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폴 틸리히 / 궁극적 관심 Ultimate Concern 6) Fifth Dialogue 다섯번째 대화 (원문/번역)

이준원 (충북노회,우암교회,목사) 2013-11-01 (금) 09:11 9년전 6818  

 
 
Fifth Dialogue
 
다 섯 째 대 화
 
 
 

 
Professor: The formal topic for today is "Christianity and the Dialogue with Judaism and Islam."
교수 : 오늘의 공식적인 주제는 기독교와 유대교 및 회회교와의 대화입니다.
 
Student: The first thing I have asked myself concerning this topic is: What would be the basis of a dialogue between Christianity and Judaism, and is a dialogue even possible with Islam? Of course there are certain things common to each. They have the same roots, we might say. They all arose from the Hebraic Old Testament tradition and were built to a large degree on what might be called a prophetic view of the Old Testament. They have a common sense of history, which is that history is not fulfilling in itself but that God is working through history to the fulfillment of his aims. This is in direct contrast to some of the other views of history of the times, such as the Greek or Roman, which considered history to be more or less a meaningless cycle.
All three believe in one universal God over all the world. Both the Christian and the Islamic faiths hold that their message is universal. And whereas the older Judaic tradition realizes that it is more or less an ethnic faith, still it believes that its God is the God of the world; there are no others.
Now these points in common should be recognized before we can have any type of discussion. But there are also, of course, many divergences and differences of viewpoint. For instance, Judaism gives primacy to the law over the prophets, and says that obedience to the law is the instrument for the fulfillment of God’s will. Christians subordinate the law, elevate the prophets, and substitute Christ as the road to salvation. And Islam stresses the will of God in salvation, almost to the exclusion of free will.
Islam is both a faith and a code. It seems to approach the outlook of Judaism in holding to a code of law. But there is a different emphasis. This code is an expression of faith, a submission to God, rather than a road to the good life.
Both Christianity and Islam stress the importance of the individual and his means of salvation, not to the exclusion of the group, but over the group. Judaism has a unique capacity for keeping faith in both folk and nationalist groups as well as an attachment to the world. It might be said that the genius of the Judaic tradition has placed the destiny of the group at the center of its concern.
As the basis for dialogue, these are the points that come to my mind. I have a list of questions here as to the content of a dialogue between these religions. I would like to get some discussion on all of them from the group as well as from Dr. Tillich.
 
학생 : 이 주제와 관련하여 저에게 떠오르는 첫째 질문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대화의 근거는 무엇인가, 또한 심지어는 회회교와의 대화마저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일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히브리적 구약성서의 전통에서 생겨났고 따라서 소위 구약성서 예언자들의 견해에 따라 형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에 대하여 공통적인 의식을 가지는데, 역사는 스스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기의 목적을 역사를 통하여 성취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어느 정도 무의미한 회기(cycle)라고 상정하는 희랍인이나 로마인의 역사관과는 직접적인 대조가 됩니다.
세 종교는 모두 세계를 통치하는 하나의 보편적 신을 신앙합니다. 기독교 및 회회교 신앙은 그들의 메시지가 보편적인 것이 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고대적인 유대교 전통은 그 종교가 어느 정도 민족적 신앙임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의 신은 세계의 진이요 다른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의 토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우선 이러한 공통점을 인식해야 할 줄로 압니다. 물론 견해에 있어서 많은 갈림과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유대교는 예언자들에게보다는 차라리 율법에다 우월성을 두며, 율법에의 복종은 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낮추고 예언자들을 높이며 그리스도는 구원에 이러는 유일한 길이라고 봅니다. 회회교는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는 거의 제거하여 놓고 신의 뜻만을 강조합니다.
회회교는 신앙과 법전(法典)을 내세웁니다. 그것이 율법의 법전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 유대교에 매우 근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강조점에는 또한 다른 바가 있습니다. 이 법전은 선한 생활로 나아가는 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앙의 표현이요, 신에 대한 복종입니다. 기독교와 회회교는 집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서 개인의 중요성과 구원의 방법을 강조합니다. 유대교는 신앙을 민족과 국가주의적 집단들 속에 보관하는 동시에 세계에 부착시키는 유일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유대적 전통의 특징은 집단의 운명을 관심의 초점으로 삼는 데 있다고 말해서 좋겠습니다.
이상의 것들이 대화의 근거로서 제 마음에 떠오르는 요점들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 종교들 간의 대화의 내용에 관한 질문 몇 가지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틸리히 박사님께서 토의에 적극 참여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Is a Judeo-Christian Dialogue Possible?
유대교와 기독교의 대화는 가능한가?
 
 
Let us start with the first question. Judaism has always been an ethnic religion to a large extent, and there is a tension between its particularistic and universalistic elements. For instance, to the Jews there is one God over all the world, but he has a special relation to the Jewish nation. The Jews are the race chosen by God. They are unique; everybody in the world does not have to be a Jew. Judaism has therefore never tried to put forth the universality of its claims, but has recognized a certain validity in other religions. This has undoubtedly contributed to the possibility of a dialogue with Christianity. Now, Dr. Tillich, should Christianity judge itself in the light of this principle and could it broaden its capacity for tolerance by so doing?
 
첫째 질문부터 시작해 보실까요? 유대교는 대체로 민족적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특수 주의적 요소와 보편 주의적 요소 사이의 긴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유일한 신이 온 세계를 통치하는 동시에 그는 유대 나라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신이 선택한 민족입니다. 그들은 특수하므로 세계 안에 있는 사람 누구나가 유대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그의 주장의 보편성을 공포하려고 애쓴 일은 없고 오히려 다른 종교에 잠재하고 있는 타당성을 인정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와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틸리히 박사님, 기독교는 이 원리를 따라 자신을 평가하여야 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관용력을 확장할 수 있겠습니까?
 
Dr. Tillich: I believe it would be good if first a few of the Students talked to you and tried to answer some of these things.
틸리히 : 먼저 몇 학생들이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문제의 해답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Student: What is the validity in other religions that you have in mind?
학생 : 박사님이 생각 하시는 바 다른 종교가 지닌 타당성이란 무엇입니까?
 
Dr. Tillich: Could you please speak a little louder? The old man’s ears are not too good.
틸리히: 좀 더 크게 말씀하세요. 이 늙은 사람의 귀가 그리 신통치 않습니다.
 
Student: What validity has Judaism recognized in other religions?
학생 : 유대교는 다른 종교의 어떤 타당성을 인정합니까?
 
Student: Well, Judaism is an ethnic religion, and in Old Testament times all the other religions were ethnic religions. Now, whereas the Jews felt that their God was the God, still they recognized the right of other nations to express their religions in their own ways. So, even though they believed their own faith was the only proper religion, they saw some value in the other religions.
학생 : 유대교는 민족적 종교입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는 다른 모든 종교가 민족적 종교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이 유일신(the God)이라고 느꼈으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다른 국가가 자기네의 종교를 제 멋대로 표현할 권리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유일한 고유의 종교라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에도 얼마간 가치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Student: Then it seems to me that this does not really contribute to the possibility of a dialogue with Christianity, because Jew and Christian alike, for centuries, have each declared the special validity of their own faith over and against others; and it seems to me that no real dialogue can come about until they recognize that another religion may be completely valid in its own terms. Beyond this, Judaism might recognize that Christianity has validity even according to Judaism’s standards, and the converse would have to apply to Christianity as well. It seems to me that until this stage is, realized, no real dialogue can come about on other than a superficial level.
학생 : 그렇다면 이것은 기독교와의 대화의 가능성을 위하여 별로 공헌하지 못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한결같이 다른 종교에 대하여 그들의 신앙이 유별한 타당성을 내포한다고 수 세기 동안 선포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다른 종교의 고유한 타당성을 인정하기 전에는 진지한 대화가 성립되지 않을 듯합니다. 더 나아가서, 유대교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표준에 따라서도 타당성을 가진다고 인정하고 또한 기독교 자체도 유대교를 그렇게 취급할 때 대화는 가능하게 됩니다. 여하간 이 단계가 이해되기 전에는 대화는 극히 피상적인 수준에서 맴돌게 될 것 같습니다.
 
Student: Well, hasn’t this already happened somewhat, particularly among the theological faculties, as at Union Seminary and the Jewish Seminary in New York? There is a great deal of this dialogue, and they respect each other completely. Certainly Will Herberg, in his books, keeps acknowledging his debt to Reinhold Niebuhr and other Christian scholars. I don’t think this dialogue is away out in the future.
학생 : 그러나 정도는 이미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과와 유대교 신학교에서처럼, 특히 신학교 교수들 간에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대화가 상당히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차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윌 헐버그(Will Herberg)는 그의 저서들에서 라인홀드 니이버와 그 밖의 기독교 학자들에게 크게 신세 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대화가 미래에서만 기대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Student: It seems to me that there is a natural dialogue, or basis for understanding, because the concept of God is similar in many ways in both Christianity and Judaism. God must stand for justice. And though the Jew’s concept of God and justice is more closely related to the law, and the Christian more closely related to revelation through Christ, still there is a similarity and there is bound to be some dialogue. I wonder, too, about the difference among the Jewish groups themselves, because all Jews are not alike. There are Reform Jews and traditional Jews. More dialogue would be possible perhaps with the Reform groups.
 
학생 : 저에게는 자연적인 대화나 또는 이해의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나 유대교의 신 개념이 여러 면에서 근사하기 때문입니다. 신의 정의(正義)를 대변함에 틀림없습니다. 유대인의 신과 정의의 개념은 율법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고 기독교인의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와 보다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아직도 근사성이 엿보이며 대화를 나누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유대교 집단들 자체 간의 상이성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일률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개혁파 유대인들과 전통적 유대인들이 갈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개혁파 집단들과의 대화가 차라리 수월하지 않을까 합니다.
 
Student: I wonder if our chief problem isn’t the social and ethnic prejudice that exists among Christians, in America for instance. If we can remove this, we can move into a dialogue between the religions rather than a dialogue between the two groups as social groups.
학생 : 우리의 주요한 문제는 예를 들면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 간에 존재하는 사회적 및 민족적 편견이 아닐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제거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집단으로서의 두 집단 사이의 대화보다는 차라리 종교, 사이의 대화를 추진할 수 있습니다.
 
Professor: Is it possible to have a dialogue so long as your religious definitions refer to the narrower concept of religion, as explained earlier by Dr. Tillich? Or can dialogue take place only when there is some recognition of his broad definition of religion as ultimate concern?
교수 : 우리의 종교적 정의(定義)들이, 틸리히 박사께서 일찍이 설명하신 바와 같이, 종교의 보다 편협한 개념을 언급하는 한 대화의 길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궁극적 관심과 같은 종교에 대한 그의 폭 넓은 정의가 어느 정도 인정받을 때에만 대화가 가능하겠습니까?
 
Dr. Tillich: Perhaps I may now offer some comments. The dialogue between Christian and Jew has gone on since the time of Jesus. It became very hot and radical in Paul’s time. The converted Jews under the leadership of James, and partly Peter, attempted to consider Christianity as a Jewish sect within the Jewish law. Christianity was able to become a world religion only because of what Paul did for it, namely, breaking through the narrow limits of one of the many Jewish sects and groups which then existed, such as the Essenes and the movement of John the Baptist. They all were particular Jewish groups confined within the boundaries of the Jewish tradition. And the problem, of course, was intensified by the fact that the Christians, as my Jewish friends like to say, stole the Old Testament from the Jews and made it the basis of their own religion.
One may simply say that there has been a dialogue on all these questions ever since Tertullian’s classic first dialogue in the third century. From the time when I returned from World War I in 1919 until yesterday, so to speak, when I wrote a letter to him, I have enjoyed a continuous dialogue with a non-Orthodox Jew who was not a member of any theological faculty. It has been one of the most fruitful things I have experienced in my whole academic, theological, and religious life. He is a Professor of economics in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in New York City. But we met long before we came to America, in the early twenties in Berlin. And this dialogue has been so rich because we have not just been repeating the same old problems, but have considered our fundamental differences, based on the same original prophetic tradition applied to all kinds of things. Our last dialogue, which was a very sharp exchange, concerned the meaning of space exploration; and in the discussion of this problem the fundamental differences again appeared. But our friendship has increased with each struggle, and so it should be.
In any case, I learned something very early by this experience, long before Reinhold Niebuhr expressed it publicly: that a mission of conversion directed toward the Jews living in the Western world — I am not sure about the others — is an impossibility. Here, definitely, missionary ideas have to be replaced by dialogue ideas and openness. If these Jews wish to approach us as Christians, we can always remain open, but we cannot press. I experienced a very interesting confirmation of this idea when I discussed it in Chicago two years ago in a room of highly educated rabbis. The son of Karl Barth, Markus Barth, who is a New Testament scholar, told me of his interpretation of the Letter to the Ephesians, which is, if not directly Paulinian, certainly secondarily so in origin. In it there is the idea of Jews and Christians living under the same ultimate covenant; and Markus Barth affirmed, from his New Testament point of view, the same interpretation. On this basis, I would say that dialogue is possible, although I have never carried on one with an Orthodox Jew in the same way.
Some of you have said that dialogue might be easier with a non-Orthodox Jew, and I believe that is true because bondage to the ritual in Orthodox Judaism makes a free approach much more difficult. But even there it is not impossible. Of course, from the Jewish point of view the same difficulty would exist with fundamentalist Christians or strongly ritualistic Christians such as Episcopalians. There would therefore certainly be some very difficult situations, but dialogue is otherwise quite possible.
Let me conclude this comment with a statement which I believe is very important for the whole of Christianity and for the problem of anti-Semitism and all that is implied in it. There is no special "Jewish" problem with those Jews with whom I have had conversations. They are not national or tribal in outlook; they all stand on the side of the prophetic tradition. The greatest thing the prophets did — especially Amos, of those whose writings we have — was to warn that God would cut his ties with the elected nation if it did not uphold justice. These words of Amos are one of the greatest turning points in the whole history of religion anywhere in the world, because for the first time a religion based on blood and soil, as was Judaism in common with other religions, is threatened with being cut off without damaging the position of its God. Previously, if a nation was lost, the god was also lost just because it was the god of that nation; the best thing that could happen to such a god was to be put into the Roman Pantheon or somewhere else as a subordinate god or demonic angel. But his divinity was lost, because his sociological blood-and-soil basis was lost. Now Amos and the other prophets elevated Jehovah to an impregnable position, above the history of Israel, and thus saved the God of the Jews. So the Jewish God is not a problem.
The problem in a dialogue with the Jews is this: Has the Messiah, the announced "Anointed One" who will bring the new state of things, already come, namely, in Jesus in so far as he is the Christ; or do we have to wait for another one? Always then there is a very clear point at issue, and when we come to that point, my Jewish friend never gives in. He says that the world has not changed during all these centuries. The twentieth Christian century is the worst. Never have such terrible things happened in world history as in this century; and if after two thousand years the world has not changed, then this is the obvious proof that the Messiah has not yet come. So we must expect his coming.
From this follows a second difference my Jewish friend would emphasize, and so would most of the Jews whom I know theologically: the inner historical fulfillment, the time of justice. Here we have the inner connection between socialism (in the sense of social justice) and Judaism in the idea of justice being fulfilled in time and space. The true Christian idea is that the fulfillment is only fragmentarily in time and space, but in reality beyond time and space. And Christians interpret the death of Christ as the expression of this fact.
These are all preliminary answers, but perhaps they may give you some material to discuss out of the very intensive experience I have had regarding these problems.
틸리히 : 이제는 내가 코멘트를 몇 가지 붙여 볼까요? 기독교인과 유대인 간의 대화는 예수 시대 이후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이 바울 시대에 와서는 열을 띠고 극단적으로 흘렀습니다. 야고보와 부분적으로는 베드로의 영도 아래 있던 개종한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유대교 율법을 추종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간주하고자 하였습니다. 기독교가 하나의 세계 종교로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엣세네와 세례 요한의 운동과 같은 그 당시에 존재하던 유대교의 많은 종파들과 집단들 중의 하나가 지닌 편협한 한계를 뚫고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교 전통의 한계 안에 갇힌 특수한 유대교 집단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유대인 친구들이 즐겨 말하듯이,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의 손으로부터 구약성서를 훔쳐서 그것을 자기네 종교의 기초로 삼은 사실 때문에 문제는 악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한 대화는 제 3세기에 터툴리안이 처음으로 고전적 대화를 벌인 이후 계속되어 왔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내가 1919년 제 1차 대전에서 돌아온 때부터 어제 어떤 비정통적 유대인에게 편지할 때까지 나는 신학교 교수도 아닌 그 이와 계속적인 대화를 즐겨 왔습니다. 그것은 내가 학문, 신학, 종교 생활 등 전반에 걸쳐서 경험한 가장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그는 뉴욕 시에 있는 사회과학 연구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경제학 교수입니다. 우리는 미국에 오기 훨씬 전인 1920년대 초엽에 베를린에서 만났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그토록 풍요하게 된 것은 과거에 취급했던 동일한 문제들을 반복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모든 문제에 적용된 본래의 예언자적 전통에 입각하여 우리의 근본적인 상이점을 숙고한 데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번에 대화는 우주 개발의 의미데 관한 것이었는데 대단히 날카로운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토의할 때 근본적인 상이점이 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은 싸울 때마다 더하여 갑니다. 또한 그래야만 될 것입니다.
여하간 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라인홀드 니이버가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훨씬 이전에 어떤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곧 다른 민족에 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서구에 사는 유대인들을 개종시키려는 선교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 정신은 대화의 정신과 개방성으로 반드시 바꾸어져야 합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접근하기 원하면 우리는 언제나 개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무리로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 생각의 매우 흥미 잇는 확실성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2년 전 시카고에서 고도의 교육을 받은 랍비의 방에서 토론할 때였습니다. 칼 바르트의 아들이자 신약학자인 마르쿠스 바르트(Markus Barth)가 나에게 에베소서에 대한 그의 해석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 편지가 그 기원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바울적인 것은 아니지만 2차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동일한 궁극적 계약 밑에서 살고 있다는 사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쿠스 바르트는 그 해석을 그의 신약성서의 관점에서 확인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 위에서 비록 정통 주의적 유대인과의 대화는 실현해 보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최소한도 대화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분은 비정통주의적 유대인과의 대화가 보다 수월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정통 주의적 유대교가 의식(儀式)에 얽매이어 있다는 사실이 자유로운 접근을 훨씬 곤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대화가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이나 또는 감독교회 교인들처럼 극단적인 의식주의적 기독교인들과 대화하고자 할 때 위와 동일한 난관에 부딪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곤란한 상황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제쳐 놓으면 대화는 아주 가능합니다.
나는 기독교 전체와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문제를 위하여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한 마디 하고 이 코멘트를 끝맺겠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대화를 나눈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유대인의 문제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전망은 국가적이거나 민족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예언자적 전통에 편승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우리에게 저서를 남겨 놓은 예언자들 가운데 특히 아모스가 한일- 은 신은 그가 선택한 국가가 정의를 수호하지 않으면 그것과 자기와의 인연을 끊어 버릴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아모스의 말은 세계의 종교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교처럼 피와 땅을 근거로 한 일개 종교가 처음으로 자기의 신의 지위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이 제거당할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일개 국가가 소멸되면 신은 그 국가의 신이기 때문에 그 신 역시 소멸되었습니다. 그런 신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 있다면 로마 신전에서나 다른 곳에서 부수적 신이나 또는 악마적 천사로 갇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인 피와 땅의 근거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의 신성(神性)도 역시 상실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모스와 다른 예언자들은 여호와를 확고부동한 위치 곧 이스라엘의 역사 위에 올려 놓았고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신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신은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즉 만물을 새롭게 할 메시야 곧 선포된 기름 부음 받는 자가 그리스도인 예수 안에서 이미 오셨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더 기다릴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언제나 여기에 분명히 문제의 초점이 있는데 우리가 그 초점에 이르게 되면 나의 유대인 친구는 일보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지난 2천 년 동안 세계는 변화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20세기는 한층 더 잔악합니다. 세계 역사상 이번 세기처럼 가공할 만한 사건들이 일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2천 년 후에 세계가 변화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메시야가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나의 유대인 친구는 물론 나와 친분이 있는 유대인 신학자들의 태반이 역설하는 두 번째 상이점은 내적인 역사적 완성 곧 정의의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회주의(사회 정의의 의미에서)와 유대교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정의가 완성된다는 사상에 대하여 내적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완성이 사실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단편적인 데 불과하다는 사상을 중심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 사실의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이상 말씀 드린 것은 모두 서론적인 대답에 불과합니다만, 내가 경험한 바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를 대할 때 토의의 자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Student: Well, considering the symbol of Christ does not Christianity state that the Christ existed in the world before the person of Jesus, as i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where it is said that he was before the world? In terms of salvation, would it not be possible to say that the symbol of Christ, or his essence, was in the Jewish nation before his actual coming, and that salvation therefore does not necessarily begin with the advent of Christ on earth but existed before his incarnation in Jesus?
학생: 그런데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상징을 논할 때, 그리스도는 세계보다 앞서 있었냐고 요한 복음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리스도는 예수의 인격보다 앞서 세계 안에 존재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구원과 관계시켜 본다면, 그리스도의 상징이나 그의 본질이 그가 실제로 오기 이전에는 유대 나라 속에 존재하였다는 것과 그러므로 구원은 그리스도의 강탄(降誕)과 더불어 반드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예수 안에서 사람이 되기 이전에도 있었다고 말할 수 없겠습니까?
 
Dr. Tillich: That is a very interesting question. Shall I answer it or wait for you? If not, I may say this much: the early Christian idea was first an historical fact. We should really use the symbol of the Anointed One because the term Christ has become the proper name of a man whose first name was Jesus and whose second name became Christ.
Even this combination we must divide again into two different images. "Jesus" was a very ordinary name of the time; and some one of these many persons named Jesus was called the Christ, meaning the Anointed One. Now this idea is even older than the Old Testament. The "Anointed One" comes probably from Egypt, out of the royal house of course, and from there went to Israel — a very old symbol with a long history.
But to answer your question: the early church did not express this idea with the word "Christ," when it said that he was in the world. They used another, Hellenistic term, Logos. And they also called this principle spermaticos, meaning the Logos, which like a seed is and was everywhere in the world, since the beginning of the world and of mankind. This Logos spermaticos appeared as an empirical, historical person in the Christ, but revelation and salvation were always operating in history even before the empirical embodiment of the Logos in Jesus. And even this is not the end. After the historical event, the power of the Logos continued and continues in terms of new insights and new revelatory experiences Under the guidance of the Spirit. Here is a description of the Universality of Christianity.
The Logos idea is the greatest expression of this universality. In pointing this out you were right, but you should not have used the term Christ, or symbol of Christ, for the reality of what appeared in Jesus in time and space. The Logos idea has been and is effective today in all history. That was the early idea, and you are correct when you say that this is the universality of Christianity. The early church was much more universal than it proved in later centuries.
틸리히 : 그것은 참으로 재미나는 질문입니다. 내가 그것을 지금 대답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좀 기다릴까요? 이의가 없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초기 기독교 사상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름 부음 받는 자라는 상징을 사용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예수라는 첫째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둘째 이름을 가진 사람의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의 결합을 두 개의 상이한 이미지로 갈라놓아야 합니다. ‘예수는 그 당시 대단히 평범한 이름이었는데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기름 부음 받는 자를 뜻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불려졌습니다. 이 사상은 구약성서보다도 훨씬 오래 된 것입니다. ‘기름 부음 받는 자라는 말이 애굽의 왕가에서 나와서 이스라엘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긴 역사를 지닌 상당히 오래 된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학생의 질문에 대답한다면, 초대 교회는 그가세상에 있었다고 말할 때 그 사상을 그리스도라는 말로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희랍 문화의 술어인 Logos(말씀 또는 이성)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원리를 spermalicos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세계와 인류가 시작된 이래 하나의 씨앗처럼 세계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spermalicosLogos가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인격으로 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시와 구원은 로고스가 예수 안에서 경험적인 구체성으로 이루어지기 전에도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것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이 역사적 사건에 뒤이어 로고스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 새 통찰력과 새 계시 경험으로 그 능력을 계속 과시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보편성에 관한 설명입니다.
로고스 사상은 이 보편성의 위대한 표현입니다. 학생이 이것을 지적한 것은 옮았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에서 예수 안에 나타난 실재를 위해서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상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좋았습니다. 로고스 사상은 역사를 통하여 그 효력을 발휘하였고 오늘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것은 초기에 나타난 사상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기독교의 보편성이라고 학생이 말한 것은 옮습니다. 초대 교회는 후기의 교회에 비하면 훨씬 보편적이었습니다.
 
Is Judaism a More Tolerant Faith?
유대교는 보다 관대한 신앙인가?
 
Student: Are there any more comments on what Dr. Tillich has said? If not, I’ll proceed to the second question. Judaism has a unique capacity for retaining both folk and national elements, in addition to world allegiance. Thus Judaism has a definite contribution to make in the area of enlightened and intelligent nationalism and other forms of group relations. Can Christianity and Islam profit from Judaism’s insights, or do the different structures of these religions make this difficult?
학생 : 틸리히 박사님의 말씀에 대하여 코멘트하실 분이 계십니까? 안 계시다면 둘째 질문으로 옮겨 가기로 하겠습니다. 유대교는 세계에서의 충성에 덧붙여 민족적 및 국가적 요인들을 보유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계몽적이고 지성적인 국가주의의 영역과 다른 형태의 집단 관계에서 결정적인 공현을 주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기독교와 회회교는 유대교의 통찰력에서 소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또는 이 두 종교가 지닌 상이한 구조 때문에 이것을 바라기가 어렵습니까?
 
Dr. Tillich: I have the feeling that this question is a little bit difficult. At least it is for me, and perhaps for some of you also. Could you condense it into one or two sharply defined questions?
틸리히 : 이 질문은 약간 어렵다는 느낌을 줍니다. 나에게는 물론이고 여러분 중에도 그런 느낌이 드는 분이 있을 줄로 압니다. 학생, 그 질문을 날카롭게 다듬어서 하나나 둘로 집약할 수 없겠어요?
 
Student: Well, this goes back again to the ethnic and nationalistic roots of Judaism, and it seems to me that Judaism has quite a bit to say about group tolerance and national tolerance and so forth. I wonder if Christianity and Islam can profit by Judaism’s experience?
학생 : 글쎄요, 그러면 결국 유대교의 만족적 및 국가주의적 근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유대교는 집단적으로, 국가적으로 관용성(tolerance)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회회교가 유대교의 경험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Dr. Tillich: This problem is not a simple one historically speaking, because as long as the Jews were guests, so to speak, in other nations, the problem of tolerance was one-sided: Were they tolerated or not? The real problem is: Were the Jews tolerant earlier? And you will find many symptoms of tremendous intolerance in the people who returned from Babylon and established the new congregations. There was certainly not much tolerance in that period. Today we can watch what is happening in Israel. And there again I would say that the limits of tolerance are clearly risible. Even intolerance toward liberal Jews is a problem. And there are marriage problems, and many others, controlled and decided exclusively by the rabbis.
틸리히 :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손 노릇할 때 관대의 문제가 일방적으로 치우쳐서 그들은 관대를 받았는가? 또는 못 받았는가?” 하는 식으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유대인들은 초기에 관대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새 회중을 구성한 사람들이 관대하지 못하였다는 증거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는 분명히 관대가 많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주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관대의 한계가 확연하게 보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유주의적 유대인들에 대한 관용성마저도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랍비들만이 독점적으로 조종하고 결단하는 결혼 문제와 그 밖의 여러 문제들이 있습니다.
 
Student: Was there not a recent case where a person who claimed to be Jewish became a Catholic priest, and wanted to go to Israel to live? He claimed his right, and the Israel Supreme Court, I think, is deciding now whether he may be allowed to enter or not. He claimed that his parents were Jewish and that therefore he was Jewish himself. And the court is trying to make up its mind as to whether Jewish citizenship is a matter of race or creed or what.1
학생 : 최근에 유대인이라고 자칭하는 어떤 사람이 카톨릭 신부가 되었는데 이스라엘에 가서 살기 원하는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의 권리를 요청하였고 제가 알기까지는 지금 이스라엘 대법원이 그의 입국 허가를 검토 중에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그렇다고는 그는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유대 시민권이 인종이나 신조 또는 어떤 것과 관계된 문제인지 결정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Student: The Jewish people have been persecuted off and on for two thousand years, and as soon as they get their own home in Palestine they encounter about 600,000 Arabs who threaten them there. Now, although the Jews claim universal rights for all people who exist in the state of Israel, I would hesitate to say that we can learn ideas of tolerance from these people. I think that in relation to the Arabs, and in other ways, they have the same problems that we do as far as tolerance is concerned.
학생 : 유대 민족은 2천년 동안 여러 차례 박해를 치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팔레스탄에 있는 조국에 돌아오자마자 그들을 위협하는 60만의 아랍인들과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비록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권리를 인정한다 치더라도 우리가 그들로부터 관용 사상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하는 데는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관용에 관해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꼭 같은 문제를 그들도 아랍과의 관계와 그리고 다른 국면에서 직면하고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Dr. Tillich: Yes, I believe so too.
틸리히 : ,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Student: So far as Judaism’s ability to teach something to Christian groups is concerned, we have Judaism as a unique cultural community, or the Jews as the chosen people. I don’t think that Christianity with its concept of the universality of the Christian message would want to become as solidified into a small group, because then its message or influence would not be able to attain its farthest reach.
At a higher level, I would say that the biblical idea of a unique ethical community, a spiritual community of mankind, is admirable. I think we can gain from this idea, but I don’t think that at the lower levels Christianity would want to become an exclusive community.
학생 : 유대교가 기독교 집단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유대교는 하나의 독특한 문화적 공동체이고 또한 유대인들은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메시지의 보편성의 개념을 지닌 이상, 하나의 보잘것없는 집단으로 응고되어 버리기를 원치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된다면 그 메시지나 영향이 크게 미치지 못하겠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독특한 윤리적 공동체나 정신적 공동체에 대한 성서의 사상은 높은 차원에서 볼 때 동경의 대상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사상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낮은 차원에서 하나의 배타적인 집단으로 전락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Universalism in Christianity and Judaism
기독교와 유대교에 있어서의 보편주의
 
Dr. Tillich: Now, you see, here are two problems, and the first is very clear. I refer again to some words of Jesus, and the whole struggle of Paul against the narrow minded Jewish Christians. In this connection, the term ecclesia is a very interesting word. It is the Greek word for church, and it is derived from "calling out" — ek, out, plus kalein, to call. And it was used in the Greek city-states where the free citizens were called out from their houses by a crier, by somebody who went around and called them to the assembly of free citizens, which was the highest and ultimate authority in the city-states. And this word ecclesia, or assembly of free citizens, was transformed by early Christian writers into a term for church. Church thus means ecclesia. Paul wrote to the ecclesia in this and that city, which means that he wrote to the assembly of those who were called out. But in Pauline Christianity they were called out of all nations, and that is the difference: individuals out of all nations and not merely one nation. It is very interesting what power these Greek words of the classical tradition have transmitted to the Christian church.
Another word is eleutheroi, "the free ones." Now in the Greek city-state there would be a few thousand free people in a city like Athens, and the others were not free. The same concept of the eleutheroi, or the free ones, was used by Christian writers to designate those liberated from demonic powers. Freed from the powers of evil, the demonic powers, they now formed the free ones in the assembly. But this is no longer the assembly of the city or of the nation. It is the assembly of God. Here is an example of Christian universalism as opposed to Jewish tribalism at this time.
Now to distinguish the second problem from the first: What about those who did not come to the ecclesia? In early Christianity they were considered not as simply lost but as not yet liberated. Of course, as Paul writes in Romans 1,2 God did not let himself go unnoticed by the pagans, but they distorted his message. They had fallen under demonic power and had to be liberated, though they were not without God. The idea of the godlessness of people, in the sense of being left alone by God, did not exist at that time.
So let us remember these two early Christian ideas. First, there is the breaking through of the Jewish sacramental identity of blood, soil, and nation. Then, when the soil is taken away, what remains is simply the identity of religion, which is a kind of sacramental unity. Thus in Christianity the sacramental unity includes all those who are "elected" out of the nations and belong to the ecclesia.
Now our problem today, which has necessitated this discussion, is Christianity’s relationship to other religions. But Christianity did not have to encounter any religion before the appearance of Islam. The other religions were not really other religions. Greek religion had long ago been criticized and undercut completely by the Greek philosophers themselves, and by the tragedians, who fought against the old gods. And there was nothing else. The other living religions, the Gnostic groups, were combinations and sectarian movements in which Christian and Jewish elements and others were fluxed. True, they had to be combated as Hellenistic mixtures, but not as really different religions. Mithraism could be included among these.
So there was no problem of tolerance as such. The problem then was simply to conquer the Roman Empire, which overshadowed all religions and which was itself the only Roman religion — namely, that of the emperor, or the genius of the emperor. It is therefore very important to realize what happened when Islam appeared. For now a real problem arose. A new religion, a living religion, a very powerful and distinct living religion, challenged Christianity. Up to this time such a situation had not occurred for the early church.
 
틸리히 : 지금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째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여기서 나는 다시금 예수의 말과 바울이 편협심에 사로잡힌 유대인 기독교도들과 싸운 일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ecclesia라는 술어는 참으로 재미나는 말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가리키는 희랍어로서 불러내다’(calling out)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이 말은 또한 ek, 밖으로’, kalein, 부르다가 결합된 것입니다. 그 말은 희랍의 도시 국가에서 자유로운 시민들이 광고꾼에 의해서 집 밖으로 불려 나간다든지, 또는 어떤 자가 돌아다니면서 자유로운 시민들을 도시 국가에서 최고의 권위를 장악하고 있는 의회로 소집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ecclesia 또는 자유로운 시민의 의회라는 이 말이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에 의하여 교회를 가리키는 술어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곧 ecclesia를 뜻합니다. 바울은 여러 도시에 있는 교회에서 편지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의회에 편지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독교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모든 나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이점입니다. 즉 개인들은 한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부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고전적 전통에서 온 이 희랍 말들이 기독교회에게 어떠한 힘을 물려주었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바가 있습니다.
다음 말은 eleutheroi 자유인들이란 것입니다. 그 당시 희랍의 도시 국가에 있어서 아테네와 같은 도시에는 불과 수천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자유인들이었고 그 밖에는 모두 부자유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크리스천 저술가들은 악마적 세력에서 자유한 사람들을 지적하기 위하여 이 자유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악마적 세력에서 자유로운 그들은 자유인들의 의회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도시나 국가의 의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의 의회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보편주의(Christian universalism)의 표본으로서 그 당시의 유대교적 종족주의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둘째 문제는 교회에 오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취급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 아니라 아직 자유하지 못한 자들로 간주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에 서술한 바와 같이, 신은 이방인들이 지각하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을 숨기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의 메시지를 왜곡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신은 그들과 함께 존재하지만 그들은 악마의 세력에 붙잡혔고 거기서 자유를 얻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이 인간을 격리한다는, 즉 인간의 무신성(godlessness)에 관한 사상은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말한 초대 기독교의 두 사상을 기억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환언하면, 첫째는 유대교가 혈통, 국토 및 국가를 성례전적 일치로 삼은 것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국토가 빼앗겼을 때 남은 것이란 성례전적 일치의 일종인 종교적 일치뿐이었습니다. 이리하여 기독교에서는 성례전전적 일치가 모든 나라에서 선택 받고’, 에클레시아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토의하는 문제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회회교가 출현하기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어떤 종교와도 만나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이란 사실상 이름에 불과했습니다. 희랍 종교는 오래 전에 낡은 신들과 대결해 싸운 희랍 철학자들과 비극 작가들에게 철저한 비판을 받고 그 근거를 잃었습니다. 그 밖의 산 종교 곧 노스틱 집단은 기독교, 유대교 및 다른 요소가 뒤섞인 혼합 종교이고 또한 소종파 운동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희랍 문화적 혼합체로 인정되어 제지를 받았지만, 사실상 질적으로는 다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이들 속에 미드라신 예배(Mithraism)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용성의 문제 같은 것은 상상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그 때의 유일한 문제는 로마 제국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모든 종교를 무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황제를 숭배하는 종교 곧 유일한 로마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회회교가 출현하였을 때 어떤 현상이 야기되었는가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이제 하나의 새 종교가 발흥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새 종교요 산 종교요 성격이 뚜렷한 종교가 기독교에 도전하였습니다. 이때까지 초대 교회는 그러한 상황을 접해 보지 못했습니다.
 
Professor: Dr. Tillich, do you find no universal elements in Judaism before Christianity?
교수 : 틸리히 박사님,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는 보편적 요소가 없었다고 보십니까?
 
Dr. Tillich: Oh, now you refer to the universalism of the prophets. Yes, we find in the voice of Abraham, "In thee all nation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 That is certainly a universal idea. Having a special religion and staying within it was never a part of the prophetic religion. We even find a very universalistic trait (I believe in Second Isaiah), when Cyrus, the Persian king, is called "Messiah" because he is an anointed king used by Yahweh, the universal God, to liberate Israel from the Babylonian captivity. So from the point of view of providential action, God was universal. He called an adherent of a quite different religion, Cyrus, to liberate Israel by conquering Babylon. That is the first universalism, but we must remember that this is not an acknowledgment of the religion of Cyrus. He became simply a servant of Yahweh and was called "my servant Cyrus," meaning that the god of Israel was the universal God. That is very clear in Second Isaiah. [Is. 45: l]3 But I do not see anything like this elsewhere in Old Testament history.
 
틸리히 : , 교수님은 예언자들의 보편주의를 들어 말씀하시는군요. 물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너 안에 축복을 받으리라고 한 말을 듣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보편적 이념입니다. 특정한 종교를 가진다거나 그 속에 머무르는 따위는 예언자적 종교에 소속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심지어 페르샤의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수(捕囚)에서 해방하기 위해 야웨(Yahwah) 곧 우주적 신에 의하여 사용된 기름 부음 받는 왕이기 때문에 메시야라고 불려졌을 때 대단히 보편주의적인 흔적을(2 이사야라고 생각됩니다만)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의 섭리적 관점에서 볼 때 신은 보편적입니다. 그는 바벨론을 정복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해방하기 위하여 전혀 다른 종교의 신봉자인 고레스를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보편주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고레스의 종교를 승인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는 야웨의 종이 되어 나의 종 고레스라고 불리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의 신이 보편적인 신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 2 이사야에 밝히 나타나 있습니다[이사야 45:1]. 그러나 나는 이와 동일한 것을 구약 역사의 아무 곳에서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Professor: Can you say that the universalism which developed with Christianity was the result of the life of Jesus and not the result of the historical circumstances associated with the Roman Empire? Was it something which would naturally have developed in Judaism anyway?
교수 : 박사님은 기독교와 더불어 발전한 보편주의는 예수의 생애가 낳은 결과였고 로마 제국과 관련된 역사적 환경이 낳은 결과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하튼 그것은 유대교에서 자연적으로 발전한 것이었습니까?
 
Dr. Tillich: It is true that Judaism produced the first man to develop the Logos doctrine in terms of the phi1osophy of religion: the Jew Philo of Alexandria. His ideas were similar to those developed by the church fathers. My neighbor in Harvard has demonstrated in his well-known writings how very much the church fathers depended on Philo, the Jew, in their universalism.4 But Philonic Judaism was never accepted by the actual Jewish tradition. It was a deviation during the Hellenistic period. And the Hellenization of Judaism was what later Jewish tradition reacted to most negatively. In Philo we have a phenomenon very similar to what we find among the early Christians. There was of course no relation between religion and the nation or the tribe. Moses was interpreted in terms of Plato, and this was all combined into a typically Hellenistic universalism.
틸리히 : 유대교가 종교 철학을 빌어 로고스론을 발전시킨 최초의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로(Philo)를 낳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의 사상은 교부들이 발전시킨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교부들이 보편주의를 취급함에 있어서 필로에게 어느 정도 의존하였는가를 하버드에 있는 나의 동료가 그의 유명한 논문들에서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필로의 유대주의는 유대교 전통에게 환영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희랍 문화 시대에 생겨난 탈선적인 사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의 희랍 문화화(Hellenization)에 대하여 후대 유대교 전통은 가장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필로에게서 초대 기독교인들에게서 찾는 것과 매우 흡사한 현상을 봅니다. 거기에는 물론 종교와 국가 또는 민족 간에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모세는 플라톤의 입장에서 해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전형적으로 희랍 문화적 보편주의와 결탁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Grace, Reconciliation, and Forgiveness
은총, 화해, 용서
 
But the problem of universalism and legalism is not so simple. I think I made the point that the criticism of the Jews is that Christ cannot be the Christ because he has not changed the world. And in turn, the Christian criticism, the Pauline criticism, is that the law in Judaism binds us to that from which we are liberated by Christ, by grace. These are the two mutual criticisms that always remain. In dialogue, of course, they appear much more refined. In my last talk with Martin Buber about the law, I voiced this typically Pauline Christian criticism, and he answered, "That is not what the law means." Now certainly that may not be what the law means for him, but the law seems to be taken literally by orthodox Judaism. Buber is a mystically-minded Jew. He said that the commandments are like stars: We cannot fulfill them, but they show us the direction in which we should go. For example, "You shall not kill," or better, "You shall not murder." We don’t know what that really means, or in what ways we murder. How it is related to war or to criminal justice — we do not know for sure, and so we proceed as best we can. Other Jews have told me that the law is a help, but not a commanding power that presses us down and pushes us, as it did Paul and Luther, into despair, so that only the message of grace can save us from it. I believe that this is one of the points where the more modern-minded Jews have overcome much of the earlier Jewish legalism — not fully, but to a certain extent.
On the other hand, it is obvious that grace — let us say the "sin-forgiveness structure" or "justification-by-grace structure" of Pauline and Lutheran Christianity — is not the only important thing in Christianity. In fact, it has lost much the central importance it had for Paul and Luther, and even for myself. In the meantime, I have learned by life and thought that there are other problems, and that perhaps in Paul himself the central problem was the divine Spirit and not justification by grace. The divine Spirit fulfills, and so makes possible an approach to the law.
 
그러나 보편주의와 율법주의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비판한다는 점을 이미 위에서 지적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인 특히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이 그리스도 곧 은총(grace)에 의하여 자유하게 된 우리들을 다시금 얽맨다고 비판을 가합니다. 이것들이 언제나 문제시되는 상호 비판입니다. 물론 그것들이 대화할 때에는 대단히 미묘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지난 번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와 같이 율법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나는 전형적인 바울적 기독교의 비판을 들어 말하였습니다. 그 때 그것이 율법이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그는 대답하였어요. 물론 그것이 그에게는 율법이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통적인 유대교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부버는 신비적 정신을 가진 유대인입니다. 그는 계명(誡命)들이 별들과 같다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계명들을 성취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참으로 무엇을 뜻하며 또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살인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전쟁이나 형법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도 밝혀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의 길을 모색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유대인들은 나에게 말하기를 율법은 돕는 것이지, 바울과 루터가 느낀 것처럼 우리들을 절망 속에 몰아 넣어서 은총의 메시지 밖에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절감하게 만드는 어떤 명령하는 힘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보다 현대화된 유대인들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초기 유대교 율법주의의 대부분을 극복한 점들 가운데 하나이라고 믿습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이나 루터교에서 주장하는 은총 곧 죄와 용서의 구조’(sin-forgiveness structure) 또는 은총에 의한 의인(義認)의 구조’(justification-by-grace structure)만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현저하게 드러납니다. 사실상 그것은 바울과 루터, 그리고 심지어는 나 자신에게 던져 주었던 중요성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그 동안 생활하고 생각하는 중에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과 또한 바울 자신에게 중심 문제가 된 것은 은총으로 인한 의인이 아니라 성령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성취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율법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합니다.
 
Student: Purely on a layman’s level there is a book called Marjorie Morningstar by Herman Wouk, who wrote The Caine Mutiny. He is a novelist, and an Orthodox Jew, he says. And it’s a fascinating book from an orthodox Christian point of view, for those who believe that all Jews are terribly unhappy and burdened. In this book you find that he is gloriously happy in his tradition and obeys the laws out of real choice, and is willing to identify himself with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not out of constraint or by the force of the traditional.
학생 :카인호()의 반항’(The Caine Muriny)이란 책을 저술한 허어만 우쿠(Herman Wouk)가 쓴 마아조리 계명성’(Marjorie Morningstar)이란 책이 있는데 그것은 순수하게 평신도의 수준에서 취급된 것입니다. 그는 소설가이고 자신이 정통적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통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유대인들은 지극히 불행하고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다고 믿는 사람들을 매혹하는 데가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기가 물려받은 전통 속에서 자신이 황홀한 행복감에 젖어 있고 자기가 율법을 준수하고 유대 민족의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기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 강제나 전통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Dr. Tillich: Yes, I have been told this by many Jewish friends. But the problem is: What is the inner reaction if we feel that we are sinners, that we have done a terrible wrong? What then? And Luther, especially clear on this point, is more modern. How do we experience a merciful God? That was Luther’s question, out of which the whole Reformation came. Now what does a Jew do with this question? His essential problem shows itself then, because he has no basic answer to this.
There is much to be said about the psychology of this situation. As long as the prophetic message was directed to the nation as a whole once could always say: Now this nation has failed, God has punished the nation, but there are remnants which will do better, and so on. That was comparatively easy, although it seemed hard at the time. But the problem for the individual human being remains. We already find the beginning of this personal problem in the later Psalms. The earlier Psalms usually mean Israel when they say "I," but in the later Psalms really individual piety appears, and the hope that God may forgive us all.
The decisive difference, however, lies here. The real question is: Is there a new reality on which we can rely as the power of reconciliation? Judaism does not wholly lack this experience, of course. Jews have their Day of Reconciliation, the loftiest of their celebrations, but it is not elaborated in their daily life as it is in Christianity. There is the difference, and it should not be blurred.
 
틸리히 : , 나도 여러 유대인 친구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만일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곧 우리는 무서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때 내적 반응은 무엇이겠냐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점에 관해서 분명한 태도를 보여준 루터는 과연 보다 현대적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비로운 신(a merciful God)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이것이 루터의 질문이었고 여기서 종교 개혁 전체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그의 본질적인 문제가 폭로하듯이,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근본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상황이 내포하는 심리적 현상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전체에 선포된 것이기 때문에 신은 이 나라를 정벌하였고 이 나라는 패망하였으나 앞으로 그것을 보다 건설적으로 영도할 자들이 남아 있다는 등의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그 당시에는 무척 어려웠을지 몰라도 비교적 안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후기 시편에서 이 개인의 문제가 싹트는 것을 봅니다. 초기 시편에서는 주로 이스라엘 전체를 ’(I)라고 하였지만, 후기 시편에서는 실제로 개인적 경건, 그리고 신이 우리 모두를 용서하시리라는 희망이 부각됩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상이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화해(reconciliation)의 힘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새로운 실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물론 이 경험을 전적으로 결핍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화해의 날’(Day of Reconciliation)을 지키고 굉장하게 축제를 올리지만, 그것이 기독교에서처럼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상이점입니다. 이것을 흐려서는 안 됩니다.
 
Professor: Does Buber solve that problem?
교수 : 부버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까?
 
Dr. Tillich: I have never talked with Buber about just that point. I should have, perhaps, but I have never had the occasion.
틸리히 : 바로 그 점에 관해서는 부비와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랬다면 좋았겠습니다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Student: Could you explain a little how it is elaborated in the daily life of a Christian — the idea of mercy and love and forgiveness?
학생 : 자비, 사랑 및 용서의 사상이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Dr. Tillich: Yes, now, for example, the prayer of "Our Father . . .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or the prayers in every service in which there is a kind of confession of having done evil, not having done what one should do, and then the plea for divine forgiveness. This is very central in Christianity, and bad conscience has to be overcome in many people by the image of the crucified as the symbol that God is willing to forgive. As a theological expression it remains quite open, is never precisely delineated. But psychologically it is true, and for two thousand years has had this effect on innumerable persons. Because of it I often feel a gap between myself and even my best Jewish friends. There seems to me to be a danger among them of self-justification — let us call it — by virtue of their good life. I know many Jews, and I would say that their good life is often very good. And nevertheless, there are also Christians whose good lives are very good; but in the Christian there is always the feeling that we can be good only in the light of grace, of having been forgiven. Among Jews there is a stronger belief that we can be good by our own wills, by our own personal obedience to the law.
틸리히 : 그러지요. 예를 들면 우리 아버지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예수가 가르친 기도의 일부분, 마태 6:12, 역자 주)라는 기도라든지 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자행하였다는 고백과 아울러 신의 용서를 간청하는 내용의 기도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 속에 잠재하는 악한 양심은 신의 용서의 상징인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이미지에 의해서 극복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가 신학적 표현으로서는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아직도 극히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2천 년 동안 무수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나는 자신과 나의 가장 친근한 유대인 친구들 사이에 간격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들은 그들의 선한 생활 때문에 자기 정당화(self-justification)에 빠질 위험이 있는 듯싶습니다. 나는 많은 유대인들을 아는데 그들의 선한 생활은 매우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선한 생활이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자기가 은총을 힘입어 용서를 받을 때에만 선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반면에, 유대인들에게는 우리가 자신의 의지와 율법에 대한 인격적 복종으로써 선하게 될 수 있다는 신앙이 참으로 강합니다.
 
Student: But what are we being forgiven for? Must we have forgiveness?
학생 : 그렇지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용서를 받게 됩니까? 우리가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까?
 
Dr. Tillich: For instance, for not having done what we should have done in terms of love, of agape; for hurting somebody, or murdering somebody. There are people who murder other people and then cry for forgiveness. If you visit the prisons you will find that.
In ordinary life also there are those who feel that they have wasted much of their life, the best of themselves, and who want to overcome their own remorse for it. We do not need to be forgiven for little trespasses, but for the state of mind these trespasses express.
틸리히 : 예를 들어 말하자면, 우리가 사랑 곧 아가페를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을 이행하지 못하였고 다른 사람을 손상시키고 또는 그의 생명을 끊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다음 용서를 간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형무소를 방문하면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평범한 생활 가운데서도 삶의 풍성한 열매와 최선의 가치를 탕진한 대가로 인계 받은 죄책감을 극복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과오들 때문이 아니라, 그 과오들이 노출시키는 마음의 상태 때문에 용서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Student: Doesn’t Catholicism somehow blur this idea of personal mercy and forgiveness with its absolute laws and code? It is so much more specific than that of the Protestants.
학생 :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개인적 자비와 용서의 사상을 그것의 절대적인 율법과 법규로써 약간 흐리게 만들지나 않습니까? 그것은 개신교의 것보다 훨씬 특유한 것입니다.
 
Dr. Tillich: Therefore there was the Protestant revolt against a Catholicism which made those laws so rigid that their spirit was almost indistinguishable from the legalistic attitude of Judaism. But the Reformation has deteriorated in the same way, and today we have a Protestantism which is itself a kind of rigid moralism, equally bad. So the message of grace is always necessary; I like to call it "acceptance." Again and again, reform movements at every stage of church history have been absolutely necessary because it is the character of religion in the narrow sense of the word to become legalistic.
틸리히 : 그러기에 개신교의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봉기하였습니다. 그 때 카톨릭 교회는 율법을 지나치게 고착시킨 나머지 그 정신이 유대교의 율법 주의적 태도와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도 같은 방법으로 퇴폐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꼭 같이 타락하고 고착된 도덕주의를 지향하는 개신교의 분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메시지는 항시 필요합니다. 나는 그것을 용납’(acceptance)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개혁 운동은 교회 역사의 단계마다 거듭 반복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은 좁은 의미에 있어서 종교가 율법주의화 되는 것이 그것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Progress in Christianity, Judaism, and Islam
기독교, 유대교 및 이슬람교의 발전
 
Student: Most people today, manufacturers especially, seem to think that history is just a matter of coming to the time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We are putting out bigger and better cars, and they fall apart faster, and we sell more of them. This, it seems to me, is the general idea of progress today. The whole view of history is getting more and more money for yourself and your kids, and enjoying a more prosperous family life, and so on. It seems rather far, to me, from the idea of gaining wisdom in time. I would like to ask if this could perhaps be the expression of original sin in history, that we can only go so far? Can history approach no closer to eternity than it is now, or was two thousand years ago? Does only the outward physical situation change?
학생 :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생산업자들은 생각하기를, 역사는 산업 혁명의 시대로 귀착하고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다 크고 좋은 자동차를 생산하고 그들을 보다 빨리 소모하며 따라서 우리는 보다 많은 자동차를 매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보편화된 발전 사상인 듯합니다. 전체 역사관은 자기 자신과 자녀들을 위하여 수입을 올리고 번영된 가정생활을 즐기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습득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대단히 먼 거리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것이 역사 안에서 원죄의 표현일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역사는 현재나 혹은 2천 년 전 이상으로 영원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까? 외곽적인 물리적 상황만이 변하는 것입니까?
 
Student: I think that humanity has gained much wisdom. We have eliminated many problems, and eventually we’ll eliminate more.
학생 : 저는 우리 인간이 많은 지혜를 습득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 지었고 앞으로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Student: What, for instance?
학생 : 예를 들자면 무엇입니까?
 
Student: Well, consider psychology. No doubt a hundred years ago, or two hundred years ago, people encountered personal problems they couldn’t handle, and they’d go to some Puritan minister in Salem, or something, and he would give them some absolute answer that he got from revelation or his understanding of the Bible. And he handed this out to be the absolute truth and wouldn’t qualify it in any way. Now science, through psychology and medicine, has shown that perhaps we can reexamine these things and come closer to their true meaning.
학생 : 심리학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100년이나 200년 전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개인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그들은 세일럼(Salem)에 있는 청교도 목사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목사는 자기가 계시나 성서의 이해에서 얻은 절대적 해답을 그들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해답을 절대적 진리라고 내어 주며 그것이 지닌 제한성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은 심리학과 의학을 통해서 우리가 위와 같은 사실들을 검토하여 정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Professor: I wonder if our visiting Professor would like to comment on that?
교수 : 이 문제에 관하여 오늘 우리를 찾아 주신 교수님께서 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rofessor: Yes, I think we’ve seen some progress in psychology, thanks to Freud. I think Freud developed a method of achieving insight. There were certainly ways of coming at these problems prior to Freud, but not within the context of science. It seems to me that science has developed approaches to wisdom that do represent progress.
One aspect I am very much interested in is the thought of Dietrich Bonhoeffer, a theologian in Germany who died under Hitler, and who spoke in very progressive terms about the development of the modern world. One of his phrases is "the world come of age." All of this is rather abstrusely handled by Bonhoeffer, and one wonders how he really understands the notion of progress in this respect. In any event, he wishes to affirm the advances that are being made, rather than reacting against them in the name of religion out of a longing to return to an earlier period when religion was much more manifest. He is very clear in suggesting the ways in which ostensibly nonreligious means are taking over and doing the job traditional religion used to do.
 
교수 : 그럴까요? 우리는 프로이드(Freud)의 덕택으로 심리학 부문에 약간의 발전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이드는 통찰력을 취득하는 방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압니다. 물론 프로이드 이전에도 이런 문제에 귀결하는 방법은 있었습니다마는, 과학과 결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과학은 지혜에 접근하는 방법을 계발하여 발전을 가져왔다고 봅니다.
제가 지금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한 가지 관점은 히틀러에게 처형당한 독일의 신학자 디이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사상입니다. 그가 말한 술어 가운데 하나가 성숙한 세계’(the world come of age)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퍽이나 난해하게 취급하였기 때문에 그가 사실상 이러한 면에서 발전 사상을 이해하였는지 의아심마저 품게 합니다. 그러나 여하간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발전 양상을 긍정하려고 하였지 종교가 융성하던 과거로 돌아갈 심정으로 종교의 명분을 내세워 그것에 대항해 싸우려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날 비종교적 방법이 과거에 전통적 종교가 수행하던 업무를 인계 받아 대행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암시하였습니다.
 
Student: May I refer to Dr. Tillich’s statements in his writings that science and religion are different realms? What I am getting at is the idea of our spiritual progress rather than just material progress. Am I on the right track, Dr. Tillich? There is a dichotomy between scientific language and the language of the soul and spirit.
학생 : 저는 틸리히 박사님이 그의 저서들에게 과학과 종교는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말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제가 거기서 배운 것은 물질적 발전보다는 차라리 정신적 발전에 대한 이념이었습니다. 틸리히 박사님, 제가 혹시 잘못 이해하지나 않았습니까? 과학적 언어와 정신적 및 영적 언어 사이에는 이분법(二分法, dichotomy)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Dr. Tillich: Yes, but now may I hear two more comments? And then I shall develop my idea of progress. You have derived the idea of progress from the Hebrew-influenced religions, and that is justified, for only on the basis of the Old Testament have we any idea of progress in the modern sense. We did not have it in Greek humanism, and we don’t have it anywhere in Asia. But I would like to speak on the subject after other students have commented.
틸리히 : 그런데 먼저 두 분 정도의 의견을 들은 다음에 발전(progress)에 대한 나의 견해를 펴 보는 것이 어떨까요? 학생은 발전의 이념을 히브리의 영향을 받은 종교들로부터 유도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구약성서를 기초로 하여 현대 감각에 들어맞는 이념을 제시할 수 있을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념은 희랍의 인본주의에도 없고 동양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 주제에 관해서는 먼저 몇 학생이 언급한 다음에 내가 말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Student: You were expressing some idea about progress in terms of our spiritual relationship to eternity. It seemed to me that Dr. Tillich talked about this very meaningfully in The Dynamics of Faith, when he discussed the fact that human beings have to recognize that they are finite and that, if they really are believers, they are concerned with something that is infinite, and that there can never be a complete union between the two.5 The finite and the infinite will never meet. Now what progress can there be beyond this point? You can only come so close to infinity.
학생 : 당신은 영원에 대한 우리의 정신의 관계를 들어서 발전의 이념을 표현하였습니다. 틸리히 박사님은 이 사실을 그의 저서 신앙의 동력’(The Dynamics of Faith)에서 의미 깊게 논술하였습니다. 거기에 보면 인간들은 자기들의 유한성을 인식해야 하고 그들이 참 신자들이라면 무한한 것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또한 유한과 무한의 완전한 결합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은 결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로 이 점을 넘어서서 어떤 발전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고작해야 무한에 가까이 접근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Student: Can’t you say a little more about what you mean?
학생 : 당신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Student: I can’t really say anything more. That’s why I asked the question.
학생 : 저는 그 이상 더 말 할 수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제가 질문하는 것입니다.
 
Student: Well, it’s confusing to me.
학생 : 그 말이 제게는 좀 혼동이 되는데요.
 
Student: I suppose I could say that our feeling of separation from the ultimate ground of our being, or whatever you want to call it, is what I meant.
학생 : 제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존재의 궁극적 기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감정이라고 말해서 좋을 것 같습니다.
 
Student: According to my understanding of Freudian psychology, our guilt feelings frequently come from a process of change. If this is so, then guilt feelings come from the failure to change, or to change rapidly enough.
학생 : 제가 프로이드의 심리학을 이해한 대로는 우리의 죄책감(guilt feelings)은 흔히 변화의 과정에서 초래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죄책감은 변동의 실패 또는 신속하게 변동하지 못한 것에 기인된 것입니다.
 
Student: I’m really not discussing change at all. I’m referring to Dr. Tillich’s concept of the feeling of separation, or estrangement, from the ground of our being. I’m not talking about guilt as such, or not being able to keep pace with the group
학생 : 저는 변동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분리 또는 소외된 감정에 대한 틸리히 박사님의 개념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저는 죄(guilt)라든가 또는 사회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Student: We are talking about the same things. If you don’t wish to call it guilt, then call it the feeling of estrangement. Nonetheless, psychology, as I understand it, does suggest that this feeling of estrangement comes from rapid change.
학생 : 그러나 우리는 결국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죄라고 부르기 싫으면 소외감(the feeling of estrangement)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여하간 제가 이해하기까지는 이 소외감이 급격한 변동에서 온다고 심리학은 암시해 줍니다.
 
Dr. Tillich: Now we are already deep in many questions concerning the guilt problem and the progress problem.
First let us consider guilt. It is difficult for me, as a German, to discuss guilt in such general terms, because in Germany the word applies to somebody potentially or really guilty, who then comes before a judge and is pronounced guilty or not by the judge, or sentenced to punishment. But "guilt" in English also has another meaning, the mean of feeling guilty. I try to make a sharp distinction, whenever I speak on this subject, between guilt feeling and objective guilt — that is, being actually responsible for something wrong. The English language has unfortunately confused "guilt" with "guilt feeling," and so all discussion concerning guilt becomes quickly confused.
On the basis of this distinction there is the experience which I call "misplaced guilt feeling." This is also my answer to the comment about Freud at the end of our last discussion. Freudian salvation reaches only as far as misplaced or neurotic guilt feelings. Neurotic guilt feelings, by unconscious processes, often produce a sense of guilt which has no foundation in reality whatever. It often proves to be the best way of avoiding and not having to face real guilt, which would give us genuine guilt feelings and the need to overcome them. So I would answer an earlier question by saying that psychoanalytic salvation is a "salvation"; but it is a medical salvation from misplaced guilt feelings and not salvation from the objectively justified feeling of having acted wrongly against what one knows to be right. This is a primitive way of expressing it; a much more refined way is the term "estrangement," namely, estrangement from our true being.
The question of salvation has another dimension — the dimension of forgiveness, or grace, or acceptance. I would avoid the words "original sin" completely. I am glad that Dr. Niebuhr, in our last theological discussion, said he had also come to this conclusion. Although he reintroduced that term into this country, he has now given it up because the misunderstandings in connection with it wreak too much havoc. But the tragic estrangement of mankind (that is what the words actually mean) is a reality we cannot deny. That is one side of your problem.
The other side concerned the question of progress, which is intimately related to it. And my basic statement here is that progress is limited by the freedom of every newborn individual. Every new individual is not only born into certain conditions, but also with a freedom to reject or accept these conditions; and this is his capacity for moral decision.
So in every individual we have a new beginning, and the necessity for new grace. Progress is possible in all things that can be refined by activities like science or medicine or technology, and even psychological research to a certain extent. But it cannot go beyond these, because after human conditions are raised to a new high, other forms of estrangement occur at a more refined level but with no less guilt. Even the law acknowledges that the guilt of a man who steals because he is hungry is minimal, while the guilt of somebody who steals because he is a rich banker and can steal millions by fraud is very heavy. In the same way, in our society today nobody steals the silver spoons when he is invited out to dinner; but there may be attitudes expressed towards one’s neighbor during dinner which are equally immoral, and this is the reason for my insisting that it is a matter of the refinement of the exercise of moral freedom.
And this relates also to science. What science can do is to give us insights into handling realities, including some levels of our psychological makeup. That is quite possible, but science (and here I think I would contradict our guest professor) cannot give us wisdom, because wisdom is, if we consider the wisdom literature of Greece and the Old Testament, not a technical achievement, but a divine power which tries to show us the ultimate problems of our existence. Later it was termed the Logos. The Logos is, so to speak, the successor of Old Testament wisdom.
In the Middle Ages, wisdom was consciously confronted with science in the struggles between the Dominicans and the Franciscans, the Augustinians and the Aristotelians. The Augustinians argued that, of course, the new methods introduced by Aristotle would increase our scientia, our science, but would not increase our sapientia, our wisdom, and would in fact be damaging to it. And I think it was a true prophecy when the Franciscan theologians said that in the whole development of the coming centuries we would lose something of the sapientia of the earlier periods of history, although we would gain immeasurably, of course, in scientia.
Now then, there is another question which is important for our topic: How closely, in contrast to the Asiatic societies and the primitives, do the three history-minded religions agree on the idea of progress? I must say that I do not see progressivism in Islam in any sense you have described. There is no impetus to change the whole of reality; hence the incredible resistance of Islamic feudalism, to any transformation. There is now one man — like him or not — Nasser, who seems to be working against this line and who stands, as far as I know, very much in conflict with the Islamic leaders in his own country because he is trying to introduce something of progress.
In both Judaism and Christianity we have two views of history which come nicely together in the last book of the Bible, namely, the inner-historical fulfillment, which is the main emphasis of the prophets, and the suprahistorical fulfillment of history, which is the main emphasis of the apocalyptics, those seers of the end from whom the last book of the Bible, the Revelation of John, is taken. This is a thoroughly late Jewish book with Christian amendments, let’s say. It comes from the apocalyptic literature, an extensive literature which foresaw the end of the world, just as it is described in the last book of the Bible and also in some speeches of Jesus about the last days in Mark 13. [4-33] Now these two historical attitudes ride side by side through the whole of church history. The official church was always interested in the suprahistorical, while the sectarian movements, the social-revolutionary movements, were all most concerned with inner-historical fulfillment.
Sometimes a third attitude arose which tried to combine the inner-historical or fragmentary fulfillment with the suprahistorical complete fulfillment. This could be seen, for instance, in our religious socialist group in the period after World War I, when we recognized that the churches were only interested in the salvation of individuals, leaving history, generally speaking, to the devil, although they did try to influence it to a certain extent by Jewish-Christian principles of justice and agape. But the idea of the transformation of society was far from that. By contrast, the revolutionary movements of the Western world, first the bourgeois revolution and then that of the laboring classes, had only the inner-historical idea and were completely cut off from the vertical life, from the suprahistorical idea. What we tried to do in our German movement was to combine the two.
In any case, I would agree with you that the inner-historical fulfillment is always fragmentary and in some ways anticipatory. The real fulfillment of the Kingdom of God is when God "is all to all," as Paul says. This is eternal life and transcends time, past, present, and future. It is simply beyond time.
This, finally, is my solution to your question, which I give you to think about: Every belief in an inner-historical fulfillment leads to metaphysical disappointment — not only psychological disappointment, but a much more fundament disappointment, namely, disillusionment with any belief in something finite which was expected to become something infinite. Our history as a whole has amply demonstrated this disillusionment. On the other hand, the merely transcendent idea of individual salvation amounts to abandoning the world to hell, not caring for the problems of justice and thus leaving them to antireligious movements such as nineteenth- and twentieth-century Communism and Fascism. We of the religious socialists tried to unite these two geometrical dimensions: the horizontal and the vertical, the social and individual demands of religion.
 
틸리히 : 우리가 지금까지 죄의 문제와 발전의 문제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깊은 데까지 파고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죄에 대하여 생각하여 봅시다. 독일 사람인 내가 그렇게 일반적인 의미로 죄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퍽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독일에서는 그 말이 잠재적으로 또는 사실상 죄를 범하여 법관이나 어느 누구에게 와서 재판을 받고 처벌을 당하는 사람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로 ’(guilt)는 또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곧 죄책감(guilt feeling)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주제에 관하여 말할 때는 언제나 죄책감과 객관적인 죄(잘못에 대해 책임 져야 할 일)를 예리하게 구별하려고 애씁니다. 불행스럽게도 영어는 죄책감을 혼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죄에 관계된 머든 논의는 자동적으로 혼동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근거로 하여 볼 때 소위 잘못된 죄책감’(misplaced guilt feeling)이란 경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번 토론의 끝머리에서 취한 프로이드에 관한 코멘트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도 됩니다. 프로이드가 베푸는 구원은 잘못된 죄책감이나 또는 신경증적 죄책감에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신경증적 죄책감은 무의식적 과정을 통하여 실제로 근거 없는 죄의식을 산출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에게 순수한 죄책감과 이것을 극복할 요구를 제공해 주는 진실한 죄를 회피하는 최선의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한 질문에 대답한다면, 심리분석학적 구원도 하나의 구원이지만 그것은 잘못된 죄책감으로부터의 의학적 구원에 불과하고, 옳은 것은 알면서도 과오를 저지른 것에서 오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죄책감으로부터의 구원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미숙한 표현 방법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좀 더 세련된 방법은 소외곧 우리의 참된 존재로부터의 소외라는 말을 쓰면 좋겠지요.
구원의 문제는 또 하나의 차원 곧 용서나 은총이나 용납 등의 차원을 가집니다. 나는 원죄라는 말을 전적으로 버리고 싶습니다. 한 가지 기쁜 것은, 니이버 박사가 지난 번 신학 연구회에서 자기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고 말한 사실입니다. 비록 그가 그 술어를 이 나라에 다시 소개하였지만 그것과 관련된 오해가 말할 수 없는 파괴를 조장하기 때문에 그는 이제 그 말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비극적인 소외는(이것이 그 말이 실제로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실재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지닌 문제의 한 면입니다.
또 한 면은 발전의 문제와 관계되어 있는데 이것은 소외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본적인 명제로 제시하고 싶은 것은 발전이란 새로 태어나는 사람의 자유에 의해서 제한 받는다는 것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특정한 조건들 속에 출생할 뿐만 아니라 그 조건들을 배격하거나 또는 용납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출생합니다. 이것이 그가 도덕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에게는 새 출발과 아울러 새 은총을 갈망하는 필요가 있습니다. 발전은 과학이나 의학이나 기술이나 심지어 심리학적 조사와 같은 활동에 의하여 세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전이 그 이상은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조건이 새로운 고차원에 인양된 다음 다른 형태의 소외가 어제에 못지않은 죄를 지니고, 보다 세련된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법률까지도 배가 고파 절도한 사람의 죄는 가볍게 인정하고 이와 반면에 부유한 은행가이기 때문에 절도하거나 사기로 수백만 원을 훔친 사람의 죄는 대단히 무겁게 처리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오찬에 초대 받은 경우 은수저를 훔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찬을 나누는 동안 자기 이웃에게 훔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비도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도덕적 자유의 행사와 관련하여서 세련(refinement)의 문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과학에도 관계됩니다. 과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심리학적 성격의 여러 차원을 포함하여 실재들을 조정할 수 있는 통찰력을 우리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가능합니다만, 과학이(이 점에서 손님으로 오신 교수와 저의 견해가 상반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지혜를 줄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희랍이나 구약성서의 지혜 문학을 읽어 보면 지혜는 어떤 기술적 성취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의 궁극적 문제들을 보여 주려고 시도하는 신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와서 그것은 로고스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로고스는 구약성서가 시사하는 지혜의 후계자라고 하겠습니다.
중세기에 있어서 지혜와 과학이 의식적으로 대결하였는데, 그 것은 도민고 파(Donimicans)와 프란시스 파, 또한 어거스틴 파와 아리스토텔레스 파사이의 충돌입니다. 어거스틴 파는 주장하기를 아리스토텔레스가 소개한 새 방법은 물론 우리의 scientia 곧 과학을 증진시키겠지만, 우리의 sapientia 곧 지혜는 증진시키지 못하고 사실상 그것에 손상을 입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나는 프란시스 파 신학자들이 참 예언을 하였다고 생각되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비록 앞으로 다가 올 세기들의 발전 전체를 통하여 우리가 scientia에서 헤아릴 수 없는 소득을 얻는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초기의 역사가 지녔던 지혜를 상당히 잃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의 주제에서 중요한 문제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즉 아시아 사회들이나 원시인들과 비교하여 볼 때 역사의식을 가진 세 종교가 발전 사상에 관하여 얼마만큼의 일치를 보이고 잇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언급한 의미에서의 발전주의(progressivism)는 회회교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재 전체를 변동시키려는 원동력이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낫세르와 같은 사람이 그러한 노선에 반대하고 나서서 자기 나라에 발전 사상을 소개하고자하기 때문에 회회교의 지도자들과 치열한 충돌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교와 동시에 기독교에서 두 개의 역사관이 병존하는 것을 보는데 이 두 역사관이 성서의 맨 마지막 책에서 미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첫째는 예언자들이 주로 역설한 역사 안에서의 성취(the inner-historical fulfillment), 둘째는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의 계시록에서 자료를 제공해 준 종말에 대한 예견자들 곧 계시 받은 자들(apocalyptics)이 주로 역설한 역사를 초월한 성취(the suprahistorical fulfillment)입니다. 요한의 계시록은 말하자면 전적으로 후기 유대교적 성서에다 기독교적 수정을 첨가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초역사적 역사관은 계시록이나 또한 마가복음 134-33절에 기록된, 마지막 날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 포함된 것과 꼭 같이 세계의 종말을 예견한 묵시 문학(the apocalyptic literature)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제 이 두 개의 역사적 태도가 교회 역사 전체를 통하여 양립되어 왔습니다. 제도화된 교회는 항시 역사를 초월한 완성에 관심을 두었다면, 소종파 운동 곧 사회적 혁명 운동은 대체로 역사 안에서의 성취에 관심을 모았습니다.
간혹 역사 안에서의 성취 또는 단편적인 성취와 역사를 초월하는 성취의 종합을 시도하는 제 3의 태도가 등장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태도를 제 1차 세계 대전 이후 소위 종교 사회주의자들의 그룹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차 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그 때 교회들은 정의와 사랑에 대한 유대적이고 기독교적인 원리를 가지고 어느 정도 역사에 영향을 끼치려고 시도하였지만,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개인의 구원에 집중되었고 결국 역사에 영향을 끼치려고 시도하셨지만,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개인의 구원에 집중되었고 결국 역사를 마귀에게 맡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회 변혁의 이념은 이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서구에서 일어난 혁명 운동 곧 중산 계급의 혁명과 노동 계급의 혁명은 내재적 역사 이념만 보유할 뿐 수직적 생명(vertical life) 즉 초역사적 이념에서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독일에서 종교 사회주의 운동을 통하여 시도해 본 것은 바로 위의 두 역사관을 종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역사 안에서의 성취는 항시 단편적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예상적이라는 점에서 학생의 의견에 찬동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참다운 성취는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신이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모든 것이 되는”(God “is all to all”)때를 말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삶이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다만 시간을 넘어서 있을 따름입니다.
끝으로, 내가 학생의 질문에 대하여 나의 해결책을 줄 터이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역사 안에서의 성취에 대한 모든 신앙은 결국 형이상저적 실망을 초래합니다. 이 말은 곧 심리적인 실망 뿐만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실망으로서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으로 변화하리라고 기대하는 신앙에게 환멸을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전체는 이 환멸을 자세히 보여 주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개인의 구원을 지상의 과제로 여기는 초월적 이념은 세계가 지옥이 되도록 방기하고 정의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19세기 및 20세기의 공산주의 국수주의 같은 반종교적 운동들에게 넘겨 주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은 종교 사회주의자로서 이 두가지 기하학적 차원 곧 종교의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 사회적 요청과 개인적 요청을 일치시키고자 하였습니다.
 
 
NOTES:
1. The Court excluded Oswald Rufeism on grounds that, although originally of Jewish background, he was now a Catholic Carmelite friar and so was not Jewish by faith and could not claim citizenship without becoming naturalized. See Newsweek, Dec. 3, 1962, p. 69.
2. Vs. 20: "For the invisible things of him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 are clearly seen, being understood by the things that are made, even his eternal power and Godhead; so that they are without excuse: . . ."
3. "Thus saith the Lord to his anointed, to Cyrus, whose right hand I have holden, to subdue nations before him; and I will loose the loins of kings, to open before him the two leaved gates; and the gates shall not be shut; . . ."
4. "My neighbor in Harvard" is Prof. Harry A. Wolfson, author of Philo, 2 vols. (rev. e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48) and The Philosophy of the Church Father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56).
5. E.g., pp. 66—76.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