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이윤상

어느 목사의 세월호 유가족 이야기

이윤상 (전북노회,성야고보교회,목사) 2014-11-05 (수) 13:24 9년전 3395  


어느 목사의 세월호 유가족 이야기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뀐 사람들, 상상하기도 힘든 일의 당사자가 된 사람들, 서로 다른 삶에서 별안간 하나가 된 사람들. 세월호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의 부모들입니다. 세월호 유가족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도 4월 16일, 내일도 4월 16일, 새 날은 밝아 오지만 언제나 4월 16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 일상은 슬픔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함께 했던 모든 것은 고통입니다. 이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상처로 남습니다. 이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트라우마를 치료한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상 속에서 이 상처를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은 일상에서 트라우마를 견딜 수 있게 되어야 하는데, 그 일상이 천막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야 할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천막에서 상처를 안고 사는 부모들은 점점 더 심각한 상황이 되어 갑니다.

일상이 천막이 되는 현실에서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베들레헴을 봅니다. 만삭의 여인을 마구간에서 해산하게 하는 비정함은 오늘 대한민국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고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헤롯의 무자비함을 침몰해 가는 배 안의 생명을 외면하고 이후 사고 수습과정과 유가족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서 보는 것은 무리일까요?
세월호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4월 16일 유가족들이 두 눈으로 본 현실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정부가 유가족에게 한 행태들 속에서 대국민 사기극이 드러났습니다. 사상 최대의 구조라는 언론의 보도는 거짓이었습니다. 배를 구해 사고 현장으로 달려 간 부모님들은 선수 부분만 남은 세월호에 고무보트 몇 대가 맴도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 날 구조활동에 참여한 잠수사는 10명이라는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밝혀졌습니다. 언론이 보도한 거짓,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사실들은 수많은 의혹으로 남아 유가족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7월 25일, 세월호에서 희생된 단원고 학생의 부모들에게 파송되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에 동참한 이후 오늘까지 유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가족들과 함께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별도의 동조 단식 천막에서 시민사회단체 분들과 함께 지내며 노숙이 시작되었습니다. 폭염과 비바람, 태풍이 오기도 했습니다. 지하철 화장실에서 노숙인들과 함께 겨우 세면을 하고 단식하는 유가족과 똑같이 생활하자 마음을 열었습니다. 유가족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면담을 요청하며 청운효자동주민센터로 와 노숙을 시작하자 비닐 한 장에 의지하며 유가족과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두 달여를 지냈습니다. 이젠 유가족들과는 가족처럼 지내지만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합니다. 제가 유가족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름에 시작한 면담요청이 가을 한복판까지 왔습니다. 겨울이 가까이 느껴집니다. 찬바람이 몰아치니 유가족들은 진도의 봄을 떠올립니다. 유난히 차가웠던 그 봄,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 세월호의 에어포켓에서 애타게 불렀을 아빠, 엄마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한 밤 한스런 여인의 울음에 소스라치게 깨어 보면, 아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 흐느끼는 엄마의 눈물에 달빛이 담깁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귓가에 맴돕니다. 아이들이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 불렀을 엄마, 아빠들은 다시 팽목항의 찬바람을 회상하며 아이들이 바다에서 나와 안치되었던 것과 같은 하얀 천막에서 숨쉬기조차 힘든 잠을 청합니다. 이렇듯 힘든 여정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희생자 부모들에게는 아이들이 생중계되며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진실, 살 수 있던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은 진실을 알고 싶어 합니다. 이 진실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는 국민적 열망은 유가족의 열망과는 같은 듯 다릅니다. 국민적 열망도 같은 듯 다릅니다. 우리가 세월호 유기족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세월호 참사는 유가족들만의 사건도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는 모두에게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충격에 휩싸인 이들은 안타까움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통제된 언론의 왜곡된 보도로 상황인식은 달라졌지만 슬픔을 나누려는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6개월을 지나면서 여전히 유가족은 진실을 원하고 있지만 국민들의 관심은 식어 가고 있습니다. 아쉬움이 많지만 지나온 시간들을 회상해 보면, 세월호 참사 100일을 기점으로 세월호 이슈는 정점을 찍었습니다. 100일 이전과 이후 무엇이 달라졌을까? 100일 이전에는 세월호 이슈의 공감대에 아빠, 엄마, 부모의 애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프레임에 매몰되지 않았던 시기, 국민의 공감대가 확산되었습니다. 전국을 다니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국민서명을 받던 유가족에게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이 정치적 이슈로 떠오르며 관심사는 조금 높아지는 듯 했지만 이내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버렸고, 국민의 관심도와 지지도는 하락했습니다. 언론에서 더 이상 주목하지 않는 사안이 되버려 국민적 관심을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공중파와 일간지 주요 언론 보도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더 많아졌습니다. 대안언론과 SNS가 바른 정보를 전달한다 해도 한계는 분명합니다. 갇혀버린 정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일까?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가 같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월호 이후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지 또 무엇에 눈 뜬 것인지 활발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세월호 참사로 교회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눈 뜬 것은 무엇입니까? 수많은 생명이 수장되는 것을 보고 외쳤습니다. 저들의 생명을 구해주소서. 그러나 한 생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교회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애매모호한 답이었습니다. 이 참사가 하느님의 뜻이란 말입니까? 신앙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황을 맞은 한국교회의 울부짖음에 성직자와 신학자들은 어떤 답을 해야 할까요?
 
세월호 참사 이후 가장 큰 질문은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입니다. 어느 깊은 밤, 한 맺힌 여인의 울부짖음이 들려왔습니다. 잠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엄마는 제게 하소연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 받아 3년 전부터 신앙을 버렸는데, 팽목항에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주검이 되어 돌아왔고, 그 날 이후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 이름뿐인 신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내 아들을 살려내지 못했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없다며 저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신가? 물질적 풍요를 주고 인간의 바램을 충족시켜주는 수호신을 버리고 고통당하는 이들과 차디찬 물속에 함께 하시고 그 영혼을 맞으신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올바로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의 바른 이해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한 채, 사랑을 외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교회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새롭게 개혁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를 떠나 함께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서로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누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거룩한 성령의 역사로 사랑을 행하지 않는다면 고통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위해 나설 수 없습니다. 지극한 사랑 없이 정의는 없습니다.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면 영의 세계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영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역사를 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려 본질에서 벗어난 세상을 보게 하시는 하느님의 강한 역사를 보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는 영의 눈이 멀어 버린 것입니다. 영적 맹인이 된 한국 교회는 더 이상 하느님의 공동체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면,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 돌이키는 것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세상의 현실은 암담합니다. 그 암담함의 기준이 불합리함이라면 시민사회단체가 나설 일입니다. 그 암담함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은 현실’이라면 비로소 그리스도교가 나설 때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현실에 ‘아니요!’라고 외치는 것은 정치적입니다.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외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고 ‘아니요!’라고 외칠 수 없습니다. 고통당한 자들과 함께 하며 눈물을 흘릴 때, 그 고통은 나의 고통이 됩니다. 고통의 울부짖음 없이 그들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삶으로 함께 하는 것이야 말로 낮은 곳으로 임하여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넘어 초월적 하느님의 은총이 없다면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은 영적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하늘의 위로입니다.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초월적 소통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찢겨진 성전의 휘장입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화해는 하늘의 뜻을 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 이루어집니다.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위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에게 초월적 소통, 하늘과 땅의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는지 커다란 화두를 던졌습니다.

오늘도 청운효자동주민센터 맞은 편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세월호참사대책위원회가 드리는 기도회가 드려집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 7시가 되면 비가와도 두셋 모여도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애찬을 나눕니다. 한결같이 드리는 그 기도는 우리의 영성에 깊이를 더합니다. 십자가 앞에 겸허히 기도하며 고통당하는 이들의 삶을 나누는 기도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삶을 나누고 함께 눈물 흘리며, 하느님의 은총에 우리를 온전히 들어 갈 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회상하고, 기도하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좁은 문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열어 갈 수 있습니다. 아멘.

hi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