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박용래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박용래 (대전광역노회,대전장로교회,원로목사) 2015-02-24 (화) 21:19 9년전 2600  


 

                     두 세계가 갈등하고 있습니다.

14:1-7                                             2015.02.22. 박용래 목사

이 세상에는 항상 두 세계가 공존합니다. 빛과 어둠, 진리와 비 진리, 높음과 낮음, 하늘과 땅이 바로 그 예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과 악,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천국과 지옥, 이생과 내생, 남과 여, 젊은이와 노인도 서로 공존합니다.

이 두 세계는 서로 서로 견제하고 갈등하며 때로는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든 이 두 세계 중 하나에 속하게 됩니다.나는 중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중간은 없습니다.

자세히 보면 어느 쪽인가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더 기울어진 사람이 있고 덜 기울어진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종교에도 해당됩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종교들도 크게 두 세계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유신론적 종교이고 또 하나는 무신론적 종교입니다.

유신론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사람은 모두 이 두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중간 위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이 두 세계가 존재하며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대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도 이런 두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무신론적 세계관과 유신론적 세계관입니다.

 

1) 무신론적 세계관입니다.

무신론적 세계관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세계관입니다.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신론적 세계관입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히브리말로 나발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외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내적으로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이 나발들이 참 많습니다.

 

2~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 3~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노아의 홍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당시 세상의 부패상을 상기하여 지은 말씀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무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무신론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과 자신의 생각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자연과 오늘의 역사 이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 영적 세계, 내세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 세계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4절 끝을 보면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무신론적 세계관 닫힌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2) 유신론적 세계관입니다.

유신론은 무신론과 반대의 개념입니다. 이 세상에 무신론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고 불의가 있으면 진리가 있듯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5절을 보면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고 하였고

6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유신론적 세계관입니다. 이 유신론적 세계관은 현재의 자연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넘어 천상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현실의 세계를 넘어 영적인 세계를 보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열린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닫힌 세계관은 하나님께서 오늘의 세계와 역사를 향하여 간섭하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닫힌 역사관이라고도 말합니다.

닫힌 역사관에서는 인생의 엄숙함이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닫힌 역사관, 닫힌 인생관이 무섭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 닫힌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권세를 가지게 되면 무서운 독재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지난번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히틀러가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끔찍한 포로수용소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또 캄보디아에는 폴포트 정권 때 수많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사람들의 해골이 오늘날 전쟁기념관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북한에 김일성과 일본의 군국주의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억압과 학살을 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신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두려운 대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집안에 무서운 어른이 없으면 아이들이 버릇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신론적 열린 역사관을 가지게 되면 오늘의 세계와 역사뿐 아니고 오늘과 내세의 세계를 인정하게 됩니다. 또한 그 세계가운데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섭리하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을 열린 세계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열린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언제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인생을 살아가게 됨으로 삶에 엄숙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락을 해도 정도를 넘지 않고 크게 타락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지어도 정도를 넘지 않고 흉악한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도를 넘어섭니다.

또한 넘어져도 아주 넘어지지 않고 금방 일어서게 됩니다. 경계선을 넘습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이 두 세계관이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 두 세계관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들 기울어 져 있느냐 문제이지 중간은 없습니다.

 

시편 14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모습을 보면서 통탄하여 이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 시를 통해 너희들이 바로 무신론자들이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껍데기와 모양만 하나님 백성이지만 그 안은 무신론자들보다 더 타락하고 부패하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더욱 못된 짓만 골라 한다는 것입니다

 

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도 너희의 행함은 이방인보다도 더 악하고 추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무신론자 보다 하나님을 어렴풋이 아는 무신론자들이 더 무섭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설명하고 전하면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아는 사람들이 타락하고 부패하면 더 무서운 사람이 됩니다. 심지어는 적그리스도가 됩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타락한 경우입니다. 사탄도 천사가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타락함으로 사탄이 된 것(14:12-15)입니다.

오늘 안티 기독교인들도 기독교를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전에 교회에서 열심히 교회를 섬겼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기 맘에 들지 아니한다고 또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잘 알기 때문에 기독교를 비판하고 스스로 안티가 되고 교회안에 무신론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서운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생활 어쩡정 하게 하는 사람들이 더 무섭게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안티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20세기 최악의 인물 3명을 뽑았습니다.

바로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폴 포트입니다.

세 사람 모두 독일, 소련, 그리고 캄보디아를 통치한 독재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은 독재정치를 하면서 수백만에서 수천만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주범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셋 가운데 히틀러나 스탈린은 크리스천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어려서 수도원 학교에 다니며 수도원 원장을 꿈꾼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수도원 합창단 단원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등 너무도 음악을 사랑한 사람이고 또 감수성이 예민한 화가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나중에 독재자가 되어 6백 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흉악한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더 합니다.

역사학자들은 히틀러보다 오히려 스탈린이 더 무서운 독재자요 학살자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스탈린도 시인이요 젊은 시절 성직자를 꿈꾸던 성실하고 똑똑한 신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물들어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해 도살자라는 별명까지 얻은 20세기 최악의 학살자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무신론자들입니다. 다윗이 책망했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사람들 무신론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나도 옛날에 교회 다녀봤어.”나도 교회를 잘알아!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도 기독교 안티세력으로 기독교를 허물고 있습니다.^^

폴포트는 그의 마음에 신이 없기에 두려울 것이 없는 자였습니다. 무신론자입니다.

캄보디아에 엄청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인했습니다.

교회밖에 있는 무신론자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이 닫혀진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허물고 있습니다.

 

다윗은 본문에 나오는 이 시를 통해서 자신은 하나님 백성이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하지만 다윗이 볼 때는 무신론자들과 같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을 보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지적입니다. 이 지적은 오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의 옷만 입었을 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다윗은 이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할 하나님의 멧세지입니다.

 

 

3) 인생은 3때가 있습니다.

 

태어나는 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태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출생은 아무에게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내가 한국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가 박씨 가문에 태어나고 싶어서 박씨 집 안에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출생은 나의 소관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부유한 가문에 태어나서 부를 대물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명문가정에 태어나서 부귀영화를 대물림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난한 환경에 태어나서 아무리 힘든 경기를 해도 가난을 대물림 하면서 힘든 인생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 태어나는 시간은 인생을 출발하는 시작의 시간입니다. 올림픽 육상경기에서 훌륭한 육상선수라도 출발이 좋지 않으면 메달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1000미터 경기를 하면서 200미터 300미터 앞서서 출발을 한다면 경기는 하나 마다일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인생의 경기를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심각한 불공정한 가운데 인생을 시작하고 출발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에게는 하나님께서 희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50년째가 돌아오면 실패해서 잃어 버렸던 땅도 빗도 돌려주고 탕감해주도록 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50년에 한번은 다시 세상을 공정하게 출발하도록 제도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고 명문가정에 태어나서 부를 누리고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은 더욱 잘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힘이 없는 사람들을 섬길 줄 알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식인들은 배움이 부족한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군림하지 말고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이 있다고 약한 자를 무시하고 억누르고 착취하고 군림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출생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때에 어느 환경에 태어났던지 불평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좋은 가문에 태어나서 부를 대물림하려고 욕심 부리지 말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한 마음을 배워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때는 죽음의 때입니다.

9:27~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 가족들의 축복 속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영원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한번은 가야할 존재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시계의 태엽은 단 한번 감깁니다. 그리고 그 시계 바늘이 어디서 멈출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더 빨리 설 수도 있고, 한 시간 더 늦게 설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계의 태엽이 다 풀어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재산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건강을 잃는 것은 그보다 더 슬픈 일입니다. 더욱 큰 것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혼을 잃는 것은 이 모든 것 보다 더 슬픈 일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한번 잃고 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짧은 이 순간에도 매일 매시간 마다 지구상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죽음에는 3 가지가 있습니다.

기력이 다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25:8~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장수의 복 건강의 복을 누리다가 기력이 다하여 마지막에 죽는 죽음입니다.

세상에서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교통사고로 죽는 죽음도 있고 사건사고로 억울하게 맞이하는 죽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력이 다하도록 살다가 평안하게 맞이하는 죽음은 복 있는 죽음입니다.

 

영광의 죽음입니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

 

선한 일을 위하여 의로운 일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인생의 경기를 마치고 맞이하는 죽음은 모두가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형벌의 죽음입니다.

세상에서 잘못 살았기에 벌을 받아 죽는 죽음입니다.

죄를 짓고 죄 값으로 죽는 죽음이 형벌의 죽음이라 한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공기와 물과 햇빛을 받으면서 한평생 죄를 짓고 살다가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할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형벌의 죽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출생도 중요하지만 죽음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살아왔더라도 형벌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인생의 실패뿐만 아니라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본문 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 생각은 참으로 무서운 생각입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 참으로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장차 두 가지 엄숙한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는 죽음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엄숙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장소에서는 말도 줄이고 웃음도 줄입니다. 그만큼 죽음은 엄숙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 시간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도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 할자는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함부로 살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그 시간을 억지로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의 개념 속에는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 따위는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장차 있을 심판이나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 따위는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들은 두려움 없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은 죽음 앞에 서면 엄숙해집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격언에는 사탄도 중병에 걸리면 천사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 사형수들도 사형당할 시간이 다가오면 모두 천사가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겸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는심판의 때입니다.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은 피할자가 없습니다. 인간의 때가 무너지면 세상의 자랑은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면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양과 염소가 갈라지듯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되듯 반드시 마지막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아무도 피하거나 막을 자가 없습니다.

그날에는 영생과 영벌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제 다윗은 간절하게 권면하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14: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은 불신앙에 빠진 백성들을 돌이키시어 구원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은 회복이고 구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상의 타락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에게는 때가 있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죽을 때가 있고 심판의 때가 반드시 있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는 이 세상의 회복이고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구속의 절차를 밟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서 이 세상을 회복하셨습니다.

 

오늘 이 세상의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죄에서 심판에서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려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교회 안에서도 무신론자들이 발생하게 되고 안티 기독교인들이 발생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심하면 어느 때인가는 내가 무신론자들보다 더 돌이킬 수 없는 강팍한 무신론자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하나님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이 진정으로 회복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어쩡정한 신자가 되고 어쩡정한 집사 권사가 되면 나도 안다고 하며 교만하고 고집불통이 되어 더욱 돌이킬 수 없는 교회 안에 불신자로 전락하여 기독교 안티세력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집중해서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들은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항상 깨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상급과 면류관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