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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바울 곁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박용래 (대전광역노회,대전장로교회,원로목사) 2014-03-23 (일) 20:19 10년전 4188  

바울 곁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23:1-11                                                             2012.10.28. 박용래 목사

하나님과 아담이

에덴동산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었다. 아담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하와는 정말 예뻐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만 바라보지 않겠니?"

그러자 아담이 다시 하나님께 여쭈었다. "이브의 피부는 정말로 부드러워요. 왜 그렇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를 쓰다듬어주지 않겠니?"

"그런데 하나님, 이브는 좀 멍청한 것 같아요. 왜 그렇게 만드신 거죠?"

"바보야, 그래야 그 애가 널 좋아할 것 아니냐?"   

우리는 지난주일 바울 사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세 가지 자랑거리 율법과 성전과 그들이 선민이라고 하는 그 세 가지에 대하여 바울이 모독했기 때문에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 대하여 자기를 변호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철저한 유대인입니다. 성전도 사랑하고 율법도 존중하고 그리고 나 자신이 유대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이유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순교시키는데 선봉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내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변화된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율법을 온전히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구약의 핵심이요 율법의 완성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알리기 위하여 다녔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모든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에 뜻에 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시니 바울은 하나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도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

그런 이야기를 유대인들 앞에서 전했습니다 

이 바울의 변명을 듣고 흥분한 군중은 "저 놈은 살려둘 수

없다." 그렇게 외치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레벨로 놓고 판단하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같이 경건하고 의로운 선민을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과 똑같이 평가하다니, 이 유대인의 특권과 자랑을 배격한 복음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유대인

들은 율법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외면하고 있었습니

. 바른 신앙이란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히브리어 말로 유대인들에게 자기를 변명하는 것을 들으면서 유대인들은 더욱 바울을 죽이려고 흥분했습니다. 이 때 로마의 천 부장은 바울을 유대인들의 손에서 빼냈지만 실제 바울은 무엇인가 큰 죄인이 아닌가? 의심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고문해서 죄를 자백 받아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자신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임을 주장했습니

. 로마의 시민을 법대로 치리하지 아니하고 매질을 하는 것

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죄수로 끌러온 바울이 로마시민권

자라는 말에 천부장이 깜짝 놀랐습니다. 더 이상 고문은 하

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 부장은 유대인들의 일이니까,

대인의 최고 높은 기관인 산해드린 공의회에 가서 정정당당

하게 바울이 변호할 기회를 주자고 생각을 하고 산 해드린 공

의회로 그를 끌고 가게 된 것입니다 

1) 공회 앞에 선 바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산해드린 공의회에 서서 바울이 변호하는 내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산해드린 공의회는 유대의 최고의결기관입니다.

이 공회를 헬라어로는 쉬네드리온이며, 아랍어로 산헤드린입니다. 이것이 파사 시대에 시작되었는데 창설 당시에는 원로원(5:21)이라 불렀는데 헤롯왕 때부터 산헤드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구성은 장로 제도를 따라 70명입니다(11:16).

주로 종교성을 띤 바리새인과 정치적인 색깔을 가진 사두개인과 원로들인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27:41, 14:43,).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그들과 결탁하여 부패하는 타락의 온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산해드린 공회는 아주 무서운 기관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라고 거짓 증인을 매수해서 빌라도에게 보낸 기관입니다. 스테반을 죽이라고 판결한 공의회입니다 

그래도 천부장의 생각에는 이 공회에 바울을 보내서 공정한 재판 절차를 밟게 하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른 재판을 받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 산해드린 공의회였습니다. 특별히 기독교 복음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적대적으로 판결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를 대표하는 기득권 측이 모인 재판정이기 때문에 절대로 기독교 복음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는 너그럽게 판단할 수 없는 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자리에 서서 담대하게 자기를 변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바울의 변론입니다.

바울은 공회 앞에 서서 양심선언을 합니다.

23:1- 오늘날까지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아왔고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양심에 대하여 몇 가지 종류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딤전 4: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화인 맞은 양심이란 양심이 마비된 상태를 말합니다. 양심에 가책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조금도 가책이 생기지 않습니다. 양심이 마비됨으로 죄를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아니하고 무서운 죄악이 관용한대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미 비인간화 되어진 세상입니다. 

톨스토이는 "양심은 나침반과 같다."고 했습니다.

선장은 날씨가 불순하여 좌우를 구별할 수 없을 때 나침반을

보고 항해합니다.

우리도 인생의 바다를 항해할 때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나침반과 같

은 것입니다. 양심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양심이 마비된 세상을 치료해야 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이 되

지 않도록 경계해야합니다.

 

둘째, 더러운 양심입니다.

거울이 추하고 더러워지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양심이 추하고 더러워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양심이 더러워지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오염되어 추하고 더러워진 양심은 온 세상을 타락하고 범죄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더러워진 양심은 날마다 살인과 폭력과 죄가 관영하지만 사람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아무런 가책도 없이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러워진 양심을 선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청결한 양심입니다.

"청결한 양심"'거짓 없는 양심'을 가리킵니다.

5:8-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이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워진 양심을 청결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은 이 세상에

 아무것으로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만이 더러워진 양심을 깨

끗하게 씻을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선한 양심

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23:1- 오늘날까지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습니다.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그 진리 가운데서 행하였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려고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나는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변명할 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성난 표정으로 명령했습니다. "

바울 곁에 섰는 사람에게 그 입을 치라”(2)고 명령했습니다. "저 방정맞은 입을 때려라." 그 것이 무슨 뜻입니까? 들을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피고로 잡아다 놓고, 변증할 기회를 줘서, 한마디 했더니만, 입을 때렸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일단은 변증할 기회를 주었으면 그 말을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것이고 들은 다음에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재판해야 될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채찍질 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법에 따라 재판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한 마디 하자마자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입을 때렸다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재판은 불법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재판의 불법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자마자 입을 얻어맞고, 얼마나 기분 나쁘고 모욕을 느낀 바울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3절에 심한 말을합니다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 시리 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하느냐 하니 이 "회칠한 담이여!" 회칠한 담은 다른 말로 회칠한 무덤이란 말입니다 

성경에 회칠한 무덤이란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말에 배경을 이해하면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많이 모이는 숫자가 평소보다 몇배나 되었습니다. 평소 몇만 되지 않던 인구가 수백만의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루살렘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 숙박문제가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시내에 묶을 여관이 없습니다. 숙박시설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제사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은 먼 거리에서 오는 경비도 많았고 또 한 주간씩이나 제사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여관비를 지불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길거리나 산에서도 잠 잘 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에는 산마다 동굴이 많았는데 그 동굴 중에 빈 곳은 서민들에게 너무 좋은 잠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동굴 중에는 무덤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모르고 시체가 있는 무덤으로 들어갔다 하면 문제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체가 있는 곳에 들어가면 부정을 타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한 것을 만진 자는 일주일을 기다려야만 성전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일 년에 모처럼 순례의 길을 지방에서부터 올라왔는데 실수해서 부정한 곳에 들어가면 일주일 동안 성전에도 못 들어가게 되니까, 순례 길은 아주 망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억울한 일을 막아주기 위해서 예루살렘 시 당국에서 명절 전에는 산을 싹 돌아다니면서 무덤인 동굴 앞에는 하얗게 회벽을 칠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회칠한 무덤이 깨끗하지만 속에는 썩는 냄새가 나는 시신들이 있으니 이런 동굴을 피해서 들어가도록 시 당국에서 순례자를 위하여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회칠한 무덤이요, 회칠한 담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 시 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3)고 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한 모독적인 말입니다. 겉에는 깨끗한 척 하나 속은 썩어 냄새가 진동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산해드린 공의회 사람들을 쳐다봤더니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골고루 섞여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변명했습니다.

6절입니다. -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나는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부활이 있다고 믿는 것 때문에 이 고생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중시했고 천사와 악마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대단히 종교적입니다. 보수적인 신앙입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의지를 중시하고 천사나 악마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대단히 종교적이고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 철학자들과 비슷했습니다 

바울의 변명가운데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다는 신분을 밝힘으로써 오히려 바리새인과 사두 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나는 바리새인으로써 부활교리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말을 하자, 바리새인들은 "저 바울이 우리 부활교리를 지지하네. 그런데 부활 때문에 저 사람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그러면 안 되지."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벌써 바울 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은 "부활? 말 같지도 않는 얘기 왜 하느냐?" 그런 얘깁니다.

이래가지고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울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사두개인들은 안 된다, 우리 교리에 대하여 정면으로 공격하므로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천부장이 지켜보니 바울이 재판도 받기 전에 테러를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천 부장은 바울을 또 끌어다가 감옥에 가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말씀은 바로 바울이 감옥에서입니다.

감옥에 같인 바울은 외로운 밤이었습니다. 몇일 동안 매도 맞고 죽을 고비도 넘겼고 동족에게는 버림을 받았고 전도 여행을 마치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배신을 당했고 감옥 밖에는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고 지치고 피곤하고 고독한 밤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 오셨습니다. 

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바울 옆에 서계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세 마디 말씀입니다.

첫 째는 바울아! 바울아! 힘내라. 담대 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네 눈에는 안 보여도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곁에 서서 주님은 담대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을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둘째는 그 다음에는 바울을 칭찬해주셨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주님께서 바울을 인정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바울은 증거 한 것이 없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려고 하다가 죽도록 얻어맞았고 죽을 뻔했으며 역효과만 일어났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주님은 너는 예루살렘에서도 나를 증거 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바울은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는 군중들 앞에서도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알리고 싶어서 증거 하다가 아무런 열매도 없이 얻어맞기만 하고 현재 감옥에 들어온 허탈감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네가 예루살렘에서도 나를 증거 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셋째는 로마에서도 증거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의 평생 꿈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여 그 복음이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계셔서 말씀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로마에서도 증거 하리라.

바울은 감옥에서 지친 상태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로마에 갈 수 있을까?

내가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예루살렘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계셔서 말씀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살아나간다. 반드시 로마로 들어간다.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네 꿈을 실현할 것이다. 갈 수 있다. 내가 로마로 널 보낼 것이다.

언제 어떻게 갈 지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목표는 분명한데 과정은 모릅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보낸다. 그 방법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 그런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큰 위로를 받습니다. 새 힘으로 충만함을 체험했습니다.

컴컴하고 고독하고 피곤에 지처 있던 바울에게 감옥의 밤은 행복한 밤으로 변했습니다.

죽음과 암흑 속에 있던 그 마음이 기쁨이 충만하고 평강이 가득하고 밝은 희망이 넘치는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바울이 지치고 힘들어 할 때 주님은 바로 바울 옆에 서계셨습니다.

그리고 힘을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계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도 피곤함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자신의 마지막 소원대로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꿈으로 다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오늘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고민하고 지치고 좌절할 때도 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가 어찌될 것인가? 미래에 대해서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판단하실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어느 길로 갑니까? 어느 배로 갑니까? 언제 갑니까? 묻지도 않고 대답도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울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건강하고 형통하고 잘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다가 지치고 피곤하고 좌절해야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옆에 주님이 서계시듯이 오늘 우리 옆에도 주님이 계십니다. 

바울에게 말씀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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