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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적인 신앙과 복음적인 신앙

박용래 (대전광역노회,대전장로교회,원로목사) 2014-01-07 (화) 06:36 10년전 5778  
율법적인 신앙과 복음적인 신앙
21:19-26 20:8-17                                2012.10.14.
 
세 명의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슬퍼서 울고 있었고, 두 번째 사람은 너무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은 분하고 억울해서 울었습니다.
겉모습을 보자면 세 명 모두 똑같이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각기 다릅니다.
 
어떤 이의 마음은 슬픔에 잠겼고, 어떤 이의 마음에는 기쁨에 잠겼고, 또 어떤 이의 마음에는 억울한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의학자들이 그들의 눈물을 분석하고 연구해 보았더니 눈물의 성분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감정을 갖고 우느냐에 따라서 그 화학적 성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분해서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에 염화나트륨이 가장 많이 분출되었는데, 이때 흘리는 눈물이 가장 짜다고 합니다. 겉모습은 같아 보이지만 속 성분은 각기 다르다는 얘깁니다.
 
오늘 우리가 똑 같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똑같은 의자에 앉아, 똑같은 찬송을 부르고, 똑같은 말씀을 들으면서 똑같은 모습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같은 모습이지만 예배를 드리는 내용은 각자가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에는 기쁨과 감사로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들이 계실 것입니다. 주일예배가 기쁘고 감사해서 예배를 즐거워하시는 성도들이 계십니다.
이런 성도들은 복음적인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기쁨이 감사가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적인 신앙인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도 감사와 기쁨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벌을 받는다는 의무감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기에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 다는 두려움 속에 기쁨과 감사가 없는 의무감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율법적인 신앙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계명은 지켜야 하고, 지키지 않으면 죄요, 죄를 지으면 매 맞을 수도 있으니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에 매인 사람이요 율법에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신앙인들에게는 기쁨과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벌 주실까봐 십계명을 지킨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얽매이는 삶을 사는 자요, 자유가 없는 자이며 율법에 종으로 살아가는 불쌍한 자입니다.
 
똑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율법적인 사람과 복음적인 사람, 이 두 사람의 마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적인 사람에게는 두려움과 의무감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복음적인 사람에는 기쁨과 감사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 선교에 주력하고 있을 때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복음만 전한다고 비판하고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할례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예루살렘교회 총회에서 결론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바울이 유대인의 전통을 무시하고 복음만 강조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자라고 분개하여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까지 나오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적인 신앙과 복음적인 신앙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성경에서 그 참된 의미를 찾아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자세는 어떤 모습인가도 반성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율법을 넘어선 복음입니다.
우리는 율법이 무거운 멍에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율법도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되 어지는 복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시대적 배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이나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백성들은 자유를 박탈당했고, 인권이 유린당한 채 노예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단 하루도 쉴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짐승 또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사람도 가축도 430년 동안 신음해야만 했고, 잔인한 노동과 무서운 채찍 아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왔습니다.
 
이런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시내 산에 도착하였을 때, 바로 그곳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이 선포된 다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었습니다.
20: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안식일에는 너뿐만 아니라 '남종과 여종은 물론 네 가축들도 일을 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도 예를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반들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모든 노동은 노비들의 몫입니다. 양반이 지게 지고 노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양반은 365일 하루도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 년 내내 휴일이었던 반면, 노비들은 일 년 내내 자유나 휴식이 없이 혹사당했습니다. 이런 때에 안식일 법이 나왔다면 노비들에게는 복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런 시대에 십계명이 선포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제 칠일에는 네 노비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 모든 짐승들까지도 쉬게 하라.
이 안식일 계명은 가난하고 억눌림 당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억눌림과 억압 속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십계명이 기쁜 소식이요, 복된 소식이요, 바로 복음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과거 일제 36년 동안 일본이 우리를 못살게 굴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강제 노동에 끌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쓸쓸히 죽어 간 동포의 숫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굶어 죽었고, 매 맞아 죽었고, 탈진되어 죽었습니다. 쉰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십계명을 선포하셨다고 생각해 봅시다.
"7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노비나 가축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 그날은 모두 쉬어라" 하셨다면 이 계명은 누구를 위한 법입니까?
일본인들을 위한 법입니까? 자유와 인권을 빼앗긴 노동자들을 위한 법입니까?
만일 강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라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이 계명이 멍에가 아니라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런 노동자들이 이 안식일 계명을 억지로 지키겠습니까? 아니면 기뻐 뛰며 감사하면서 지키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율법을 안 지키면 벌을 받아야 하니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직도 율법적인 신앙인입니다. 율법에 매인 안식일에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감사가 있고, 무슨 감격이 있겠습니까? 안식일을 지키기에 피곤하고 힘만 들 뿐입니다.
그러나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아왔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선포하면서 주인이나 종이나 가축에게도 자유와 쉼을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종이나 짐승까지도 자유와 심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을 알고 보면 십계명은 정말로 사람들에게 큰 복음인 것입니다.
이 계명은 약자가 빼앗겨 버린 인권을 회복시켜 주신 계명이요, 약자가 빼앗긴 자유를 되찾아 주신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누리는 날이요, 인권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요, 구원의 은혜를 감격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억지로 지켜야 하는 멍에의 날이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신앙인들에게는 주일은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는 모든 계명이
나를 위한 복된 말씀이라는 진리를 깨달으면 율법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영생을 얻을 수 없으니,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셨고,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시므로 타인으로 하여금 내 생명을 해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계명은 곧 내 생명을 보호해 주신 계명입니다.
 
"도덕질 하지 말라"는 계명도 그렇습니다. 이 계명을 주심으로 도둑으로부터 나의 사유재산이 보호받도록 하셨습니다. 시각만 바꾸면 "십계명은 곧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신앙으로 살면 의무감 속에 마지못해 행하는 것이지만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면 율법도 감사와 기쁨으로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적 신앙관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우월감을 가지고 항상 이방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려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복음적인 신앙으로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축복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신앙으로 주님께 기쁨과 감사함으로 충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할례를 넘어 복음입니다.
 
초대교회에는 할례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이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할례는 받아야 구원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오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방인들은 할례 없이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삼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교회에 돌아온 사도 바울은 할례문제를 가지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서운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성경에서 처음 할례에 대한 기록은 창17장에서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다. 내가 너와 너의 후손과 언약을 맺어 너와 너의 후손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나의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약속의 백성이 된 표징으로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계약서를 쓴 뒤에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다.”약속하시면서 약속의 도장으로 남자의 몸에 징표를 남긴 것이 바로 할례의식 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서를 종이에 남겼다면 세월이 가면서 낡아지거나 찢어져 없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모든 남자들의 몸에다 표시함으로 영원토록 지워지거나 없어지거나 잊혀 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할례는 오늘 날의 포경수술입니다. 그럼으로 유대인들은 언제나 할례를 받은 민족으로 자기들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선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태어나신 지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2:22)
 
할례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의 표시입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 선민이며, 거룩한 백성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대신에 할례 받지 못한 다른 백성, 다른 민족을 모두 이방인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약속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도 없는 하찮은 사람들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라면 남자는 누구나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이방의 남자들은 아무도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말씀하셨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성령 하나님께서 강하고 뜨겁게 임재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오히려 교회에는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의 숫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유대인들로 시작 된 주님의 교회에 이방인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생긴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예수님을 믿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한 것이고, 율법에 기록된 것이다.”
- 이미 할례를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 할례로 받는 것이 아니기에 할례는 받지 않아도 된다.”-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 하는 두 개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끼리 설전을 벌였습니다.
만날 때 마다 많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서로의 의견이 전혀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타협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의견이 나누어지면서 교회도 나누어지게 생겼습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교회에 총회가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모든 교회의 사도와 장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모였습니다.
15: 많은 변론이 있은 후기록되어 있는데,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다 내어 놓았습니다. 깊이 있는 토론이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에 필요성을 인정하여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에 목회자인 야고보 사도가 말씀했습니다.
15: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오랜 변론 끝에 예루살렘 총회에서 아래와 같이 결의하였습니다.
할례의 무거운 멍에를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 형제들에게 지게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돌아온 이방인 형제들을 괴롭게 하지 맙시다. 다만 교회의 덕을 위하여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그리고 피를 멀리하기로 합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할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복음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과,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받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전도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교회에 많아지게 되니 다시 할례 문제를 가지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미워하고 괴롭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행 21장에서 보면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 사도 바울을 맞이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7절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인 예수님의 친 동생 야고보와 교회의 장로와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대하여 낱낱이 보고 하자,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 반면 20절 이하를 보면 유대인들 가운데 율법에 열심을 가진 수만 명의 믿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바울이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배반하고, 할례를 하지 말라 하고, 우리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지 말라.’가르쳤다고 주장하면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바울을 붙잡아, 죽여 없애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초대교회에 무서운 시험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수만 명의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주님의 재림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또한 모세의 계명, 율법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성도들은 율법의 기록된 대로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의 기록된 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율법의 기록된 대로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을 지켜야 하고, 율법의 기록된 대로 돼지고기, 말고기, 개고기와 같이 부정하다고 정해진 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할례를 받아야 구원함을 받는다고 믿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율법을 지켜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믿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모세이후 지금까지 2천 여 년 동안 지켜왔던 유대인들의 모든 전통과 관습을 지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으로 다니면서, 모세의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할례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했고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잘 못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바울이 율법을 거 스리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대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자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흥분하면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다고 하는데, 오는 대로 없애버려야겠다고 선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수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예수님이 생명이 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만 다른 믿음, 다른 생각, 다른 생활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할례문제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할례와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사탄은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도록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부추겨서 교회를 공격해 왔던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을 가로막는 무리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날은 율법과 할례는 하나도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시절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할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세례로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십일조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성수주일로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나의 선행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나의 공로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율법적인 신앙관을 가진 성도들이 있고 복음적인 신앙관을 가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율법적인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고집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율법적인 신앙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의무감으로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고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고 기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충성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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