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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필사각오의 신앙입니다

박용래 (대전광역노회,대전장로교회,원로목사) 2013-12-03 (화) 20:20 10년전 4301  
               필사각오의 신앙입니다.
21:7-14                                                    2012.09.23.
 
옛날 중국 한나라에 한신이라는 유명한 명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신은 견고한 성에 친을 치고 있는 조나라 군대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한나라 군사들은 천리를 달려온 끝이라 피로해 있고 기강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오합지졸을 가지고 적을 깨뜨리려면 승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신은 1만여 군사를 전쟁을 할 때 강을 등지고 진을 치게한 다음 싸웠습니다.
조나라 군사들은 - 강을 등지고 진을 치는 한나라 군사들을 바라보며 병법을 모르는 짓이라 하여 모두 크게 비웃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조나라 군사는 적을 한꺼번에 강물 속으로 몰아넣을 생각으로 성을 비우고 공격을 가해 왔습니다. 엄청난 대군이 함성을 지르며 사기충천하여 무섭게 달려오는데 한나라 군사들은 등 뒤에 강이 막혀 있기 때문에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강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한나라 병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모든 여건이 불리했던 한나라 군사가 엄청난 대군을 몰고 왔던 조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싸움이 끝나고 한나라 장수들이 승리를 자축하면서 한신 장군에게 물었습니다.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는 것이 병법인데, 물을 등지고 싸우게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신 장군이 대답했습니다. - "우리 군대는 천리를 달려온 끝이라 피로해 있고 기강도 엉망이었습니다. 이런 오합지졸이 어떻게 적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강을 등졌기 때문에 도망칠 수가 없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병서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살기를 바라고 싸우면 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등 뒤에 물을 두고 진을 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신 장군의 말을 들은 장수들은 크게 감탄했다고 합니다.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은 자기 몸을 사지리 아니하고 생명을 던져 싸웁니다.
두려움 없이 자기 목숨을 던져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사람을 누가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오합지졸이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죽을 각오를 하고 나가는 사람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3차에 걸친 이방 지역 선교 여행을 마치고 선교의 결과를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에게 보고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 중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를 만나는 성도들마다 이고 동성으로 하는 말이 예루살렘에는 가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를 오해하고 강한 불만을 품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바울이 두로에 갔을 때도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21: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본문 11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예언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목을 안고 울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결심하고 있습니다.
21:13절에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알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다시 재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중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울면서 만류하고 있습니다.
-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사도 바울의 신앙은 죽음을 각오를 한, 필사각오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들의 사랑입니다.
바울이 필사각오의 신앙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자 할 때 울면서 바울을 만류하는 성도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음 막았습니까?
 
21:21절에 보면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선교는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은 전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강조했던 것이 유대인들에게 많은 오해를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무시한 자가 아니었음에도 유대인들의 눈에는 율법을 무시하는 자로 비춰졌습니다. 그러한 오해 때문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벼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21:36절에 보면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감 이러라"
23:12 절에도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흥분한 사람들이 있는 예루살렘에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성도들마다 바울을 염려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권고하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고별설교를 하면서 -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거 하기를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두로에서 일주일을 머물 때 제자들이 성령이 감동이 되어 -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두로에서 다시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바울은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의 집에 유하게 되었습니다. 빌립 집사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수죽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성도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
 
목회자요 선교사인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결박당하여 고초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성도들은 바울에게 울면서 만류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분명하게 말을 했습니다.
21:13절에 보면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염려하는 성도들이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말했습니다.
 
 
둘째는 바울의 각오입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수족을 묵고 이 띠 임자가 이렇게 결박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언을 들은 성도들은 모두 한 결 같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눈물로서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오히려 그의 마음은 더욱더 확고해지고 결심은 더욱 강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울며 말리는 성도들의 마음에 인간적으로 감사를 느끼면서도 그들의 생각이 인간적인 정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행21: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적당히 핑계를 대어 빠져나갈 구실이 있는 데도 바울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런 필사각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의 필사각오의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1)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딤전1:12-13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 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 자였던 자신에게 도리어 은혜와 긍휼을 입혀주시고 자신을 충성된 자로 믿어주시고 인정해주신 주님의 사랑 앞에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고난도 달게 받게 합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오늘 주님을 따르는데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미극 독립전쟁 당시 한 독립군 병사가 적군에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고 묻는 집행관에게 그 병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 내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나라를 위한 사랑 때문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각오했습니다.
목숨까지도 각오하는 사랑의 힘은 큰 힘이 있습니다. 바울처럼 주님을 사랑하지는 못한다 해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고난도 희생도 기뻐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복음의 빚 때문입니다.
 
빚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안 좋은 빚입니다.
좋지 않은 빚이 있습니다. 빚지지 않아도 되는 빚이 있습니다. 빌리지 말아야 빚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흥비에 쓰려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좋은 빚입니다.
도박을 위해서 빚을 지고 사치와 향락 때문에 카드빚을 지고 쩔쩔매는 사람, 안 좋은 빚입니다.
 
어제 밤에 우리나라의 국가 부채가 얼마나 되는지를 인터넷을 통해서 찾아봤습니다.
2007년도에는 국가부채가 2992천억이었는데 2012년도 현재에는 4637천억이 넘을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 정부가 들어서서 국가부채를 너무 많이 졌는데 경제는 발전한다고 하는데 국가 부채는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우리 정부가 진 부채만이 아니라 기업이나 지방자치 단체에서 빚을 진 것 까지 포함하면 약 1250조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70%는 가계부채를 짊어지고 사는데 가계부채는 약 1100조로 이자만 해도 매년 60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 한 사람당 2200만원 부채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고 4인가구당 8800만원의 부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집을 사고 전세 값 대출을 받고 자녀 등록금과 학자금 대출, 자동차 구입 등 가게부채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가게부채에다가 국가의 부채 1250조원 까지 합치면 국민일인당 4700만원씩 부채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고 4인 가정당 18800만원의 빚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 땅에 응애 하고 태어나면 4700만원의 빚을 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제상황과 외화 보유고를 보면 아주 비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경제는 엄청나게 발전한다고 하면서 빚만 늘어나는 것은 국가 경영을 잘못했거나 우리가 너무 안좋은 빚을 지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빚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빚을 져야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은 없는데 어린 자식이 병들어 죽어 가고 있는데 병원비를 조달하려고 돈을 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빚입니다. 돈보다 생명이 백번 중요합니다. 빌려야 하고 꾸어주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빚이 있습니다. 가진 자라면 비록 못 받는다 해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는다면 빌려주어야 할 빚이 있습니다.
 
좋은 빚이 있습니다.
꼭 해야할 일을 위해서 빚을 져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빚입니다.
우리교회가 아파트가 들어오기 전에 좀더 빚을 져서라도 대지를 많이 확보해서 주차장을 확보했더라면 그것은 좋은 빚입니다.
아파트가 들어오기 전에 좀 부채를 지더라도 건물을 구입하던지 건물 전체를 임대해서 교육관으로 활용했더라면 교회는 더욱 갑절로 부흥되었을 것이고 부채는 청산되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일을 위해서 빛을 져야할 때도 있습니다. 과욕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을 위해서는 빚을 질 때 발전도 있고 성장도 있습니다. 빚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은 빚진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14절에 보면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의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빚이란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빚을 갚는 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했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빚진 자요 은혜의 빚진자요 복음의 빚진 자로서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는 필사각오의 신앙으로 주님께 충성을 했습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가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필사각오의 신앙으로 주님을 따르고 영혼구원을 위하여 충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주님의 사명 때문입니다.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빚진 자로서 고난과 죽음이 온 다해도 복음을 위해서라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필사각오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라마 불교사원
몽골에 가면 라마 불교 사원을 구경할 수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유독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는가하고 가까이 가서 보면 마니차(법륜: 法輪)라고 하는 금속 원통이 매달려 있는 대웅전 주위입니다. 누구든지 그 통을 손으로 한번 돌리면 그 속에 들어 있는 라마교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아서 그에 상응하는 업보가 감해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돌리고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깡통 속에 성경을 넣고, 그것을 교회 처마에 달아 놓고 한번 돌리면 성경을 한번 읽는 것이 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라마교를 믿는 신자들이 라마교 사원에 와서 그 금속 통을 계속 돌리고 있습니다.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 통을 돌리고 또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수십 번 읽었다는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그 경전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대로 살지도 않으면서도 그 금속 통만 돌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표정들입니다.
이것이 라마교를 타락시킨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 라마교 신자가 아니라 그냥 무늬만 라마교 신자,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형식적인 신앙은 라마교에만 있는 것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화 되어진 신앙,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신앙, 회칠한 무덤 같은 신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찰스 알렌 박사가 최근에 현대 교인들의 신앙 상태를 면밀히 조사한 결과 보고는 가끔 우리가 가슴에 새겨서 우리는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20%의 교인이 예배에 불참하고 있고
25%의 교인이 기도를 안하고 있고
30%의 교인이 기도를 할줄 모르고
35%의 교인이 성경을 읽지 않고 있으며
40%의 교인이 십일조와 헌금을 안 하고 있으며
60%의 교인이 신앙 관계 서적(예언의 신) 읽지 않고 있으며
70%의 교인이 교회 활동을 외면하고 않고 있으며
75%의 교인이 헌신과 봉사를 외면하고 책임진 일이 없고
85%의 교인이 한 사람의 불신자도 전도해 본 일이 없고
100%의 교인이 하나같이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기적중에 기적이라 했습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오늘 기독교의 위기는 소금이 맛을 잃어버린 것, 사명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후 초기에는 발자국 마다 순교의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대원군 때에도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고 왜정 때에도 50 여명의 목사가 순교했습니다.
잔인한 일본 총독부는 목사와 지도급 인사들 2천명의 살생부 명단을 짜놓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며칠만 늦어졌어도 2천명이 넘는 목사와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을 것입니다.
6.25동란 때에도 2,122개의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목사 535명이 순교했고, 장로, 집사, 평신도등 수없이 많은 사람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동양에서 한국만큼 순교의 피를 흘린 민족은 없습니다.
이런 순교의 피의 댓 가로 한국교회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사명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 십자가를 지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려고만 원하고 있습니다.
- 베드로처럼 멀찍이 아주 멀찍이 예수님을 따르기만 원하고 있습니다.
-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 죽을 것도 각오하는 필사각오의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 멀찍이 따라가다 보면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자기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려면 죽을 것도 각오하는 필사 각오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죽을 것도 각오한 믿음, 필사각오의 믿음을 가지고 살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죽을 것도 각오하는 믿음으로 살면 - 주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필사각오의 믿음으로 살아감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역사가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감당키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길은 험난한 길이요 십자가의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반대하고 말려도 올라가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주님을 본받아 주님을 따랐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고난이 기다리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울면서 바울을 붙잡고 가는 길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더라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빚진 자로서 복음의 빚을 갚는 일이라면 목숨까지 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죽음까지 각오한 필사각오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나는 주님을 따르겠다는 각오입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로 살겠다는 바울과 같은 일사 각오의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관으로 바꾸어지지 아니하면 참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 가을이 되었습니다. 지난날 100년 만에 찾아왔던 무더위와 무섭던 태풍도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어김없이 가을은 왔습니다. 역사를 멈추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의 신앙을 본받아 죽음을 각오한 필사각오의 신앙으로 주님을 따르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사명을 감당하시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 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늘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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