples of self-criticism within the party. Their confessions, for instance, may seem a travesty of justice in our eyes, but they do represent a form of self-criticism and sacrifice.
교수 : 유사 종교에는 자기 비판과 자기 희생이 없다는 논조에는 우리는 참으로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 공산주의자들과 그 밖의 과격주의자들이 그들에게 궁극적 관심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실례가 얼마든지 많습니다. 또한 공산당 안에서도 자기 비판을 단행한 실례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의 고백들이 우스운 연극 같지만, 그들은 자기 비판과 희생의 형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Student: But does that really have any effect on Communism? It doesn’t seem to have any effect, whereas the self-criticism within Christianity over the centuries has had some profound effects.
학생 : 그러나 자기 비판이 참으로 공산주의에 어떤 영향을 기칩니까? 그것이 공산주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반면에 수 세기에 걸쳐 기독교에서 행해진 자기 비판은 막중한 영향을 던졌다고 봅니다.
 
Student: Would not the dialectical materialism that is at the heart of Communism cause Communism continually to re-evaluate itself, to judge whether the means it was using to bring about its ends, or even the ends themselves, might be questionable?
학생 : 공산주의의 핵심인 변증법적 유물주의가 공산주의 자체를 계속적으로 재평가하도록 자극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공산주의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용하는 수단들이나 목적들 자체마저도 어떤 문제가 없는가 비판해 본다는 말입니다.
 
Student: Well, in my reading I found exactly the opposite. The point is that Communism is supposedly never wrong. And it is this lack of self-critical idealism that makes it so difficult. Lenin stated that the Marxian doctrine is omnipotent because it is true. That is all he said about it. It is not re-evaluated, although Stalin and Lenin manipulated the doctrine to such an extent that it changed considerably. But the basic idea is that it is true and should not be disturbed. The element of self-criticism, at least according to my reading, just does not exist.
학생 : 저는 책에서 그것과 정반대의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요점만 말씀 드리면, 공산주의는 절대로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의 문제점은 자기 비판적인 이상주의가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레닌은 말하기를 마르크스의 이론은 진리이기 때문에 전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레닌이 그 이론에 대하여 말한 전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스탈린과 레닌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재평가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리이므로 저지되어서는 안된다는 근본 정신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바에 의하면, 자기 비판의 요소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Student: If there is criticism, it seems to be concerned more with deviations from the Marxist line than with really getting at the truth. They do say to themselves, "Criticize," but then the response is, "Well, we’ve deviated from the Marxist line. Let’s look at what Marx said." And they do what they can to get back on that line. But they do not question the correctness of the road or line.
학생 : 만일 누가 비판한다면, 그것이 참으로 진리에 접근하려는 노력이라기 보다는 마르크스의 노선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하는 성싶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비판하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그 다음의 반응은 그런데 우리가 마르크스의 노선에서 이탈하였으니 그가 말한 사실로 돌아가 봅시아.”는 것입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노선에 복귀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씁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노선을 시정하는 것에 대하여는 묻지 않습니다.
 
Professor: I think you are absolutely right. The dialectic process seems to stop, once the basic ideology has emerged as a new truth. Is this not also true in Christianity? The Christian also judges himself in terms of the Christian ultimate, does he not? He does not go back and question the basic premises of the Gospels.
교수 : 학생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인 이념이 새로운 진리로 부각되는 때에 변증법적 발전은 정지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기독교인도 기독교의 궁극적인 것을 표준 삼아 자기 자신을 판단합니다. 그는 복음서의 기본 전제들에게 다시 돌아가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Student: I don’t quite understand your comparison of Christianity with Communism. Do you mean that Christians don’t question the basic premises of their religion?
학생 : 저는 선생님께서 기독교를 공산주의에 비교하시는 데 이해가 전혀 가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종교의 기본 전제들을 묻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Professor: They may question their own understanding of it, or a particular expression of it; but the basic idea they could hardly question and still remain Christian.
 교수 :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자기 자신들의 이해나 그 종교의 특수한 표현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본 개념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자처하는 것이지요.
 
Student: And so they may stop questioning at a certain point?
학생 : 그래서 그들은 결국 어떤 점에 와서는 질문을 멈춘다는 말씀입니까?
Professor: Yes, as with your Communists.
교수 : , 공산주의자들처럼 말입니다.
 
Student: Dr. Tillich, can you give us an idea of what your feeling is about this self-critical element and Communism?
학생 : 틸리히 박사님, 공산주의와 자기 비판적 요소에 대한 소감을 잠깐 들려 주시겠습니까?
 
Dr. Tillich: When I discussed Communism as a quasi-religion, I included several stages of socialism that finally led to Communism. The early, battling stages had all the elements of the Old Testament religion, the prophetic form. But the founders of Communism set up no principle of self-criticism inherent in the structure itself, no principle by which the collective or the party or the representatives of the party could criticize itself or themselves. We recognized this fact during the years when I was able to follow the development of socialism — first into Communism and then from Communism into the state of things we have now, which is a kind of radical totalitarian state capitalism. These different stages must be distinguished. In the earlier stages the religious character was clearly present.
As for the problem of self-sacrifice or self-criticism, the individual’s self-sacrifice manifests itself in every religion and quasi-religion. It existed even in Nazism. And we cannot deny it to Fascism; this is simply an historical fact. But in Christianity, in the symbol of the cross, there is the fundamental revelation that he who was supposed to bring the new aeon, the new reality, the new being, the eschatological fulfillment, the Kingdom of God — all this — in order to achieve it had to sacrifice himself, in his individual character, as a bearer of the ultimate. I have expressed this idea in paradoxical terms which have often been misunderstood but to which I nonetheless adhere: Jesus sacrificed himself as Jesus to himself as the Christ. It is by this intricate form that I believe we have to interpret the symbol of the cross. Now the consequence of this concept is that Christianity, in principle, can never accept one of its actualized forms as the final form. And whenever it does so, it deviates from the fundamental understanding of the cross.
I have often been questioned about this and have referred to the conflict between Jesus and his disciples, where the fundamental form of the problem is revealed. The disciples wanted to make him the Messiah. I think this is what distinguished him from the other Messiahs who appeared in the same period, but who could not succeed because they were political revolutionaries in a situation where the political revolution of a comparatively small town in the Roman Empire was a heroic and ridiculous thing, and involved the ruin of the nation concerned. Therefore, Jesus’ role as the Messiah closely follows the prophecy of Isaiah. [53:5]1 He was able to connect his mission with that of Isaiah’s bringer of the new reality. This I believe was the tremendous deed, the real act of the divine spirit in him and through him. As for the mythology concerning the third person of the Trinity coming down from heaven — forget all about it! Look instead at the real image we have in the New Testament, especially in the synoptic Gospels, and then as interpreted in the Fourth Gospel, where this whole situation is so clearly revealed that it can be applied to all our problems.
Now about socialism and Communism, my feeling is that an adequate criterion for judgment is inherent in neither. This lack has one consequence, for example, which I can report to you simply from my own continuous experience in Germany. They did not produce spiritually prominent or outstanding personalities. In its heroic, ecstatic beginnings, the German social democracy produced personalities who felt a real ultimate concern. Later, the leaders became advanced functionaries. They ceased to be people like the early workers, full of spirit, like Marx himself and others even before him in the period of utopian socialism.
An economic movement in itself, or a political party in itself, is not an ultimate, although it can be the bearer of an ultimate. But if it is considered to be an ultimate in itself, then the life and development of personalities is sacrificed, which was the tragedy of the German Social Democratic Party. They had no leaders of real spiritual power; I knew almost all of them at the time Hitler came. This structure has not essentially changed in Communism. The party in itself is beyond criticism, although the party is an empirical reality and led by people like Stalin. The result is a phenomenon which makes itself absolute and reveals some trait in common with Nazism: political aggressiveness against everything non-Communist, and at the same time an internal lack of spiritual experience and leadership.
 
틸리히 : 내가 유사 종교로서의 공산주의를 논할 때 종국적으로 공산주의에 귀착한 사회주의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초기의 투쟁적 단계는 구약 종교 곧 예언자적 형태의 요소 전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창시자들은 그 구조에 고유한 자기 비판의 원칙을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집단이나 당이나 당의 대표들이 당과 자신들을 비판할 수 있는 원칙을 수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사회주의의 발전 곧 공산주의에서 오늘의 공산주의 형태인 급진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국가 자본주의에로 발전하는 양상을 관찰할 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상이한 단계들을 구별해야 합니다.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분명히 종교적 성격이 있었습니다.
자기 희생이나 자기 비판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기 희생은 모든 종교와 유사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나치즘에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국수주의에도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곧 십자가의 상징에는 근본적인 계시가 깃들이어 있습니다.
즉 새 시대, 새 실재, 새 존재, 종말론적 성취, 하나님의 나라 등을 가지고 오리라던 그가 이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궁극적인 것의 지참자인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만 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상을 역설적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오해도 자주 받아 왔지만, 나는 아직도 그 역설적인 표현을 고수합니다. 즉 예수는 예수인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 자기 자신을 위하여 희생하였다는 말입니다.(Jesus sacrificed himself as Jesus to himself as the Christ). 우리는 이처럼 복잡한 형식으로 십자가의 상징을 해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개념의 결과는 이제 기독교가 원칙적으로 그 상징의 구체화된 형태를 최종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이 원칙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십자가의 근본 이해에서 탈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이 문제의 근본 형식이 표현되어 있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을 참고로 제시하곤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삼고자 원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와 그 당시에 나타났던 다른 메시야들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 안에 있는 비교적 작은 마을에서의 정치 혁명이 영웅적인 일인 동시에 어리석은 일이요 또한 관계된 국가의 파멸을 자청하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정치적 혁명가들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역할은 이사야의 예언(53:1)을 따른 것 이니다. 그는 자기의 사명을 이사야가 예언한 새 실재의 지참자의 사명에다 연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그이 안에서, 그를 통하여 성령이 실제로 행동함을 말합니다. 삼위일체의 제 3위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신화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려도 좋습니다. 그 대신 신약성서나 특히 공관복음서에 기록되었고 제 4복음서에 해석된 참신한 이미지를 찾아 보십시오. 그 곳에는 이 모든 상황이 우리의 제반 문제에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밝히 나타나 있습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나의 소감은, 그들에게는 본래판단의 적절한 표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결함은 하나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내가 독일에서 계속적으로 경험한 것을 예를 들어 말씀 드린다면, 그들은 정신적으로 우수하거나 탁월한 인물들을 배출하지 못한 것입니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가 영웅적이고 황홀하게 시작될 때 참 궁극적 관심을 느끼는 인물들을 배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 지도자들은 고급 관리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정신력이 충만한 초창기의 역군들, 마르크스 자신, 그리고 마르크스 이전에 이상주의적 사회주의 시대에 있었던 이들과 같은 지도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어던 경제 운동 자체나 정치적 당파 자체가 궁극적인 것의 지참자는 될지언정 궁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궁극적인 것 자체라고 간주된다면, 지도자들의생명과 발전은 손상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비극이었습니다.
히틀러가 등장할 당시의 지도자들을 대부분 내가 알고 있었습니다만, 참신한 정신력을 지닌 인물들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구조가 공산주의에서도 본질적인 것이라고 하겟습니다. 당은 하나의 경험적 실재이고 스탈린과 같은 인물들에 의하여 영도됨에도 불구하고, 당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당 자체를 절대화하고 나치즘과 공통된 흔적을 노출하는 현상인데, 그것은 곧 비공산주의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정치적 침략성과 동시에 정신적 경험과 지도력의 내적 빈곤입니다.
 
Student: In my reading this week, I found that in Communism and Christianity you refer to the ultimate form of socialism as utopian socialism, and I would like to ask what the difference is between utopian socialism and the final goal of Communist thought, the paradise of Communism?
학생 : 이번 주간에 책을 읽을 때 박사님이 공산주의와 기독교란 제목에서 사회주의의 궁극적 형태는 이상적 사회주의라고 언급하신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상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의 최종 목표인 공산주의의 낙원과의 상이점을 묻고 싶습니다.
 
Dr. Tillich: In their eschatology, or concept of final days, there is no essential difference. The real difference lies between the democratic procedures which in the first decade of this century were instituted by the Social Democrats and the interpretation of Marxism by Communists as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This means in practice the dictatorship of a small hierarchy coming out of the proletariat. And this fundamental difference at the beginning of the twentieth century produced the split between socialism and Communism, both of which previously had shared Marx as their leading spirit.
"Utopian socialist" has nothing to do with the word utopia; it means simply "idealistic socialist," a socialist who believes that by persuading the ruling classes to surrender their ruling power one might be able to effect a transformation of society. Marx, on the other hand, recognized the class situation; he believed that a class situation is a power situation and that therefore there must be a transformation of society with power. On this basis the difference developed.
With respect to the theories in my own period, in the twenties, there was still a "scientific Marxism" in the Social Democratic Party. "Scientific" means calculating, and this was one of the reasons for its defeat. We sat in our chairs and calculated the coming of socialism through the necessities of the dialectical process. In France, on the other hand, because of the strong influence of Sorel, the "voluntaristic" line of thought was decisive. And both the Fascists in Italy and the Communists depended on voluntarism, which meant that you cannot just "calculate" the coming of socialism but must bring it about. And you must bring it about by radical revolutionary activity. The German social democracy did not agree, but insisted that we must accomplish it through democratic procedures. We must win the majority. And they did win the majority democratically, even under Wilhelm II shortly before World War I; but not with sufficient fullness or depth.
So here we have two types of approach, calculating and voluntaristic, and they must be distinguished. Both shared a common scripture, namely, the Communist Manifesto as a creed and the other writings of Marx — especially Das Kapital — as the Bible. But you know we must never cease to try to interpret any Bible. This is good, because continuing interpretation implies an authority, a point of reference which in itself has judging power, while on the other hand there is freedom to interpret. And this element of freedom we also have in socialism and Communism.
In this sense all churches that have a definite symbol are authoritarian. It is always through interpretation that the divine Spirit manifests itself, transforming the original point of reference again and again in many ways. So I would say that this is not the point of difference. The difference between socialist organization and the church lies in the object, which for socialism is a collective with its leader, and for the church a community in which the transcendent is not to be grasped in any particular form. But in the moment when the church identifies itself with a fixed form of interpretation it becomes no better than the Communist collective, which is only another form of community with absolute claim.
틸리히 : 양자의 종말론이나 최후의 날에 대한 개념에는 본질적으로 상이점이 없습니다. 사실상의 상이점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20세기 초엽의 10년 어간에 민주주의적 절차를 제정해놓았고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무산자의 독재로 해석한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무산 계급에서 나온 소수 지배계급의 독재권을 뜻합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본래 마르크스를 자기들의 주도적인 정신으로 삼았지만, 20세기 초엽에 싹트기 시작한 그러한 차이점은 양자의 분리를 초래하였습니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Utovian socialist)는 유토피아라는 말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idealistic socialist) 곧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권력을 포기하도록 설득함으로써 사회 변혁에 영향 줄 수 있다고 믿는 사회주의자를 말합니다. 이 반면에, 마르크스는 계급 상황을 인식하였습니다. 계급 상황은 다름 아닌 권력 상황이요, 그러므로 사회 변혁은 권력으로 성취되어야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를 따라 상이점은 발전되어 갔습니다.
1920년대의 이론들을 고찰해 본다면, 사회민주당에는 아직 과학적 마르크스주의’(scientifix Marxism)가 잔존하였습니다. ‘과학적이란 계산적이란 말인데, 이것이 패배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변증법적 과정의 필연성을 통하여 굴러 오는 사회주의의 도래를 계산만 하였습니다. 이와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소렐(Sorel)의 강한 영향력 때문에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 voluntaristix)’ 노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태리의 국수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도 모두 주의주의(主意主義)에 의존하였는데, 주의주의란 우리가 사회주의의 도래를 계산만 할 수는 없고 그것을 가져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과격한 혁명적 활동으로 가져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이에 찬동하지 아니하고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성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우리는 대중을 장악해야 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민주주의적으로 대중을 장악하였습니다. 이것은 제 1차 세계 대전 직전인 빌헬름 2세 때에도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넓이와 깊이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계산적인 것과 주의주의적인 두 형태의 어프로치가 있습니다. 이 둘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신조로 삼고 그 밖의 저서들 특히 자본론’(Das Kapital)을 성서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계속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어떤 권위와 판단력을 내포한다는 점, 그리고 해석할 자유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경우에서도 이 자유의 요소는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정한 상징이 있는 모든 교회들은 권위주의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제나 성령은 해석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중심점을 거듭 변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상이점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주의적 국방부 직할부대 및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과 교회의 상이점은 그들의 대상에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대상은 지도자들을 가진 집단(a collective)이요, 교회의 대상은 공동체(a communit)로서 그 안에서 초월자가 어떤 특수한 형식에 붙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해석의 고정된 형식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에 그것은 절대적이라고 자처하는 단 하나의 공동체 형식에 불과한 공산주의적 집단과 대동소이하게 됩니다.
 
Professor: There seems to be some disagreement between what I suggested and what you have just said in regard to self-criticism. It was first said here that there was no self-criticism in the Communist party, but that it existed within the church. I suggested then that there was self-criticism in both, and you have pointed out that it is not the same in the two. To clarify this, could we say that there is a self-criticism within Communism and socialism only in so far as the individual is concerned. I know this to be the case with Chinese Communists. Like Boy Scouts, at the end of the day they would ask themselves how well they had done; how many old ladies they had taken across the street; how they had helped their fellow man. In all these matters, that sound so Christian, the Communist students criticized themselves and each other. Yet the point you make, if I understand you, is that this criticism, although present as in Christianity, is not the same sort of criticism because it does not extend to party structure. That is its fatal weakness. Whereas in Christianity, if we exclude the authoritarian Catholic tradition, we do have a criticism of structure and symbol as well.
 교수 : 자기 비판에 대하여 제가 제시한 것과 박사님이 방금 말스하신 것에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 약간 있는 듯합니다. 처음에 공산당에는 자기 비판이 없고 교회에만 잇다고 이야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둘이 모두 자기 비판을 한다고 시사하였고 박사님은 양자의 자기 비판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좀 더 밝혀 본다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도 자기 비판이 있기는 하나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었다는 말씀입니까? 이것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경우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이 스카우트처럼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오늘의 일을 얼마나 잘하였나, 몇 명의 노파를 길 건너게 해 주었나, 동료들을 어떻게 도와 주었나 등 스스로 물을 것입니다. 대단히 기독교적인 듯한 문제들을 앞에 놓고 공산주의 학생들은 자신과 상대방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제가 바로 이해하였다면, 박사님의 요지는 결국 그러한 비판은 기독교 내에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당 구조에까지 뻗치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비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산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와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권위주의적인 카톨릭 전통만 제외한다면, 구조와 상징에 대한 비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Dr. Tillich: Yes, that’s right.
틸리히 : , 그렇습니다.
 
Student: You are saying that within the Communist party, there is no criticism of the basic structure of the party itself. Would you also say that there is no criticism of the results of the manipulations of this party — the handling of agriculture and national affairs?
학생 : 공산당 안에서는 당 자체의 기본 구조에 대한 비판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당의 정책 곧 농업과 국사(國事)의 조종의 결과에 대한 비판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Dr. Tillich: On the contrary, there is continuous criticism. Leaders are being dismissed every day, if you read your New York Times.
틸리히 : 그와는 반대로, 계속적인 비판이 가해 지고 있습니다. New York Times를 읽으면 지도자들이 매일 해임당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The American Way of Life
미국적 생활 방식
 
Student: We shall proceed now to another question which relates to the very end of the meeting a week ago in which Dr. Tillich asked, "Does the American way of life represent a profanization of the vocational element of American nationalism today?"
 학생 : 지금부터 다른 문제로 돌려 볼까 합니다. 그 문제는 한 주일 전 모임의 끝머리에서 틸리히 박사님이 물으신 미국적 생활 방식은 오늘에 있어서 미국적 국가주의의 사명의 불경화(不敬化)를 뜻합니까?”라는 질문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Professor: Are you going to explain vocation again?
교수 : 사명이란 무엇인지 다시 설명해 보시겠습니까?
 
Student: I wish you had not asked that! But the vocational element here I think is what the individual is striving for in American nationalism or what we are seeking as Americans — our goals.
학생 : 그런 질문을 하시면 곤란합니다만, 여기서 사명이란 우리가 미국적 국가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또는 미국인으로서 우리의 목표를 찾고 그것을 위해 애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tudent: I would also like to get a definition for the word "profanization."
학생 : ‘불경화’(profanization)란 말의 정의를 듣고 싶은데요.
 
Student: This occurs when your ultimate goal is obscured or compromised by material things or finite things. Is it true, Dr. Tillich, that profanization occurs in quasi-religions, but is termed "demonization" in religions proper?
학생 : 불경화는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물질이나 유한한 사물에 의하여 무시되고 타협되어질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틸리히 박사님, 불경화는 유사 종교에서 생기고 악마화’(demonization)는 기성 종교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Dr. Tillich: That is generally true, yes. I do not know if we ought even to use the European word "profanization" here. If we define it, we may use it. Otherwise we must say "secularization," for the word "profane" now means vulgar or having to do with swearing and I don’t know what else, although originally it meant simply "not in the sanctuary." Words often cannot be saved. And I do not know whether this word can be restored to its original meaning; I’m doubtful. Once a word acquires a connotation of evil, the stigma cannot be removed. I am trying in my third volume of Systematic Theology to save this word, but I shall probably fail. In any case, when you use it, explain that you mean secularization.
Now the word "vocation" I am not using in relation to the individual. I mean rather that every nation has a particular vocation which gives meaning to its power. This is a central point in my whole interpretation of history. Wherever I have discussed it, I have given examples from Western history of the vocational feeling which great nations have. And this American nation has had, and still has, the ideas of the new beginning, free from the curses of the European past.
틸리히 : ,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유럽의 말인 불경화를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정의한 다음에 쓰는 것은 괜찮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세속화(secularization)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불경이라는 말이 본래는 성전 안에 있지 않다’(not in the sanctuary)는 말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저속한 것이나 욕설 따위의 것과 관계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말이란 구제 받기가 퍽 어렵습니다. 그 말이 본래의 의미로 회복할 수 있을지 나 자신도 모르겠습니다. 하나의 말이 불미스러운 의미를 가지게 되면 그 낙인은 좀처럼 제거되지 않습니다. 나는 조직 신학3권에서 그 말을 구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만, 실패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여러분이 불경화를 사용할 때는 세속화를 뜻한다는 것을 밝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나는 사명이란 말을 개인과 관계시켜 사용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하나 하나의 국가가 그 권력에게 의미를 주는 특수한 사명을 지녔음을 나는 말합니다. 이것이 나의 역사해석 전체의 핵심입니다. 내는 그 문제를 논의할 때는 어디서나 서구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국가들이 가진 소명감의 실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유럽의 과거가 던진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새 출발의 사상을 품고 있습니다.
 
Student: I want to ask Dr. Tillich how the word "cause" does as a synonym for the word "vocation"?
 
학생 : ‘원인’(cause)이란 말이 어떻게 사명’(vocation)이란 말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지 틸리히 박사님께 묻고 싶습니다.
 
Dr. Tillich: Yes, it is a "cause for which one fights," for which a nation stands. Now my English is not sufficient to feel the nuances clearly here. Would you say that the feeling of the Jewish people to be the religiously selected people was a cause, or that the feeling of the Roman Empire that it must bring law to all nations within reach of Rome was a cause? Or that the Greeks’ feeling that they represented the highest culture of humanity, as opposed to the barbarians was a cause? I leave to those born into the English language to say whether the word "cause" is better or worse than "vocation." In "vocation" there is that element of being called; it is an historic destiny. In "cause" there is something a little bit arbitrary. We can fight for one cause today, and tomorrow for quite a different one. But in vocation there is an historical coalescence between the nation and the vocation and that for which it stands. So I personally prefer the word vocation.
 
틸리히 : 그것은 사람이 싸우고 한 국가가 자립하는 것이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어가 뉘앙스들을 정확하게 느끼게 하지는 못합니다만, 여하간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느낀 감정이 하나의 원인이었고, 로마가 뻗칠 수 있는 모든 국가들에게 법을 부여해야겠다는 로마 제국의 감정이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희랍인들이 야만인들과는 반대로 인간의 최고 문화를 대변하였다는 감정도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원인이란 말이 사명이란 말보다 좋은지 나쁜지의 판가름은 영어세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사명에는 소명(召命)의 요소가 끼어 있기도 하고 역사적 운명을 말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원인에는 약간 독단적인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은 이 원인을 위하여, 그리고 내일은 전혀 다른 원인을 위하여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에는 국가와 사명 사이를 얽는 역사적 결합이 있고 국가가 성립되는 요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사명이란 말을 더 좋아합니다.
 
Student: If we can think of "vocation" as a continuous goal, and of "profanization" as making something common or secularized, I think we can employ these terms of Dr. Tillich.
학생 : 만일 우리가 사명은 계속적인 목표로, ‘불경화는 어떤 것을 통속적으로 만들거나 또는 세속화시키는 것으로 상정한다면, 틸리히 박사님의 술어들을 채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Student: But are we thinking of the American vocation as giving democracy to the world or are we thinking of it as something else?
학생 : 그렇지만 미국적 사명이라고 할 때 우리가 세계에게 민주주의를 부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혹은 다른 것을 뜻하는 것입니까?
 Student: I think that, when we were discussing this last week, we were referring to democracy and freedom. American nationalism involves spreading what we feel is unique to our own country among other countries throughout the world. For the purpose of discussion let us say that American nationalism refers to democracy and our basis of government.
학생 : 우리가 지난 주간에 이 문제를 토의할 때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국적 국가주의란 우리 나라의 독특성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세계 모든 국가에게 산포하는 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토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미국적 국가주의는 민주주의와 우리 정부의 기초를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좋을 듯합니다.
 
Professor: But are you rejecting Dr. Tillich’s own definition of it as the new beginning, free from the restrictions of European tradition?
 
교수 : 그렇다면 학생은 틸리히 박사님이 사명을 유럽 전통의 쏙박에서 탈피한 새 출발이라고 정의한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Dr. Tillich: The curses of European tradition. I use that word because we have felt that curse, particularly the division of Europe in the year 843 between east and west,2 and ever since that time through continuous disrupting wars. Up to World War II, European nations depended on this curse, which of course had in itself also many positive elements — among them the richness of the development of individual nations. Both sides must be considered. But the curses obviously proved stronger, and the American founding fathers, when they emigrated, wanted to be free of them, and also of the resulting authoritarianism. And it was a new beginning. But you are right of course in inquiring as to the content of this new beginning. And we might answer: a liberal democracy.
 
틸리히 : 내가 유럽 전통의 저주(curses)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특히 843년에 유럽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그 이후 계속적으로 파괴적인 전쟁이 일어난 사실들을 우리가 저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국가들은 이 저주에 의존하였습니다. 물론 이 저주가 개체 국가의 발전의 풍요성과 같은 긍정적 요소들을 내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양면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주들은 분명히 보다 강력한 것으로 노출되었고, 미국의 시조들이 이민할 때 그들이 이 저주들과 또한 여기서 비롯된 권위주위로부터 자유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새 출발의 내용에 관하여 묻는 일은 물론 옳습니다. 그 내용은 곧 자유적 민주주의라고 말해서 좋겠지요.
 
Student: I understand your statement, but I wonder if we any longer feel or understand the curse of European society. I know people who have traveled in Europe and have mentioned the differences in European society, but I don’t think they feel this any more.
학생 : 박사님의 진술에 이해가 갑니다마는, 우리가 지금도 유럽 사회를 저주를 느끼거나 이해하는지에 대하여는 의심이 갑니다. 저는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유럽 사회의 상이성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을 직접 압니다만, 그들이 저주를 느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Dr. Tillich: Oh! Now this — the curse — you either feel or do not feel. Take what is happening now in relation to De Gaulle. It was quite a shock for the whole Western world that these events could again occur, for what he is doing with his intense French nationalism expresses the year 843 rather than 1963. As a traveler in Europe you yourself certainly may not feel anything of this. But if you had been born as I was, shortly after the Franco-Prussian War toward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and remembered it fully, with the wars of liberation and the Napoleonic wars as earlier examples before you, you would feel it. And then, with experience especially of World War I, in which I myself participated, and again of World War II, you would feel a definite curse.
틸리히 : 그렇지요. 학생은 그것을 느낄 수도 있고 아니 느낄 수도 있스빈다. 지금 드골(De Gaulle)과 관계해서 어떤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의 강경한 프랑스 국가주의가 1963년보다는 차라리 843년을 표현하기 때문에 과거의 치욕적인 사건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유럽 전체에 말할 수 없이 큰 자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학생이 관광하는 식으로 유럽을 여행할 때 이런 사실을 전혀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학생이 나처럼 19세기 말엽 보불 전쟁(普佛戰爭)직후에 태어나서 이 전쟁과 함께 그 이전에 있었던 자유의 전쟁들과 나폴레옹 전쟁을 모두 기억한다면, 그 저주를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특히 내가 참전하였던 제 1차 대전과 또한 제 2차 대전을 경험하고 난 다음 학생은 결정적인 저주 같은 것을 느낄 것입니다.
 
Student: I think what the previous speaker and I feel is that today America is king. We are the big daddy, and Europe is now trying to come up to us through industrialization. And we don’t look at her any more as if we needed to get away from her as the founding fathers did. Now we are sending aid to all the other countries in the world. We don’t appear to be trying to get away from Europe’s curse. We have achieved our ideal, and we are trying to give it to other people now — this thing of democracy and freedom.
학생 : 바로 전에 발언한 학생이나 저는 오늘의 미국은 왕이라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큰 아버지(the big daddy)이고 지금 유럽은 산업화를 통해서 우리가 서 있는 차원에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 모양으로 유럽에서 이탈하려는 심정에서 유럽을 바라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의 모든 국가들에게 원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럽의 저주에서 탈피하고자 애쓰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이상을 성취하였고, 그 이상 곧 민주주의와 자유를 다른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Dr. Tillich: Oh yes, but that is a crusading spirit coming out of the early years. You see, I went back to the foundation of America and tried to find the reason for the vocational feeling which, for example, drove Wilson in World War I to "make the world safe for democracy." And this crusading spirit is still here. If you come from outside, you feel it. And now of course it is the "salvation" of democracy that expresses this American feeling.
틸리히 : ,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초기에서 유래된 개척 정신입니다. 나는 미국의 창설 시대로 돌아가서 제1차대전 당시 윌슨 대통령으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위해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도록자극한 사명감의 이유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이 개척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외국에서 이 땅에 돌아온다면 그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미국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Student: I think perhaps we have got away from the original question. We are all aware of the American way of life as one based on democracy and the principles of freedom, but is this being debased today in such a way that the impression we make is not one that we might have presented fifty years ago?
학생 : 우리가 질문의 핵심에서 좀 이탈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는 모두 미국적 생활 방식이 민주주의와 자유의 원리 위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이 어느 정도 질적으로 저하되어서 우리가 지금 주는 인상이 우리가 50년 전에 제시하던 것과는 차질이 있지 않습니까?
 
Student: It seems to me that if the American vocation is truly that of a new beginning, as soon as you systematize it into any set pattern or "American way of life" as certain groups do today, it would definitely be a profanization. But I think this will remain rather an insignificant threat to America as a whole, unless we are put into a position of such insecurity that fear would drive us into defending ourselves by narrowing down our way of life. I think that as long as Americans in general are secure they will realize that this freedom and new beginning must not be debased by putting them into a rigid formula called the American Way of Life.
 
학생 : 만일 미국의 사명이 사실상 새 출발이라면, 지금 어떤 집단들이 하는 모양으로 우리가 그것을 고정된 모형이나 미국적 생활 방식으로 조직해 버리자마자 그것은 결정적으로 일종의 불경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안정한 위치에 처하게 되고 공포 때문에 우리의 생활 방식을 편협화함으로써 우리 자신들을 방어하게 되지 않는 한, 그런 위험은 미국 전체에게 별로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이 안정을 유지하는 한, 그런 위험은 미국 전체에게 별로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이 안정을 유지하는 한, 그들은 이 자유와 새 출발이 소위 미국적 생활 방식이라는 엄격한 형식 속에 감금됨으로써 질적 저하가 초래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리라고 생각합니다.
Student: I think the central issue is the idea of external authority versus internal authority, which is the issue of freedom as the founding fathers of our country saw it. This new beginning, or new cause, is a very important concept to keep in mind. We have this freedom to work with, and what we do with it will be something completely new in history. I mean, we could do quite a bit with it. Erich Fromm reminds us of the tendencies to "escape from freedom," to go back to an external form of authority, which is what happened through militant, profane nationalism. I think we must keep that in mind so as not to go off on extraneous issues.
학생 : 제 생각으로는 중심 문제가 내향적 권위 대 외향적 권위의 개념인 듯합니다. 이것은 곧 우리 나라의 조상들이 본 바돠 같이 자유의 문제입니다. 이 새 출발 또는 새 원인은 마음에 깊이 간직해야 할 매우 중요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자유가 있고, 이 자유를 가지고 하는 모든 일은 역사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에서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에 대한 경향성에 관하여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권위의 외향적 형식으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이런 사실이 호전적이고 불경스러운 국가주의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 속에 간직함으로써 관계 없는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을 성싶습니다.
 
Dr. Tillich: Now whether we call it nationalism or patriotism, my question last Sunday was, "Is there a really strong trend to cross over into the deterioration of nationalism which I call Fascism? How far are we in danger of the transition from the justified quasi-religion of nationalism or national self-consciousness — that vocational feeling of the nation which is all to the good — into Fascism, which makes the nation an idol, elevating it to a position that dominates everything in the world? As a German hymn patriotically cries, "Deutschland, Deutschland uber Alles!" (Germany, Germany above everything!) If an American sang this seriously and not just as propaganda, he would be on the way to shifting his spirit from nationalism to Fascism.
Is there a danger of this happening? That was our question. It is very hard to make a general statement. I feel more optimistic than many of my refugee colleagues and friends, whose eyes are always sharp for things like the coming of Fascism and Nazism. They think they see the whole picture very clearly. I have traveled too much in this country, and especially know too many students and colleagues from all sections of America, to believe that the danger is very near.
틸리히 : 우리가 그것을 국가주의라고 하든지 또는 애국심이라고 하든지 간에 지난 일요일에 내가 던진 질문은 국가주의의 악화 곧 국수주의로 넘어갈 강한 경향성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국가주의나 국가적 자기 의식의 정당화된 유사 종교로부터 국가를 우상화하고 그것을 전 세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입장에 올려 놓은 국수주의로 전향할 위험성이 얼마나 심각하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애국적인 독일 노래가 독일, 모든 것 위에 있는 독일!”(Deutschland, Deutshland uber Alles!)이라고 외치듯이, 만일 어떤 미국인이 단순히 선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심각하게 그런 종류의 노래를 부른다면, 그의 정신은 국가주의에서 국수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일어날 위험성이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문제였습니다. 이에 관해서 일반적인 논평을 가하기는 매우 곤란합니다. 그러나 나는 국수주의나 나치즘의 도래와 같은 사건에 항시 예리한 눈초리를 퍼붓고 있는 나의 망명한 동료들이나 친구들보다 훨씬 낙관적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화면 전체를 매우 분명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나라를 수없이 여행하였고 특히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온 많은 학생들과 동료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이 박두하였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Can Religion Be Restored When Replaced by Socialism?
사회주의가 종교를 대신할 때 종교는 회복될 수 있는가?
 
Student: Now for our next question: How does one restore the meaning of religious goals after their destruction by quasi-religions such as socialism? Is there any possibility of restoring our goals through dogmas? The Catholics have had a long history and have pretty well kept themselves intact by just this means. Is Protestantism so diluted that dogma can no longer implement this restoration of meaning?
학생 : 다음 질문은 사회주의 같은 유사 종교들에 의하여 파괴된 종교적 목표의 의미를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를 교리를 통해서 회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까? 카톨릭 교회는 오랜 역사를 걸쳐서 바로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자신을 제대로 유지하여 왔습니다. 이제 개신교는 교리로써 의미의 회복을 실현할 수 없을만큼 쇠약하여졌습니까?
 
Student: What developed at the last seminar was this idea of the attack of the quasi-religions, such as socialism, on our religions proper, the result being the narrowing or self-defining of the religion by dogma. So it would be logical to expect that the restoration of religious goals would involve a re-expansion of the narrowed religions proper by the revision of dogma. Perhaps Dr. Tillich could help us out here.
학생 : 지난 세미나에서 논의된 것은 사회주의 같은 유사 종교가 기성 종교에 대하여 취하는 공격에 관한 개념인데, 그 공격의 결과는 종교가 교리로써 편협화되고 자기 규정을 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목표의 회복은 곧 교리를 교정함으로써 편협화된 기성 종교들을 다시 확장하는 일을 포함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정연한 듯싶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틸리히 박사님께서 좀 도와주실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Dr. Tillich: Yes. Now shall I answer this question? First of all, I do not like the term "religious goals." It sounds as if religion first put special goals before us, and we then should march toward them. But religion acts in precisely the opposite way. Religion always first gives, and then demands. So the concept of goal or purpose is inadequate. In the whole of religious literature we will not find it. Eschatology — or the Kingdom of God — these are not goals. They are something given, and the only goal could be the concrete actualization of them in this or that moment. But they are "given" by the presence of the divine Spirit in reality. That is the one thing I can say to this. As for destruction by quasi-religions, there is no destruction. Nothing is destroyed. The word is not adequate; the situation is much deeper.
The process of secularization is the basis for all three quasi-religions and many others you might mention. And secularization means the cutting off of the finite from its relationship to the infinite, and a concentration on the finite. I have called this process (in a frequently quoted phrase) "the in-itself-resting finitude" — the finitude which is not shaken, which rests in itself and does not move up to the infinite, or unconditional, or ultimate. This is secularization. Now if, in this secularization, moments arise which try to give meaning to life by evaluating some of the elements in this secular world as matters of highest and sometimes ultimate concern, we come face to face with the various quasi-religions. I believe that in my writing on the world religions I have clearly described this secularization as the general foundation for the quasi-religions.
In Japan we have a secularization inherited from the West together with industrialization. But which of the quasi-religions will win in Japan on the basis of its secularization is a question for the future. Will what we hope for — liberal humanism, as I term our own situation — be the victor? Or will nationalism, certainly triumphant in the Tojo government during the war, return. Or will Communism, improbable up until now, finally prevail? Each of these three can, on the basis of secularism, become the determining quasi-religion in any country where secularism is powerful. There is some hope that American democracy (or my term "liberal humanism") may be successful.
We can say, in any case, that secularism has definitely undercut religious symbols.
틸리히 : , 내가 그 문제에 대답여 볼까요? 먼저 나는 종교적 목표들이라는 술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종교가 우리 앞에 특수한 목표들을 미리 설정해 준 다음 우리는 그 목표들을 향하여 전진해야 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종교는 분명히 이와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종교는 언제나 먼저 주고 그 다음에 요청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목표나 목적의 개념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교적 문헌 전체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빈다. 종말론(또는 하나님의 나라)은 목표들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주어진 것이며, 유일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계기에 이르러 주어진 것들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 뿐일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성령의 현존에 의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유사 종교들에 의하여 기성 종교가 파괴된다고 하였지만, 실상 파괴하는 것도 없고 파괴당하는 것도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말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보다 훨씬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세속화의 과정은 세 가지 유사 종교들과 그 밖의 수다한 것들의 기초입니다. 따라서 세속화란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과는 관계로부터 단절시키는 것과 아울러 유한한 것에의 집착을 뜻합니다. 나는 이 과정을(자주 인용되는 술어를 빌면) ‘자기 안에서 안식하는 유한성’(the in-itself-resting finitude)이라고 부릅니다. 이 유한성은 동요되지 않고 스스로 안식하며 무한한 것, 무조건적인 것, 또는 궁극적인 것에로 지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화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속 세계 속에 있는 요소들을 최고의 것으로 또는 궁극적 관심으로 상승시킴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계기들이 세속화 속에 출현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유사 종교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내가 세계 종교들에 대한 글에서 세속화가 유사 종교들의 일반적 근거임을 밝히 서술하였다고 믿습니다.
일본에는 서구로부터 산업화가 함께 전래된 세속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이 세속화를 근거로 하여 어느 유사종교가 승리할 것이냐 하는 것은 미래를 위해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 곧 내가 우리의 상황을 가리킬 때 쓰는 자유적 인본주의가 승리하게 되겠습니까? 혹은 전쟁중의 도오조오(東帝) 정부가 개가를 부른 국가주의가 환원될 것입니까? 혹은 지금으로서는 있음직하지 않지만 종당에는 공산주의가 정복할 것입니까? 이 셋은 각기 제 나름대로 세속주의에 근거하기 때문에 세속주의가 유력한 어떤 나라에서나 결정적인 유사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또는 나의 술어로는 자유적 인본주의’)가 성공할지도 모를 희망도 약간 보입니다. 아무튼 세속주의는 분명히 종교적 상징들을 결정적으로 절단하여 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Dr. Tillich: But let us approach this subject with care. The word dogma has almost completely disappeared, as some of you have already indicated. Dogma is a development related to Greek philosophy. The word itself comes from the philosophical schools of the late ancient world. It is not originally a religious word, but means a "particular doctrine." If you had joined the Stoics, the Epicureans, or others, you would have accepted this or that fundamental dogma, which you could then have freely developed. Following this model, Christianity had its own dogma — namely,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dogma is implicit in the very name Jesus Christ. This name is the fundamental dogma. All other Christian dogmas have a supporting and protective role; they are not in themselves important.
But the real situation with which we are faced is the loss of the power of religious symbols in general. We can no longer speak of God easily to anybody because he will immediately question, "Does he exist?" Now the very asking of the question signifies that the symbols of God have become meaningless. For God, in the question, has become one of innumerable objects in time and space which may or may not exist. And this is not the meaning of God at all.
In the same way, we can no longer use the word "sin" because we have distorted it to mean a particular act which contradicts particular conventional moralities, especially when it refers to sex. For Paul, sin is a demonic power overarching all reality; and he usually uses the word not in the plural but in the singular, as the "sin" which is the demonic power over the world. Here, then, are two examples of the distortion of religious concepts within the church, and then their consequent rejection by the secular world.
How this situation can be overcome without a fundamental reformation of the way in which Christianity expresses its symbols, preaches them, and interprets them, I really do not know, although my whole theological work has been directed precisely to the interpretation of religious symbols in such a way that the secular man — and we are all secular — can understand and be moved by them. On this basis (which is a small confession to you about my work), I believe it may be possible to reinterpret the great symbols of the past in a way that restores meaning to some of them. For example, I would forbid, under penalty of dismissal, any minister from using the words "original sin" for the next thirty years, until this term regained some meaning. But since it is doubtful that it will ever regain any meaning, it should probably be dismissed altogether. Even Professor Niebuhr,3 who defended and used it in his earlier work, has told me that he now believes it is impossible. "Let’s drop it," he said. This is one way of doing it.
Another way, however, is to reinterpret what the symbols applied to Jesus mean. I felt this strongly in your very first remarks today about a divine being sitting in Heaven, and deciding one day to come down to us, and then being able to do everything that God does. You must see what a distortion this is of the way in which these ideas originally developed. Actually, there was this man Jesus; and there were people who were with him whom he impressed more and more as somebody whom they had expected to come — "the Anointed One"; and he seemed to be anointed with the divine Spirit. You can sense people who are full of divine Spirit, who radiate spiritual power. Then they gave him a lot of names — all symbols; some called him the Son of Man, or it might even have been that he called himself that. And the "Son of Man" at that time, in the society in which he lived, probably meant that heavenly being described in the Book of Daniel in the seventh chapter, who stands before God and is sent down by him to overcome empires. They gave him that name, and it was a symbol. "Christ" is a symbol much older even than "Israel." It comes from Egypt: "the Anointed One." And "Son of God" is a symbol. It was
used for Israel, and later for the remnant of Israel, and then for the man in the most intimate relationship to God. In the Greek world it was used for real sons and daughters of gods who had sexual relations with human beings. This meaning, of course, had to be removed; but it came back, and the church had great difficulties in finally getting rid of it.
Other symbols are curious. "The Lord," for example, was the name for God in the Greek Old Testament. These various symbols were also given to Jesus. Finally, however, the symbol "Christ" was decisive for his name; and for Christian theology, Logos, the divine word. These are all symbols applied to reality.
Now I shall tell you something I usually say to my theological students. If somebody asks you, "Was Jesus the Son of God?" he is trapping you, intentionally or unintentionally. For if you answer, "Yes," you are guilty of crude mythology. But if you answer, "No," you are saying that Jesus does not deserve this symbol. You have only one way out, which I discovered comparatively early in my career, namely, to ask the questioner, "What do you mean by the term ‘Son of God’?" And the moment you ask that question he is trapped. Of course he can answer; but if he were capable of it he would not have asked the first question so stupidly.
Now this is how we must work our way. Shall we live, in the future, with new symbols? Will they come into existence? Nobody can invent them — I hope I made this clear in the earlier discussions. They may come, and they may grasp us and exert power over us. And then the old ones may disappear, as has always happened in church history. In Protestantism, since the Reformation, Mary and all the saints have completely disappeared. They cannot be restored. Other symbols may have the same fate. It will be interesting to observe whether the conservative Catholic wing in the Episcopal church, which shows a great interest in "Mariology," will be able, despite being Protestant and a child of the great Reformation, to rediscover the symbol "Holy Virgin" or "Mary" as a religious object. They believe they can, and I know like-minded people even in German Lutheranism. I myself wonder if this rediscovery would not be too artificial to be really convincing. Such efforts may also be applied to other Christian symbols.
종교적 상징의 회복
틸리히 : 그러나 우리는 이 주제를 조심스럽게 다루어 봅시다.
교의(敎義, dogma)라는 말은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교의는 희랍철학과 관계되어 발전되었습니다. 그 말 자체가 후기 고대의 철학파들로부터 유래된 것이빈다. 그것은 본래 종교적 용어가 아니고 어떤 특수한 교리’(a particular doctrine)를 뜻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금욕주의 학파, 쾌락주의 학파, 혹은 그 밖의 다른 학파에 rkekagkdTek, 어떤 근본적인 교의를 받아들여서 그것을 자유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형을 본따서 기독교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교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속에 함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근본적인 교의라고 하겠습니다. 그 밖의 모든 기독교 교의들은 부수적이고 보호적인 역할을 담당할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실제적 상황은 종교적 상징 일반의 힘이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누구에게도 신에 대하여 손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즉각적으로 신은 존재하느냐?”고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 자체가 신에 관한 상징이 무의미해 졌음을 예고하여 줍니다. 왜냐하면 질문의 대상이 되어 버린 신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할 수도, 않을 수도 있는 무수한 대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때의 신은 전혀 신의 의미가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미 ’(sin)라는 말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말을 특정한 인습적 도덕들에 상반하는 특수한 행동 특히 성(sex)가 관계된 행동을 뜻하는 것으로 왜곡되게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를 모든 실재에 상주하는 악마의 힘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통상적으로 그 말을 복수로 쓰지 않고, 죄는 세계를 뒤덮는 악마의 힘이라고 하여 단수로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종교적 개념이 왜곡된 두 가지 실례와 그들이 결과적으로 세속 세계에 의하여 배척당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의 신학적 활동 전체는 세속인이-우리는 모두 세속적입니다-이해할 수 있고 감동될 수 있는 방법으로 종교적 상징을 재해석하는 데 집중되었습니다마는, 기독교가 자기의 상징을 새롭게 묘사하고 설교하고 해석할 방법의 근본적 개혁이 선행되지 아니하고 우리가 직면한 상황이 어떻게 극복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나 자신도 사실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최소한도 이와 같은 근거 위에서(이것은 여러분에게 나의 활동에 대한 사소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의미를 회복시켜 줄 수 있는 방법으로 과거의 위대한 상징을 재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목사들이 그 말의 뜻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라도 앞으로 30년 동안 원죄’(original sin)라는 말이 어떤 뜻을 되찾을 때까지 그 말의 사용을 금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어떤 뜻을 되찾게 될지 의심스럽기 때문에 그것을 깨끗이 포기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니이버 교수도 그의 초기 저서에서 그 말을 옹호하고 사용하였지만, 이제 와서 그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합시다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그러나 또 하나의 방법은 예수에게 적용된 상징이 뜻하는 바를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재해석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오늘 여러분이 하나의 신적 존재(a divine being)가 하늘에 앉아 있고 어느 날 우리에게 내려올 것을 결단하며 신이 하는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한 때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그 개념들의 본래의 발전된 방향에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예수라는 인간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그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곧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인상을 짙게 받았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충만하고 영력(靈力)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많은 이름 곧 모든 상징을 붙여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인자(人子)라고 불렀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인자라는 말이 그가 살던 시대와 사회에서는 아마도 다니엘 7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신 앞에 서 있고 왕국들을 정복할 복적으로 파견될 하늘의 존재를 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준 이름은 상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이스라엘보다 훨씬 오래 된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온 것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신의 아들도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이스라엘에게,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잔존자들에게, 마지막에는 신과 가장 친근한 관계를 가진 사람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그 말이 희랍 세계에서는 인간들과 성적 관계를 맺은 신들의 자녀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이 의미는 물론 제거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회복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제거하는 데 말할 수 없는 곤란을 겪었습니다.
그 밖의 다른 상징도 흥미를 끕니다. 예를 들면, ‘주님’(The Lord)은 희랍어 구약성서에서 신의 대명사였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징들이 예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리스도라는 상징이 대표적인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로고스 곧 신의 말씀이라는 말이 대표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름들은 실재에 적용된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늘 신학도들에게 말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어요. 만일 어떤 사람이 학생에게 예수는 신의 아들이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는 고의적이든 아니든 간에 학생을 함정에 말아 넣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학생이 라고 대답하면 학생은 원시적 신화를 추종하는 자가 되고, 만일 아니요라고 하면 예수는 그 상징을 가질 만한 자격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빠져 나갈 길이 꼭 하나 있는데 나는 이 길을 비교적 일찍이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질문하는자에게 당신은 신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뜻하십니까?”하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하는 순간, 그는 함정에 빠져 버립니다. 물론 그는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대답할 수 있었다면 처음 질문을 그토록 미련하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의 길을 닦아야 할 방법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미래에 있어서 새 상징을 가지고 살게 될 것입니까? 그 상징이 탄생할 것입니까? 아무도 그것을 발명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 사실을 벌써 밝혀 두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앞에 나타나고 우리를 붙들고 우리에게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낡은 상징은 교회 역사에서 줄곧 그랬듯이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에서는 마리아와 모든 성인(聖人)들이 완전히 실종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회복될 수 없습니다. 다른 상징도 동일한 운명을 가지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흥밋거리는, 감독교회의 보수적인 카톨릭파는 마리아론’(Mariology)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개신교이고 위대한 종교 개혁의 후예이니만큼 과연 성처녀’(Holt Virgin)또는 마리아라는 상징을 종교적 대상으로 재발견할 수 있겠는가 관찰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재발견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심지어는 독일의 루터교 안에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나도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은 그 재발견이 지나치게 피상적이어서 참으로 확신을 줄 만한 것이 못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재발견의 노력은 기독교의 다른 상징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Student: Dr. Tillich, our church is trying to build a new building, and our building committee meetings fall into terrible arguments over symbols, symbols that I had assumed were really quite relevant, like the cross. The question that is asked over and over again is: "Why do we have to have all these symbols around us?" Each person on the committee has a different idea of what is suitable, but they do have to come to some decision because the building is going to be put up, regardless.
학생 : 틸리히 박사님, 지금 우리 교회는 새 건물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건축 위원회는 십자가와 같은 상징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계속적으로 제기된 질문은 무엇 때문에 우리 주위에 이러한 상징을 두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위원들은 무엇이 어울릴 것이냐에 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건물은 올라가야 될 형편이므로 그들은 어떤 결정을 보아야 합니다.
 
Dr. Tillich: Which denomination is this?
학생 : 감리교회입니다.
 
Student: The Methodist church.
 학생 : 감리교회입니다.
 
Dr. Tillich: Methodist. Now they are comparatively lacking in symbols, are they not? But on the other hand, they originally sprang from the Episcopal tradition. So I visualize them as a somehow deviating Protestant group with a drop of Catholic tradition still in their blood. Is that not the reason for these difficulties, these disputes?
I once participated in a discussion of this problem, and I found that there are hundreds of traditional symbols of relatively secondary importance which I call "sign symbols." They are not genuine religious symbols, but crowd the boundary between sign and symbol. As to their use today, I personally would be inclined to feel critical or negative toward them, because sign symbols, if dead, can hardly be renewed. You have to have somebody to interpret them. I regret that my mind is now a little empty of symbols of this kind; but they can be found — for example, in the big New York building of the Interchurch Center located on Riverside Drive. People as a whole no longer understand them. They must have guides to interpret them. True, living symbols should be immediately understandable. That would be one criterion.
The other criterion would be whether there is resistance to all of them, as in some churches, because of anxiety concerning the idolatrous use of symbols. This is the reason for the iconoclastic movements in the church, which try to eliminate all pictures and sign symbols. These battles have been waged for hundreds of years, tremendous conflicts in which thousands of people have lost their lives, as in the struggle between the emperors of Byzantium and the bishops. The Reformation again saw a wave of iconoclasm. Beautiful things were ruined in the old Catholic churches for which we would now pay hundreds of thousands if we could only have them back. All these movements spring from the original, deep Jewish anxiety concerning idolatry. And if we meet a strong iconoclastic bias, we probably should not be too aggressive about forcing sign symbols on people who can not bear them.
Another criterion might be the form in which the symbols are expressed; whether, for example, they appear in a con temporary stylistic expression, so that they are not simply repetitions. Now I know crucifixes. I possess one which says much to me without any naturalistic reference — oh, a hint perhaps, but not more. For if symbols are given meaningful expression, we might just awaken them to life again. As for myself, I would simply throw out a sentimental crucifix of the nineteenth-century or late Renaissance type.
These three criteria or principles we should fight for.
 
틸리히 : 감리교회라고요? 그들에게는 비교적 상징이 결여되고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본래 그들은 감독교회의 전통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감리교를 그들의 혈관 속에 카톨릭 전통의 핏방울이 섞인 개신교라고 간주합니다. 이것이 바로 논쟁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내가 언젠가 이 문제를 토의하는 곳에 참여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도 거기서 소위 표시의 상징’(sign symbols)이라고 내가 명명하는 비교적 2차적 중요성을 띤 전통적 상징이 수백을 헤아린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고 표시와 상징 간의 경계선에 밀집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것을 사용하는 문제에 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비판적이고 또한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표시의 상징이 생명을 잃었다면 소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해석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마음 속에는 이런 종류의 상징이 존재하지 않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뉴우요오크의 리버사이드 가에 있는 교회 연합 본부(Interchurch Center)에 가면 그런 상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그 상징을 해석할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참되고 살아 있는 상징들은 즉각적으로 이해됩니다. 이것이 하나의 기준입니다.
다른 하나의 기준은, 어떤 교회에서와 같이 상징을 우상으로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모든 상징에 대하여 항거하는 일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성상 파괴운동(the iconoclastic movements)이 일어난 원인입니다. 그 운동은 모든 회화(繪畵)나 표시의 상징을 제거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 싸움은 비잔티움의 제왕들과 감독들 간의 그것 모양으로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고 수천의 인명을 손실시켰습니다. 종교 개혁은 또 다시 성상 파괴주의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오랜 카톨릭 교회당에 있던 아름다운 것들이 파손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그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아마도 수십만 달러씩 지불할 것입니다. 이 모든 운동은 본래 우상 숭배에 대하여 관심이 깊은 유대인의 근심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강렬한 성상 파괴적 편견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표시의 상징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한다고 해서 너무 지나치게 공격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 하나의 기준은 상징이 표현되는 형식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들이 관거의 반복에 그치지 않고 현대의 멋진 표현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모형이 많습니다. 하나의 힌트에 불과합니다만, 나는 많은 십자가 중에서 어떤 자연주의적인 고려 없이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만일 상징이 의미 있는 표현을 가질 때에 우리는 그것을 재생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19세기나 문예 부흥 후기에 속하는 유형의 감상적인 십자가를 내동댕이칩니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기준 또는 원리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Are the Churches Too Narrow?
교회는 지나치게 편협한가?
 
Professor: I think perhaps, in the final twenty minutes tonight we might ask anyone who has something that is really bothering him to come forth and speak up.
교수 : 앞으로 남은 20분간 어떤 문제로 번민하고 있는 학생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어떨까 합니다.
 
Student: Something has been bothering me. I presume that others may feel the same way. I have been raised in the church since I was a very small child, and have been surrounded by a great deal of sentimentality and everything else. I can’t help but be somewhat offended — that is too strong a word really; I am not offended, but disturbed, shall I say — I can’t help but be disturbed by some of your comments,
Dr. Tillich, that religions proper, especially among denominations of the Protestant faith, become narrow through their necessity for self-definition. They tend to lose — I think that is what you are saying — much of their validity, of their ritual, of their Christian principles.
학생 : 저에게 번민거리가 하나 잇습니다. 아마 다른 분들도 그렇게 느끼시리라고 짐작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고 수다한 감상주의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표현이 지나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모욕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박사님의 어떤 말씀이 저의 마음을 교란시켰습니다. 즉 기성 종교들 특히 개신교의 교파들 중에는 자기 정의의 필연성 때문에 편협화되었다는 말씀 말입니다. 제가 이해하기까지는 기성 종교가 그것의 타당성과 예전(禮典)과 기독교적 원리를 상실한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Dr. Tillich: Oh, you see, these were general historical remarks. They do not apply to the last discussion, which concerned secularism. Of course there exist fundamentalist movements which simply put up a wall against every thought that would disturb the fundamentalist tradition, and I cannot take them seriously theologically. But what one must take seriously in terms of the whole development of church history is what happened to the Roman church in the Reformation, when it was put on the defense. When you really study church history — the glory of the Roman church and the glory of the old Greek churches in their continual openness toward innumerable elements, allowing the development of different schools such as the Realists and Nominalists, Thornists and Augustinians, and so on — and see the sudden restriction of such freedom by the Council of Trent in the sixteenth century, why then you know what I mean with respect to the Roman church. It has become in all its dogmatic development extremely narrow, and Pope John’s recognition of this was a really great experience for me after seventy-six years. He realized that this narrowness cannot be maintained, or the Catholic church would become completely irrelevant. That is the basis for the present Council. And you have heard and seen how strong the resistance is against his reform. But in many regions — some American, almost all French, German, and British — there is a tremendous desire for it. The Spanish and South American bishops are, of course, the most tradition-bound, hierarchical, and immovable. That is a fact.
Protestantism, also, was once very open. There were many different movements — the Lutheran, the Reformed, and then new divisions between Luther and Calvin, and the Anglican Reformation. The Baptist and other radical evangelical movements followed. But then, in their struggle against the Roman church, they were all forced down to particular confessional expressions. This occurred on the Continent by command of the emperor, according to the law of the Holy Roman Empire, which in a certain sense embraced all Europe. Every religion had to express itself definitively. And the theological struggles commenced. Protestantism would really have been in danger of eradication if it had not permitted itself to make a compromise, at least in this sense: by expressing itself in dogmatic statements in order to be acknowledged by the law of the Holy Roman Empire. These facts lie behind the dogmas.
In America, I would say that denominations do not seem to try to defend themselves at all against other denominations. It is an interdenominational situation — the Protestant spirit everywhere. When you come from outside, you notice this. Evangelical or Reformed, Congregational or Methodist, there are very few particular confessional elements which are still of real importance today.
Now narrowness always develops when we become defensive, when we become fundamentalist and do not listen to any historical inquiry, when we have a non-Copernican world view and do not dare to say anything else. But Protestantism is not very defensive now. Today, with respect to the Roman church, co-operation is increasing. With respect to the secular world, the defense against secularism —this is now the great issue — must not be a narrowing down. The church must take the secular into itself and transform it, as the old church did when it took all the great values of both the classical Greek and the Hellenistic realm into itself, besides the basic Jewish strain. This also occurred in the Middle Ages with the Germanic-Romanic tribes; the church took them in. And I do not see any other way of reinvigorating Christianity.
틸리히 ; 그렇습니다만, 그것은 일반적인 역사적 평가들입니다. 그것은 세속주의를 취급하였던 지난 번의 토의에는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근본주의적 전통을 교란시킬지도 모를 모든 사상에 대하여 높은 담을 쌓는 근본주의의 운동들이 있는데도 그들을 신학적으로 심각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역사의 발전 전체를 통하여 심각하게 취급해야 할 문제는 종교 개혁이 일어날 때 로마 교회가 취한 방어적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사를 깊이 연구하고-로마 교회의 영광과 허다한 요소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개방적인 낡은 희랍 교회의 영광, 그리고 실재론자들과 유명론자들, 토마스주의자들과 어거스틴주의자들 등의 상이한 학파들의 발전을 허용한 것을 연구하고-16세기에 개최된 트랜트(Trent)회의에 의해서 그 자유가 급작스럽게 제한 받게 된 것을 알게 될 때 내가 로마 교회와 관련하여 언급하는 사실의 진의를 여러분은 깨달을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교의적 발전에 있어서 극히 편협화되었습니다. 교황요한이 이 사실을 인식하였다는 것은 나의 76년의 생애에 더할 수 없는 큰 경험입니다. 그는 이 편협성이 지탱될 수 없다는 것과 가톨릭 교회는 완전히 타당성을 잃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지금 진행중인 바티칸 공의회의 기초입니다. 이 개혁에 대한 저항이 얼마나 치열한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고 또한 보았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일부와 프랑스, 독일, 영국의 전역을 포함하는 여러 지역에서 개혁에 대한 굉장한 요구가 노출되고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스페인과 남미(南美)의 감독들은 가장 전통주의적이고 성직 계급 제도적이며 부동적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개신교도 한때는 매우 개방적이었습니다. 루터교, 개혁교, 그 다음에는 루터와 칼빈 사이의 새로운 분열, 그리고 성공회의 종교 개혁 등 여러 가지 다른 운동이 있었습니다. 침례교와 그 밖의 극단적인 복음주의 운동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 교회와 투쟁하는 어간에 특수한 고백적 표현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유럽 전체를 통어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법에 따라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대륙의 판도위에 야기되었습니다. 종교마다 자신을 결정적으로 표현해야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학적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개신교가 스스로 타협을 감행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더면, 근절될 위험성에 직면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타협이란 곧 개신교가 신성 로마 제국의 법에 의해 인정 받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교의적 진술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교의의 배후에 있는 사실입니다.
미국에서는 교파들이 다른 교파들에 대하여 자기 자신들을 전혀 방어하려고 들지 않는 듯합니다. 이것은 초교파적 상황 곧 개신교 정신이 어디에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외부에서 들여온다면 이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복음교회나 개혁교회, 회중교회나 감리교회,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아직도 중요성을 띠었다고 보이는 독특한 고백적 요소를 가진 교회는 별로 없습니다.
이제 편협화는 항시 우리가 방어적일 때, 근본주의가 되어 어떠한 역사적 물음에도 경청하지 않을 때,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을 가지고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말하려 들지 않을 때 발전하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개신교는 그리 방어적이 아닙니다. 오늘날 로마 교회와의 협동은 증진일로에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가 당면한 큰 문제는 세속 세계와의 관계입니다. 세속주의에 대한 방어가 편협화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것을 용납하여 그것을 변질시켜야 합니다. 옛 교회는 고전적 희랍과 희랍 문화 영역의 훌륭한 가치들을 받아들여 그 일을 단행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또한 중세기에 있어서 독일계 로마 민족과 함께 야기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 밖에는 기독교를 다시 생기있게 만드는 방법이 나에게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Are Christian Symbols Necessary?
기독교적 상징은 필요한가?
 
Student: Dr. Tillich, one difficulty I have is in seeing how we are going to combat secularism with a symbol-less and apparently content-less religion as compared with the old creeds, which admittedly may have gone too far in the other direction and become narrow. How are we going to combat a vibrant faith with plenty of content in it, like Communism, with a highly abstract, highly intellectualized sort of Christian theology in which the old symbols have been destroyed?
It seems to me that you do make a distinction between signs and symbols, and that you admit that symbols, especially the central symbols of faith, do not simply point to the divine reality but in some degree participate in that reality. This is especially true of the symbols pertaining to Christ. And certainly the traditional religion of Christianity has not been a religion of the symbol. It has been the religion of a person, very much so, and in this respect is quite different from the mythical religions of the East. This to me is tremendously important: if you abandon or theorize yourself out of this position, you are still left confronting highly personalistic Western humanistic forms of secularism such as Communism. This may be a source of weakness in your theology rather than strength.
 
학생 : 틸리히 박사님, 제가 느끼는 난점은 편협화된 낡은 교리에 비하여 볼 때 상징과 내용이 결여된 종교를 가지고 세속주의와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낡은 상징을 이미 파괴하여 버린 극히 추상적이고 지성화된 기독교 신학으로써 공산주의와 같이 풍부한 내용을 갖춘 선동적 신앙과 어떻게 대결할 것입니까?
박사님은 표시와 상징을 구별하시고 상징 특히 신앙의 중심적 상징은 신적 실재(divine reality)를 지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정도 그 실재에 참여한다는 입장을 취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특히 그리스도에 관계된 상징의 경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기독교는 확실히 상징의 종교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인격의 종교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동양의 신비 종교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즉 만일 우리가 이 입장을 포기하거나 그것을 이론화하여 버린다면, 우리는 공산주의와 같은 극히 인격주의적인 서구의 인본주의적 형태들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박사님의 신학적 강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약점의 근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Dr. Tillich: Yes, now as to personalism, if you call Communism "personalistic," this is a problem. But Communism is collectivistic. We cannot call it personalistic. Of course there is the Judeo-Christian background there, which makes it at least officially take heed of the individual person. But in many respects it also represses the person. So I would not agree with you on this point.
As to Christianity, it has not lived in the person of Jesus. This assumption constitutes a very small line of church history, adopted by the Pietists and then the liberal theology of the nineteenth century. Both are "Jesus" theologies. The classical Christian theology was never "Jesus" theology, but rather "Christ" theology. And Christ is the symbol, based of course on the image of the man Jesus in the New Testament. That is true. And that is the most resistant element in the symbol, which no secularism has completely destroyed (because even the greatest secularist recognizes the spiritual power in this image). Classical, traditional Christianity has lived in symbols — Creation, Fall, reconciliation, salvation, Kingdom of God, Trinity. These all are great symbols, and I do not wish to lose them.
What you now ask is: Can these symbols, which participate in the power of what they represent — can they be rediscovered in their fundamental meaning? We cannot replace them, but they may die. Then they are gone. It is still possible that the reality of the event which we call "Jesus the Christ" might develop new aspects for itself, but I doubt it. So we are faced with a desperate task, in some respects: to try to reinterpret Christian symbols so that they may become powerful again. There are many people who believe this is impossible, and thus the whole task means a risk — the risk of faith that there are still unexhausted powers in the Christian reality, to be re-examined more fully by more intimate relations with the non-Christian religions, which in turn will also change the symbolic material. The question is now open. We stand at a moment in history in which the openness of the situation is due to its urgency. Christianity is at present not narrow, but has become open to interpretation except in particular groups. And I believe openness is so much an element of Christianity itself, of its original meaning, that this may be the way in which it can be reinterpreted to make it fully alive. But I would not dare to prophesy the outcome.
틸리히 : 인격주의에 관하여 한 마디 한다면, 학생은 공산주의를 인격주의적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문제가 됩니다. 공산주의는 차라리 집단주의적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인격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유대-기독교적 배경이 깃들이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최소한도 공식적으로나마 개인의 인격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여러 면에서 인격을 억압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점에 있어서 학생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부언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인격으로 생존하여 오지는 않았습니다. 예수의 인격을 위주로 한 가정(假定)은 교회 역사의 지류를 형성하는 것으로서 경건주의자들과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이 그것을 채택하였습니다. 양자는 모두 예수신학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전적 기독교 신학은 예수신학이 아니라 차라리 그리스도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상징으로서 물론 신약성서에 나타난 인간 예수의 이미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그 상징 속에 있는 가장 저항적인 요소로서 어떠한 세속주의도 그것을 파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세속주의자마저도 그 이미지 속에 있는 정신적 힘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고전적, 전통적 기독교는 창조, 타락, 화해, 구원, 하나님의 나라, 삼위일체 등, 이러한 상징의 덕분으로 생존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모두 위대한 상징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학생이 던진 질문은, 자기가 대변하는 실재가 지닌 힘에 참여하는 상징이 본래적 의미를 다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을 대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잃고 사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건의 실재가 새로운 면을 스스로 타개할 가능성도 아직은 있습니다만, 나 자신은 그것에 대하여 회의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면에서 기독교적 상징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그것을 재해석하여야 할 절망적인 과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제는 하나의 모험, 곧 기독교적 실재에는 아직도 무진장의 힘이 남아 있으며 그것은 상징적 자료를 교체시켜 줄 비기독교적 종교들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보다 충분한 재검토를 받아야 한다는 신아으이 모험을 말합니다. 여기서 그 질문은 문제성을 띠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상황의 전개가 위급한 문제로 된 역사적 순간에 서 있습니다. 기독교는 현재로서 편협하지 낳으나, 특수한 집단들을 제외하고서는 재해석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개방성이 기독교 자체와 그것의 본래적 의미의 요소이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생기를 얻도록 재해석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결과를 예언할 용기는 없습니다.
 
Student: I see a great danger for the mass of society in dismissing or losing religious symbols, even if they have become demonized in their relation to believers. If we remove these symbols from their lives, they will more than likely attempt to find other symbols to fill the void. They will join the quasi-religions and move completely in the opposite direction. I think this is clear. I know of several cases, here on campus, of students whose fundamental background in religion has been thoroughly shattered. And in rejecting their own form of Christianity they have rejected all forms of religion, and have accepted "Ban the Bomb" or some ultra-humanistic or ultranationalistic form of quasi-religion. And I think there is great danger in this.
 
학생 : 비록 종교적 상징이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악마화되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파기되거나 상실될 때에는 사회 대중에게 큰 위기를 초래함을 보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생활에서 그 상징을 제거하여 버리면, 그들은 공허를 메우기 위하여 다른 상징을 찾아 헤맬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유사 종교에 가담하여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달릴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학원에 재학중인 몇몇 학생들의 경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종교의 근본 배경이 산산히 부서진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은 자기들이 가졌던 기독교의 형태를 배격하면서 아울러 모든 형태의 종교를 배격하였고, ‘폭력 반대’(Ban the Bomb)나 유사종교의 극단의 인본주의적 내지는 극단의 국가주의적 형태를 수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에 큰 위험성이 개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Dr. Tillich: Yes, you are absolutely right. Therefore no symbol should be removed. It should be reinterpreted. And in the pulpit, the minister’s criticism should never be so tactless that people in the situation you describe are offended. For instance, on the campus here, or any campus in America, we will find people who criticize not only the special distortions of the religious symbol but the real meaning of the symbol itself. What I therefore think is very important is that in church schools, church sermons, and their homes young people should be given answers to the questions they have to face later anyhow. Children should receive answers as soon as they themselves ask questions. Children are great metaphysicians. They usually ask, at a very early age, the fundamental questions, much more fundamental than most philosophers ask today. And to answer them, it is extremely important that the church remove all superstitious and fantastic connotations from its symbols, in order to make them understandable as meaningful expressions of experience.
Now take the term "estrangement." When I speak in any college about estrangement, everybody knows what I mean, because they all feel estranged from their true being, from life, from themselves especially. But if I spoke of their all being Sinners, they would not understand at all. They would think, "I haven’t sinned; I haven’t drunk or danced," as in some fundamentalist churches, or whatever they understand as sin. But estrangement is a reality for them. Yet estrangement is what sin means — the power of estrangement from God. And that is all it means.
I believe that this is a possible solution to our problem, because the reality of Christian teaching about the human predicament is confirmed by every bit of writing, painting, or philosophizing of the entire twentieth century. And when we demonstrate this, and show how the great existential tragedies occur today, as in the past, we can make young people understand the human predicament. This is the point of my whole systematic theology.
Be very strict with your ministers or religious friends, when they throw these distorted and necessarily misunderstood symbols at you, and always trap them by asking, "What do you really mean?" And then you will find that it is perhaps possible to teach them the decisive lesson, namely, that these symbols can no longer be used in their distorted way.
틸리히 : 학생의 말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니까 상징이 제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강단에 선 목사가 하도 재치 없이 비판을 퍼붓기 때문에 학생이 언급한 바와 같은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도 안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 학원에서나 미국의 어느 학원에서나를 막론하고 종교적 상징의 특별한 왜곡만이 아니라 상징 자체의 참된 의미까지도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젊은이들은 그들이 어차피 차후에 직면할 문제에 대한 대답을 교회 학교, 교회의 설교, 그들의 가정에서 미리 얻어 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동들은 그들이 질문을 던지기가 바쁘게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들은 위대한 형이상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현대 철학자들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그들에게 상징을 경험의 의미 깊은 표현으로 이해시키기 위하여 상징에 부착된 미신적이고 환상적인 의미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소외’(疎外)라는 말을 들어 봅시다. 내가 어느 대학에서나 소외에 대하여 말하면 모두 내가 뜻하는 바를 깨닫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자신들의 참 존재, , 특별히 자기 자신들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에, 내가 그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의 교회에서와 같이 혹은 그들이 죄를 뭐라고 이해하든 간에 나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 나는 술에 취하거나 춤을 추지 않았는데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외는 그들에게 하나의 실재입니다. 소외는 신으로부터 소외하는 힘 곧 죄를 뜻합니다. 이것이 소외가 말하는 전부입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20세기의 모든 문학과 예술과 철학이 인간의 궁지(窮地)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확증하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실증하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거창한 실존적 비극들이 일어남을 보여 줄 때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인간의 궁지를 이해시킬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조직 신학 전체의 초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사나 종교적 친구들이 왜곡되고 오해된 상징을 여러분에게 내던질 때 그들을 엄격하게 대하고 당신은 진정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음으로써 언제나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세요.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그들에게 결정적인 교훈 곧 그런 상징은 이미 왜곡된 형식으로는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Student: I was talking to a friend of mine who doesn’t go to church, mainly because her parents didn’t. And her sister happens to be radically antichurch in all ways, shapes. and forms. We got talking about the same thing you are discussing now — estrangement rather than sin. She was truly excited about the idea and said, "Well, I have never heard anything of this sort in a church." And I said, "Well, I haven’t either in any church I’ve gone to." Is there any example you can give of an organized church today that understands and presents this point of view?
 
학생 ; 저는 주로 부모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어떤 여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언니는 우연하게 무좋건 극단의 반()교회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박사님이 방금 논의하신 소외에 대하여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친구는 이 개념에 대하여 실제로 흥분하여 말하기를 , 나는 교회에서 그런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기를 나도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을 제시하고 이해시키는 제도화된 교회가 사실상 있는지 실례를 보여 주실 수 없습니까?
 
Dr. Tillich: No, I do not believe that you can name a particular church. But there are many good young ministers everywhere in the country who make the attempt. And for this very reason they are often dismissed.
 
틸리히 ; 어떤 특정한 교회를 지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시도하는 젊은 목사들이 이 나라에 많이 산재하여 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들은 간혹 파면당하기도 합니다
 
 
NOTES:
1. "But he was wound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bruised for our iniquities: the chastisement of our peace was upon him; and with his stripes we are healed."
2. In that year the Verdun Treaty broke up Charlemagne’s empire.
3. Reinhold Niebu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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