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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입니다.

박용래 (대전광역노회,대전장로교회,원로목사) 2015-03-08 (일) 18:49 9년전 2934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입니다.

1:20-21                       2015.03.08. 박용래 목사

이 세상에서의 만남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첫째, 생선 같은 만남입니다.

생선 같은 만남이란, 생선은 만지면 만질수록 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오래 만나면 만날수록 더욱 아픔과 상처만 남기고 나쁜 영향만 끼치는 잘못된 만남을 말합니다.


 둘째, 꽃과 같은 만남입니다.

꽃과 같은 만남이란, 만나면 향기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금세 시드는 만남을 말합니다. 처음 만남은 향기롭고 좋은데 금새 시들어 오래가지 못하는 만남을 말합니다.

셋째,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손수건 같은 만남이란,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힘들고 어려울 때는 땀도 닦아주고 기쁠 때에는 바로 내 기쁨인 양 축하해주고 함께해주는 만남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만남이란, 바로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어야 합니다. 아멘.

성도간의 만남도 부부간의 만남도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도 생선같은 만남, 꽃과 같은 만남이 아니라,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요즈음 인터넷에 보고 싶은 사람 시리즈가 있습니다.

: 월래 보고 싶고     : 화가 나도 보고 싶고 : 수없이 보고 싶고 : 목 빠지게 보고 싶고 : 금새 보고 싶고     : 토라져도 보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으로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빌립보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을 보면 바울은 두 가지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소극적인 것으로서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좀 더 적극적인 표현으로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 받는 사람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사도의 거룩한 꿈이었습니다.

이 바울의 꿈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보고 싶어 하는 이 시대의 신자는 누구일까? 어떤 목사, 어떤 장로, 어떤 집사, 어떤 성도를 주님은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시는가?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있어야할 사람이 있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14:21~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차라리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 바로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에게 차라리 너는 이 땅에 나지 아니했으면 좋았을 뻔 했다. 차라리 너는 만나지 아니했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사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아멘 

또 하나는 이 땅에 있으나마나한 사람입니다. 무해 무덕한 사람을 말합니다. 아마도 의심 많았던 도마도 여기에 속하지 아니할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3종류의 인생을 비유로 말을 했습니다.

거미와 같은 인생, 개미와 같은 인생, 꿀벌과 같은 인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거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거미는 거미줄을 쳐놓고 약한 곤충들이 걸리기만을 숨어서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약한 곤충이 거미줄에 걸리기만 하면 잽싸게 대들어서 꼼짝을 못하게 거미줄로 동동 묶어 놓아서 먹이로 삼고 있습니다.

거미는 언제나 약한 곤충을 해치며 삽니다. 거미 같은 사람은 강한 자에게는 복종하고 약한 자에게는 군림을 하는 고약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남을 함정에 빠트리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을 말합니다 

개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개미는 참 부지런합니다. 그러나 개미는 오직 자기만을 위한 부지런함입니다.

개미 같은 사람은 남에게 큰 해를 끼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를 못합니다. 세상을 있으나 마나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인생을 마친다면 부끄럽게 살아온 사람이 될 것입니다 

꿀벌 같은 사람입니다.
꿀벌은 부지런히 일을 해서 꿀을 모아서 다른 사람에게 제공을 합니다.

꿀벌 같은 사람은 자기 유익도 구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을 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고 은혜를 끼치고 유익을 주는 성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거미와 같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개미와 같은 인생을 살아도 부끄러움 뿐입니다. 꿀벌같은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꿀벌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우리들은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사람, 이 세상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꼭 필요한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기대와 소망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1) 부끄럽지 아니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의 소원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인간으로서 너무 부끄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보험금 때문에 남편과 시어머니를 살해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딸까지도 살인하려고 했던 여자가 검거되었습니다. 그런 보험금으로 사치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탈을 쓴 것이 부끄럼입니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시인 윤동주 선생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노래한 것 처 럼 사도바울이 간절한 소망처럼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끄럽다는 감정은 두 가지 경우에 생기게 됩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을 때입니다.
무엇인가 잘 못을 저질러서 양심에 거리낌이 있을 때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감정이 생깁니다. 아무도 몰라도 자기의 양심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죄를 지은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끄럽지 않은 삶이란 깨끗하고 거룩한 생활입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바울 사도는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되기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면 됩니까?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치 못했을 때입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부끄러운 감정이 생깁니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못하면 자식들 앞에서도 부끄러운 법입니다. 자식이 자식노릇을 못하면 부모에게 부끄럽고 죄송한 것입니다. 성도로서 성도답지 못하게 살아갈 때 이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무엇보다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해져서 부모노릇 자식노릇 사람노릇 성도노릇 못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 안에서도 직분자로서 전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뻔뻔 충만한 신자들이 있는데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가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사명을 깨닫지도 못하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적어도 사명의 인식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대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가치관의 변화가 없이 사명감 없이 살아간다면 금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살려고 힘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명을 감당함으로 부끄럽지 아니한 삶을 살기를 힘썼습니다.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을 쓴 칼 힐티는 말하기를

사명을 깨닫는 날이 인생 최고의 날 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는 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사명을 확인하는 날은 축복의 날 중의 가장 복된 날이며 영광의 날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이 목적하는 대로 살아가는 생활을 해야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명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사명이 있습니다. 화초는 아름다운 꽃을 통해, 새들은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과일은 아름다운 맛으로, 짐승들은 고기와 가죽과 털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특별한 목적과 사명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은 3번 태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육신의 태어남과 영적 중생, 그리고 사명을 발견하는 것이 세 번째 태어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명을 발견할 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발견한 사람들에게 영력, 지력, 체력, 경제력을 주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도와주십니다.

마이크가 고장나면 고쳐서 쓰듯이, 하나님은 사명 자가 병 들면 고쳐서, 물질이 필요하면 물질을 채워 주셔서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 자는 축복입니다.

바울은 사명을 발견함으로 새로운 차원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20:24)이라고 고백합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진 것이 많으면 그 사람은 사명자라는 것입니다.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지식,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한 재물, 남보다 더 좋은 건강, 남보다 더 많은 권력, 남보다 더 많은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교만하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 가지고 군림하면 썩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흘러 보내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새것으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섬김의 사명자로 살아가시므로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남들보다 더 많은 아픔과 고통을 겪으면서 산 사람은 사명자입니다.

옛말에 과부가 과부 사정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고파 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병들어 본 사람이 병든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까?

자식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사업의 실패로 경제적인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로 할 수 있을까?

자신도 실패를 통하여 아파본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위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면서 왜 살아야 하는가? 고민하며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다면 오히려 당신처럼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사명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것으로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 마음속에 거룩한 부담감이 있는 사람은 사명자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면 마음에 안쓰러운 마음이 있는 사람은 구제의 사명자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사랑스럽고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불타는 사람은 교사의 사명자입니다. 불신자를 바라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고 복음을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 불타는 사람은 전도의 사명자입니다.

외국 여행을 다녀온 후 그 나라, 그 민족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있다면 선교사의 사명이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 교회와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생각할 때마다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거룩한 부담이 있다면 중보기도의 사명자입니다.

 

우리 교회에 참 멋진 집사님이 있어 목회에 행복함을 느낍니다.

사랑과 나눔의 삶을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대학시절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우유배달을 해야 했고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집이 경매로 넘어가기도 하였고. 결혼해서 얼마 후 집안에 보증을 잘못서서큰 아이 돌 때는 집에 노란딱지가 붙어 집을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월세에서 전세로 옮겨 다닌 끝에 내 집을 마련한 것도 불과 몇 년 전에 심방하여 입주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시련을 겪었기에 한 푼 이라도 더 모으고 더 불려야 할 것 같지만 그런데 집사님은 어려운 이웃을 보면 자꾸 눈에 밟혀,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땀과 노력만으로 천신만고 끝에 사업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지난 2002년부터 집사님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너 소사이어티클럽 가입하여 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고 작년 년 말에도 2000 만원을 행복원이란 장애원 시설에 기부하고 우리교회 찬양대의 몇 가정의 자녀들과 함께 사랑의 송년 음악회를 만들어서 지적 장애인들과 한 가족처럼 노래하고 춤추는 감격스러운 음악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장애인들이 그 음악회를 통하여 노래하고 춤추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은 바로 저런 것이구나!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우리교회 60년사에 한번의 특별헌금도 없이 500평의 교육관을 건축한 것은 아마도 한국 교회에 찾아보기 힘들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님은 목사님을 만나자고 해서 교회에레베이터 설치 헌금으로 6000만원을 해주셨습니다.

이분이 굉장히 부자인줄 아시는 데 문을 제작하는 공장에 가보면 아직도 내 땅도 아닌 시의 땅을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고 아직도 번듯한 공장 건물이 지어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도 임시 건물처럼 문짝들로 꾸며진 공장입니다.

물질로만이 아니라 손수 연탄 배달에 참여하며 몸으로도 봉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도 자신이 물질적인 후원을 하고 우리 교회이름으로 연탄나눔 봉사하기를 자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결혼해서 우리교회 등록을 해서 지난 30년 가까이 집사님의 어려웠던 시련을 극복했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노선호 집사는 부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의 부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내가 소유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욕심을 다 채우고 나서 이웃을 사랑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에 이런 2의 제3의 노선호 집사가 많이 나오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행복해 지고 우리의 사회와 나라에 행복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분명한 삶의 목적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부르셨는지를 알았습니다. 왜 내가 살아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삶의 목적도, 사명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사명자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도록 충성을 다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뭐 그렇게 유별나고 드러나게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는가?

조용하게 내 자리나 지키면 되지.^^ 여러분 이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알고 있다면 그 럭 저 럭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명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명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유태인들은 길거리에 청소부라 하더라도 봉급만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나라의 길거리를 청결하게 한다는 긍지와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일에 기쁨이 있습니다. 행복함이 있습니다. 사명자들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부끄럽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성도들을 주님은 만나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2)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사람입니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

바울의 또 한 가지 소원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곧 그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인생을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주님께 봉사하고 헌신하는 단계가 설사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사명자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명자였습니다.

죽음도 아까와 하지 아니하고 죽을 각오로 사명을 감당함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명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성가 (나주님 기쁨 되기 원합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처럼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힘쓰는 사람과 그리스도가 존 귀히 여김을 받기 위해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러한 성도를 찾고 계십니다.

주님이 보고 싶어 하시고 주님께서 기다리시는 이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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