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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상

"소리 없는 크나큰 울부짖음"

이윤상 (전북노회,성야고보교회,목사) 2014-06-12 (목) 14:07 9년전 1845  

2014년 3월 2일 주현절 여덟째주일 경동칼럼  



"소리 없는 크나큰 울부짖음"



지난 달 26일 저녁 8시 30분쯤 송파구의 반지하에 세 들어 살던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한겨레 신문이 전하는 사건을 요약해 보았습니다. 


세모녀는 70만원이 담긴 새하얀 봉투를 남겼습니다. 봉투 안에는 오만원권 14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방세 50만원과 가스비 12만9,000원, 전기료·수도료 등을 어림한 돈이었습니다. 봉투 겉면엔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들이 숨을 거둔 비좁은 방은 작은 침대와 이불, 각종 세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삶을 마치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난 20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집에서 발견된 영수증에는 20일 600원짜리 번개탄 2개와 1500원짜리 숯, 20원짜리 편지봉투를 산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번개탄은 간이침대 밑 냄비 속에서 재가 돼버렸고 숯은 싱크대 위에 봉투도 뜯기지 않은 채 놓여 있었습니다. 지난해 초부터 50만원으로 오른 이달치 방세와 가스비 12만9000원, 전기세·수도세 등을 어림한 돈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모두들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왜? 이들 세 모녀는 극단덕인 선택을 했을까? 12년 전 방광암으로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이들은 2005년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합니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8만원이었습니다. 큰딸은 당뇨와 고혈압에 시달렸고, 작은딸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 불안한 일자리를 떠돌았습니다. 오롯이 엄마의 식당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두 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두 딸 명의로 신용카드를 사용해 채무를 지게 되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두 딸은 신용불량자여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세 모녀의 비극은 박씨가 1월 말께 넘어져 오른팔을 다치면서 비롯됐습니다. 이들이 떠나버린 집엔 박씨가 썼던 '석고붕대 팔걸이'가 걸려 있었습니다. 박씨는 팔에 깁스를 하고 나서 식당 일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이들 세 모녀의 죽음은 생활고 때문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생활고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이 잘 못됐다고 언론은 저마다의 의견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충격에 휩싸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습니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을 돌볼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저는 이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겪고 난 후, 경제 위기는 극복했다고 하지만 서민들은 더 큰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언론에서는 모 기업이 사상 최대의 수익을 달성했다는 기사를 쏟아냅니다. 그런데 이런 경제적 성과와는 반대로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워져만 갑니다. 


올해 초 체감경기는 외환위기의 2/3수준으로 최악의 상황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삶의 위기입니다. 주부들 사이에서 체념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공요금과 물가는 나날이 올라가는데 남편 월급과 아이 성적은 제자리이거나 오르지 않는다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회복하지 못하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립니다. 


복지 사각지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 사각지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들 세 모녀가 극단적인 삶을 선택한 이유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넘어가면 내일 또 고난이 기다리고 있고, 이 고난을 넘기면 희망이 아닌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절망이 이들에게 남긴 것은 죽음이 모든 것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들 세 모녀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죽음을 택하고 남긴 70만원이 크나큰 울부짖음으로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이 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규탄하는 크나큰 울부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렀으므로, 주님께서소돔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창세기 19:13) 


저는 우리가 재물의 안락을 누리는 성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남들이 울부짖든 말든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이들 세 모녀는 생활고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하지만 이들 세 모녀에게는 보증금 500만원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월세도 공공요금도 남겼습니다. 돈이 없어 이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신다면 뭔가 앞 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들 세 모녀는 돈이 없어 죽음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잃어서, 우리에게 사랑이 없어서 그들 세 모녀는 죽음을 택했습니다. 


요즘 부쩍 목사인 제게 자살에 대해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목사님! 자살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참 난감한 질문입니다. 제게 질문하는 분 옆에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을 버린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겠어? 질문같은 질문을 해야지!"라고 면박을 주기도 합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릴 만큼 힘든 이웃을 외면한 우리의 죄가 더 크겠지요!"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오늘도 울부짖습니다. 소리 없는 죽음으로 울부짖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크나큰 아우성이 들리지 않나요? 우리에게는 삶의 희망이, 그리고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멘.†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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