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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일까?

이윤상 (전북노회,성야고보교회,목사) 2014-06-27 (금) 21:37 9년전 16674  

2014년 6월 29일 성령강림절 넷째주일 경동칼럼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일까?



지난 목요일 선배 목사님께서 페이스 북에 소식을 올리셨습니다. 요사이 제 칼럼을 보시는 분들이  많아지셔서 실명은 이야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선배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교인들이 맘을 모아 매입한 새 교회 공간 인테리어 작업이 한창인지라, 요즘은 정말 이러다 과로사, 순교하겠다 싶을 만큼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바쁘고 분주하다. (중략) 공사 진행 과정에 뭐 빠진 것 없나, 잘못된 것 없나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주한데, 거기 더하여 공사 때문에 피해 받을 수 있는 주변 이웃들 두루 신경 써야 하고, 부족한 재정도 충당해 와야 하고, 공사 마치자 마자 구비해야 할 의자, 성구, 음향, 간판 등등도 미리 준비해야 하고 , , , 하니, 좀 지친다. 상가 한쪽 70평 작은 공간을 개조하는 이 정도 공사도 이리 힘든데,,," 


선배 목사님께서 신경 쓰시는 공사 때문에 피해 받을 수 있는 주변 이웃들이 누굴까? 선배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참, 오늘 오전에는 아래층 통일교 목사님을 처음으로 만나 환담을 나누었고, 오후에는 우리교회 관리위원회 집사님들과 함께 우리와 같은 층을 쓰는 여호와의 증인 대표들을 만나 일종의 '상견례'를 치루었다. 여기는 과천의 '종교빌딩'. 이분들과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 일은 긴장되기 보다는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그런 마음이 들어 다행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는 선배 목사님을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뭔가 좀 이상한 목사들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는 소위 이단이라고 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참 흥미진진합니다. 도대체 왜? 이단에는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는데 사람들이 몰린단 말인가? 무엇이 문제일까? 먼저 목사들의 책임이 큽니다. 교우들께서 말씀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충분히 인도하지 못하는 목사 탓입니다. 그 다음으로 말씀을 읽기만 하고, 말씀을 깊이 깊이 묵상하며 뜻을 새기지 않는 교우들 탓이기도 합니다. 말씀은 체득되어야 합니다.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일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으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창세기 23장 1-19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하느님께서 왜? 그런 요구를 하셨을까?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런 동요가 없이 길을 나섭니다. 


여러분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이 좋으니까요! 과연 그럴까? 창세기 21장 8-21절에는 이삭이 젖을 떼자 잔치를 하는데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몹시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을 내치라는 사라의 말에는 괴로워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습니다. 왜? 아브라함의 반응은 이렇게도 다를까요?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다구요?


신화와 전설, 고고학적 자료로 미루어 볼 때 페루·잉카·고대 이집트·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이란·인도·그리스·로마·중국 등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서는 대부분 신을 위해 인간을, 특별한 경우 자기 아이를 제물로 바쳐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바치라는 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신의 총애를 받고 죽음을 넘어선 불멸의 존재로 한걸음 다가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아무런 동요가 없었던 것을 다분히 믿음이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 놓고 죽이려는 순간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창세기 23장 12절) 


많은 기독교인들은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에 강조점을 둡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이렇게 들립니다. "너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는 너의 믿음을 알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들을 포함한 인간을 제물로 받는 신이 아니다. 나는 인간을 제물로 기뻐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는 이삭을 바친 때문이 아니라, 창세기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자기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데리고 소돔까지 쳐들어와 롯을 사로잡아 갑니다. 아브라함은 삼백열여덟 명을 데리고 단까지 쫓아가 적들을 쳐부수고 롯과 사로잡혀 간 이들과 재물을 되찾아 옵니다. 소돔왕과 멜기세덱은 왕의 벌판에서 아브라함을 맞이 합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모든 왕을 제압한 제왕, 황제로 귀환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9개 나라를 복속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름으로 민족과 국가를 이룰 수 있는 통일제국의 과업을 이룬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민족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제왕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제국의 황제가 되는 길을 버리고 9개 나라의 왕으로부터 쫓기는 불안한 나그네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갑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된 이유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 속에 담긴 놀라운 진실을 외면 한 채, 우리의 입맛에 맞는 대로 해석하다 길을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 속에 진리를 깊이 깊이 묵상하며 체득하는 느린 걸음이 필요합니다. 말씀에서 샘솟는 영혼의 맑은 물로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이윤상 2014-07-02 (수) 15:12 9년전
전북노회 여름성경학교 교사 강습회로 신솔문 목사님께서 주신 코멘트에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후배 목사의 게으름에 용서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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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솔문 2014-07-02 (수) 21:21 9년전
아브라함 본문 나갈 때 전화로 물어보려고 했어요.
보충 설명 간단히 해주시면 됩니다.
급하지 않습니다.

- - -
목사님, 오래 전에 세본문묵상모임 때 제시하신 설교 원고를 보고 그 무게감에 놀랬던 기억이 납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십시오.

금년 하반기 순서설교는 "창세기"입니다. 진작 창세기를 주일예배 때 나누고 싶었는데 신약 책들을 좀 더 충분히 다룬 후에 나누는 것이 좋겠다 싶어 참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해석의 원칙과 관련된 책들을 메모해두고 있고요. 그래서 그런지 이 칼럼에 관심이 갑니다.

'자료화'하려다보니 궁금한 것 몇 가지가 떠오르는군요. 우리가 '믿음의 조상'을 언급할 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쓰입니다: (1) 아브라함의 계보가 믿음의 '라인'이다.  (2) 아브라함이 믿음의 모범이다.

(2)라는 의미를 가지고 모리아산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성경적 의미를 떠올리시는 분은 모리아산 바로 다음 본문 22:15-18 때문에 믿음의 조상과 모리아산 이야기를 연결할 수도 있고요.

목사님은 (1)과 관련되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 두 가지 중(15장과 17장), 처음 것이면서 비장한 언약식이 있는 15장을 "믿음의 조상"과 연결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15장 1절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후에" 앞에 있는 14장 이야기를 제시하신 것이고요.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후에" 만으로 연결하기에는 근거가 좀 약합니다. 단순한 시간 순을 말하고 있을 수 있거든요. 게다가 12장 1절 이하도 14장 사건 이후에야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해석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혹시 목사님 해석을 뒷받침하는 추가적인 근거 내지 성경학자의 '인용'이 있으면 보충해주십시오~ 창세기 준비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추신] 모리아산 이야기에서 "인신제사 금지" 메시지 보신 것 동의합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동요가 없었다"는 해석에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설교했었죠. "아버지로서 겪는 고통이 워낙 당연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마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행동을 기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동요가 없었다면 사람이 아니라 인조인간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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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솔문 2015-07-13 (월) 09:37 8년전
이목사님, ‘급하지 않다’고 했더니 아예 답신을 안 주시는군요. 이후 세월호 유가족 돕는 일에 헌신하신 일을 생각하면 전혀 섭섭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순서 설교 25번째로 15장을 어제 마침내 나누었습니다. 14장과 15장의 관계에 대해 드린 질문에 대해 자답을 하자면, 14장과 15장은 목사님 말씀대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네요. 1절의 ‘두려워 말라’나 ‘방패’, ‘상급’이라는 표현이 군사적 용어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된 이유”가 14장의 아브라함의 모범적 행적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4장과 15장의 긴밀성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15장과 17장을 언약식으로 봅니다만, 제가 보기에 15장은 하나님 기준에 맞다는 의미의 “의로운 삶”을 살아낸 아브라함을 격려하시는(13:14 이하 같은) 성격이 매우 강합니다. 격려를 엄청나게 세게 하다보니 거의 ‘언약식’ 급이 되어버린 것이죠.

의미있는 나날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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