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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

이선규 (서울남노회,대림다문화센터,목사) 2014-05-18 (일) 16:28 9년전 4088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 3: 8-19
인간이 살아가는 중에 그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의 신분과 존재의 가치가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아담은 제자리를 떠나 버린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생은 제 자리를 떠나 비극 속에 살아 왔습니다.
 
1, 네가 어디 있느냐의 물음은 제 자리를 떠난 이탈자에 대한 추궁입니다.
 
모든 불행과 비극은 어디에서 옵니까? 제 자리를 이탈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범죄 한 인생에게 돌아간 최대의 불행은 제자리를 잃어버린 데서입니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위치를 떠나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근무지 이탈 죄는 군대에서는 무엇보다도 엄히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리를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이조 말엽에 우리나라가 일본군국 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은 우리 민족이 상하를 막론하고 제 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국정을 맡은 왕들이 여인들 틈에 끼어 육욕을 불태우고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당파 싸움의 제물이 되는 무질서의 상황이 일본인들의 침략 근성을 자극시킨 것입니다.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하는데 만물이 다 각기 제 자리를 지키고 질서 속에 운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스모스란 희랍어는 질서, 조화, 우주, 등의 뜻을 가집니다.
인간의 역사가 평화를 유지하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들이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그 자리를 지키고 자기의 의무를 다 하는데서 나라는 평안해 지고 가정은 행복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가정 주일입니다.
가정에서는 가정의 위치가 있고 남편은 남편의 위치가 있으며 아내는 아내의 위치가 있습니다.
가정 에서는 부모의 위치가 가장 중요 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고 여자는 남자의 몸입니다 순종과 사 랑의 관계입니다.
손은 손의 역할이 있고 발은 발의 역할이 있습니다. 발이 왜 나만이 이렇게 희생을 해야 하느냐고 자기 위치를 떠나면 발 자신도 설 곳이 없어지고 맙니다.
남편은 남편의 위치를 지켜야하고 아내는 아내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지킬 때 거기에 평화가 있고 조화가 있고 행복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제 자리에 있을 때는 언제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법입니다.
꽃잎도 제자리에 있을 때만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도 눈, , , , 그밖에 모든 윤곽이 제자리에 바로 붙은 사람을 인물이 좋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6:4절에 베드로는 각 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책 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라. 각 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직무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의식해야 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이 말은 모든 인생이 제 자리를 지켜야 할 것을 촉구하는 질문 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만물의 주관자로서 떳떳하게 살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 이었습니다.
유다서에는 자리를 이탈해 버린 가인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요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공통된 것은 모두가 제 자리를 떠나 있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극은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간 바로 그 때부터 시작 된 것입니다. 아들의 정위치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세월호의 선장의 위치는 안전하게 선원들을 인솔하는 것이고 위기를 만나면 끝까지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선원들을 구출 하는 것이 선장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접어두고 자기 혼자들만 살려고 뛰쳐나온 것입니다.
인생의 정 위치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오늘의 인생들이 격어야 하는 모든 비극의 원인은 하나님을 떠난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고 계십니다.
 
2,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하나님을 피하던 아담의 도피에 대한 추궁 이었습니다.
아담이 왜 피했습니까?
부끄러웠기 때문이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
왜 두려웠습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인생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립니다.
죄는 인생에게 부끄럼을 줍니다.
산아 !나를 가리우라’. ‘바위야 나를 덮어라 진노의 얼굴에서 나를 피하게 하라고 마지막에 구원이 없는 인생들은 울부짖을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 했던 것이 아담의 망동 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담이 그의 후손들에게 물려준 고질적인 유산입니다.
 
3,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기 위한 사랑의 음성 이었습니다.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역어 수치를 가리 우려던 아담의 노력은 무요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 우리에게 가장 희망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신 가죽옷은 두 말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상징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어린 양 예수에게 담당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치를 가리 우시기 위해 십자가에 자기 몸을 희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고 계십니다. 제 자리를 떠난 인생 하나님을 떠나 숨어있는 인생들에게 입혀 줄 가죽옷을 마련해 놓고 인생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은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의 피를 믿고 인생이 제 자리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의 직책을 충분히 이행할 때 우리의 시대는 새로운 광명으로 밝아질 것이고 거기서 우리의 자손들은 영원히 행복 할 것입니다.
왜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을까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 간 것입니다.
왜 오늘날 믿는 성도들이 신앙의 자리를 이탈하게 됩니까?
어느 시점 까지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좋았는데 어느때 부 터는 귀찮게 느껴졌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것은 먹고 저것은 따먹지 말라는 규제가 있고 지시가 있습니
그것은 사실 두 사람의 복된 생활을 위함이요 생명과 인격을 지켜 주시기 위함인데 간섭과 억압으로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어 어서 먹어봐하는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현대인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니까 양심에 가책이 되는 것이 너무 많아서 불편해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지 말아라는 .것이 너무 많고 하라는 것도 많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하나님 보다는 자기 소원을 들어 줄 것으로 생각되는 우상을 믿게 된 것입니다.
또한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도 교회에서는 믿는것 같이 보여도 서삶의 현장에 나가면 하나님을 추방하고 내 마음대로 마음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 믿는 것이 피곤해 보이고 힘들어 보여도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살 수 없습니다
현대인이 숲은 또 하나의 숲은 장식 이라는 바리케이트 를 치고 숨으려고 합니다.
어쩌다 도시 골목을 걷다보면 여자들이 길 거리에 나와 않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대로를 보이면 너무 추하니까 꾸미고 나옵니다.
가식하고 위장을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큰 사람으로 나는 이런 큰일을 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고 장식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위, 신분, 명에 등으로 자기의 수치를 가리고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보이려고 하는 데 그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위는 지위이지 자기는 아닙니다. 교회나 사회에서 어떤 지위에 있더라도 먼저 진실한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복음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저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것을 가지고 자기를 치장함으로서 자기의 참된 모습을 감추고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그런 일이 없도록 네 위선과 가식의 껍데기를 벗어 놓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10 문둥 환자들이 예수님께 나와 고침 받은 기사가 0나옵니다. 그런데 감사 하러온 사람은 한명 뿐이 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섭섭한 나머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는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오늘나 자신이 9명에 속한 것은 아닙니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들을 구원해 주시고 살려 주었는데 그 은혜를 감사하는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있지 않기에 지금도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사랑해야 함에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리에 않아있고 용서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피하고 나무 잎 그늘 아래 숨어있는 우리자신을 돌아보고 주여 여기 있나이다. 주님께 나와 다 내어놓고 감사하는 자리에 않으시기를 바랍니 다, 충성하는 자리, 기도하는 자리, 전도하는 자리에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물을 때 아담이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았다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와 솔직하게 잘못을 내어놓고 회개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선악과를 뱀의 꼬임에 빠져 먹고 말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회개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담은 이러한 좋은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회개 할 기회를 놓쳤지만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원 위치로 바로 돌아설 때 하나님은 회복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 자리를 지킵시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우리는 예수의 공로로 죄 사함 받은 하늘의 백성임을 잊지 맙시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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