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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르빈 연길 용정 북간도에 다녀와서

이상호 (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5-06-11 (목) 20:29 8년전 7262  
중국 하르빈 연길 용정 북간도에 다녀와서
 
지난 6. 1 - 5일까지 중국 하르빈 - 백두산 연길 용정 명동촌에 다녀왔다. 기장 총회 역사위원회가 규암 김약연 기념사업회와 협력하여 하르빈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북간도 명동촌을 중심으로 역사 탐방을 다녀왔다. 한국기독교 초기 역사 속에서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중요한 기지가 되어온 북간도 지역을 탐방하면서 교단의 초기 역사를 재정립하고 통일 이후 선교 역사를 준비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61일 오전 7:4 공주역에서 용산행 ktx에 올랐다. 넉넉할 줄 알았는데 용산에서 서울역 - 인천공항가는 공항철도를 바꿔타고 도착하니 약속시간 10시였다. 순조롭게 일행들을 만나 12;30 발 비행기에 올라 1시간 50분 비행하니 하르빈 공항에 도착한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나가보니 어제밤 태풍과 비가와서 나무들이 부러지고 야단법석이었다.
 
먼저 하르빈에 대해 알아보자.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성도로, 쑹화 강[松花江]에 면해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러시아인들이 중둥[中東] 철도를 건설하면서 이 도시가 생겼다. 한때는 소련 밖의 도시 가운데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중국에서 10번째로 큰 도시로 둥베이 지방의 정치, 경제, 과학, 문화, 통신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971만 명, 면적은 53796이다. 특히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이 1909년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곳으로서 한국인에게는 익숙한 지명이다.
 
소피아 성당
1903년 중동철로가 개통되면서 제정 러시아의 보병사단이 하얼빈에 들어오게 되었고, 제정 러시아는 멀리 고향을 떠난 사병들의 군심을 달래기 위해 1907년 나무 구조로된 병사들을 위한 군 예배당으로 성소피아 성당을 건축하였다. 이후 1923927일 재건축을 위한 시공식을 열고 장장 9년간의 심혈을 기울인 공사로 화려하면서도 전아한 건축예술품 성소피아 성당이 재탄생하였다.
 
소피아 성당은 하얼빈시내에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으로 53.35m 높이에 전체면적이 721로 주변 극동지역에서는 최대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현재는 성당 내부에 하얼빈의 역사가 담긴 흑백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쑹화강과 중앙대가
이번에는 하르빈을 기름지게 하는 쑹화강을 둘러보고 홍수방지탑을 지나 중앙대가를 거닐다가 저녁을 먹고 하르빈역 인근 호텔에 투숙하므로 조금은 긴 하루를 마감한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2015. 6. 2() 화창한 아침이 밝아왔다. 중국이 1시간 늦는데다 새벽기도하던 몸시계가 일찍 일어나게 만든다. 호텔과 하르빈역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저 하르빈 역에 있는 안중근 의사기념관을 둘러보았다. 금방 날씨가 흐려져 비가 내린다. 이곳에서도 안의사의 항일운동을 높이 사서 다른 곳에 있던 기념관을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 옮겨다 놓았다. 19091026,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당초 의거 제1지점으로 지정되었던 곳은 채가구역이었다. 이또 히로부미가 하르빈으로 오기 위해 특별열차로 갈아탄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나 그러나 역무원에게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듣게 되자 안중근은 하얼빈역으로 가고 채가구역에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대기하고 있다가 러시아군에 체포되어 일본측에 넘겨졌다. 채가구역은 당시 그대로의 역모습을 가지고 있으나 기차가 정차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사의 현장이기에 가보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멀어서 가보지는 못했다.
 
일본 관동군 731부대 현장
731부대는 하얼빈 시에서 남으로 20km 떨어진 평방구(平房區)에 위치해 있다.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인체실험 등에 의한 세균병기 연구가 행해졌다. 일본은 전쟁에 패하자 731부대를 은닉하고자 건물을 파괴하였으나 남아았는 일부 건물이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다. 731부대는 동물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35종류의 생체실험을 하였다. 진열관에는 관련사진과 생체실험기구, 세균실험 장면, 희생된 유물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화장터와 남문 유적, 지하세균배양실, 실험쥐 사육장 유적, 종전 직전 소련의 침공으로 파괴되고 발전소 벽과 2개의 굴뚝, 731부대 전용 철도선 등이 남아있다. 비도 오지만 공사중이라 내부는 보지 못했다.
 
동북열사기념관
하얼빈의 난강구(南岗区)에 자리하고 있다. 동북지역에서 활동했던 중국과 한국의 항일 독립지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관이다. 1931년 서양 고전주의 풍으로 건축되었다. 1933년 일본은 하얼빈 경찰청 건물로 사용하였다. 일본은 이곳에 반일 중국인을 가두고 고문을 가했으며 항일열사들이 형장으로 끌려가 처형당하였다.
 
해방 후 19481010일에 전시관을 개관하였다. 전시관에는 조일만 열사, 허형식, 동북항일연합군 총사령관 양정우 장군과 조상지 열사의 활약상, 용정중학교 출신자, 한복을 차려입은 조선 열사들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지하 전시실은 일본인의 만행을 폭로한 범죄 전시실로 고문장면과 화학실험전, 세균전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관람료는 무료였다.
 
하얼빈 동청철도국,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하얼빈시 남강구 흥군가 60호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은 당초 러시아가 동청철도국 건물로 지은 것이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관할하면서 이곳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 하얼빈사무소를 두었다. 19362, 일본 하얼빈총영사관을 이곳으로 이사하여 패전하기까지 사용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중국 하얼빈 철도공안국이 자리하고 있다. 비가 와서 정문에서 기념사진만 찍었다.
 
저녁식사 후에 백두산을 향해 안도역행 열차에 올랐다. 생에 처음 무려 11시간동안 4인실에서 잠을 자며 가는 열차여행이었다.(차비 178, 35,000원 숙박포함이다.)
 
백두산, 장백폭포
2015. 6. 3() 새벽에 안도에 도착했다. 연길에서 온 차를 타고 식사장소로 이동하여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백두산을 향했다. 날씨가 오락가락 한다. 백두산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다가 우박이 내리는 등 불규칙하다. 더구나 전날 내린 눈으로 천지를 보는 건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희망을 갖고 먼저 장백폭포로 올라갔다. 맹추위에 우박세례까지 받았다.
 
결국 천지는 오르지 못하고 대신 가이드가 준비한(?) 소천지와 작은 폭포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산하였다. 일행은 강원도식당에서 중식 후 연길을 향하였다. 가면서 역사유적지 탐방은 이어졌다.
 
대종교 삼종사묘역
화룡시 인근에는 청호천이라는 한적한 마을이 나타난다. 이곳 청호천에 1911년 대종교 지사가 설치된 후 1914년에 총본사를 이전하였다. 청파호 부근 언덕을 오르면 삼종사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삼종사묘역에는 대종교의 삼종사인 나철, 서일, 김교헌 3분의 묘소가 있는데반일지사무덤이라는 안내문이 세워져있었다. 1909년 기존의 단군 신앙을 대종교로 체계화시킨 이래 대종교는 만주의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했던 독립군들의 정신적 중추가 되어주었다.
 
청산리 전투현장 어랑촌 전적지
이번에는 어랑촌을 찾았다. 청산리전투 현장의 하나다. 청산리대첩은
19201021일 백운평 전투는 이범석 휘하 3백여명의 북로군정서 병사들이 직소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 보병 73연대 소속 선발대 2백여명 거의 전멸하였다. 그 외 천수동, 완루구전투, 어랑촌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연길도착, 북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므로 3일째 여행을 마쳤다.
 
명동촌과 용정순례
4일 드디어 이번 역사탐방의 본론인 용정과 명동촌을 둘러본다. 먼저 명동촌과 장재터(김약연, 문익환 목사 생가지)를 둘러본 후 명동촌을 둘러보았다. 중국 속에 한민족 역사탑방은 민족수난 속에서 항일 민족독립운동의 중요한 기지가 되어 한국 근대 역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는 북간도지역의 메카인 명동촌의 명동교회, 명동학교 그 현장과 안중근의사 거사직전 명동촌에서 거주하며 사격훈련을 하였던 문안골, 북간도의 1920년이후 엔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용정, 그리고 봉오동, 청산리전적지 등을 답사하며 기장과 한신대학의 뿌리를 찾고자 하였다.
 
장공 김재준목사는 19373월 규임 김약연목사의 초빙으로 용정 은진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하여 19404월 북간도를 떠날 때까지 규암 김약연을 가까이 모셨다. 한인들은 동만의 대통령이라는 뜻으로 한뀌릉이라고 불리웠다고 장공선생은 회고하셨다. 규암은 기독교운동, 독립운동, 교육운동의 한 궤로 파악하였다.
 
명동촌은 민족과 신앙, 이 한가지 교훈으로 뭉쳤고 자녀들도 예수교훈과 독립정신으로 양육시켰다. 민족시인 윤동주, 송몽규, 민족예술의 나운규, 통일신학의 문재린, 문익환, 민중신학의 안병무, 그리고 강원룡 등이 나타난 것도 사람들이 한가지 교훈으로 먹고 자라게 했기 때문이었다. 명동이란 동쪽을 밝힌다. 빛을 낸다는 뜻이니 독립운동, 그것이 이 명동촌이 내건 문패였다. 아쉬운 것은 명동교회가 윤동주 시인 기념관이 되어 있었다. 임시라지만 정문이 윤동주 생가로 되어 있다.
 
그래도 마을 이장을 통해 잘 복원되어진 명동학교에 들러 명동촌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최근에 지어지고 꾸며져 보기는 좋았는데 군데군데 틀린 것이 있어서 후손들이 지적해 준다. 송몽규 고가도 복원되어 둘러보았다. 그리고 용정으로 나와 잉어와 고기를 넣은 영양탕으로 걸진 점심을 먹었다.
 
중국 북간도 역사탐방도 끝나간다. 4일 오후에는 용정을 둘러보고 두만강을 따라 도문에 다녀왔다. 용정龍井은 연변의 중심도시인 연길에서 서남쪽으로 40리 남짓한 지점에 위치한 도시이다. 북한에서 회령을 지나 두만강을 넘고 오랑캐령을 지나고 그곳에서 다시 70리 북상하면 용정에 도달하게 된다.
 
용두레우물
용정 지명의 기원이 된 샘이 있는 우물. 1879년 전후 장인석, 박인언 두 농가가 육도구 부근에 정착했을 때 처음 이 우물터를 발견하였다. 음료수를 확보하고자 부근 한족 농민들과 함께 우물터를 잘 정비하고 용두레를 설치하여 깨끗한 물을 마시게 되었다. 1934년 이 지명기원의 우물을 기념하기 위해 주위에 돌기둥을 세우고용정지명기원의 우물이라고 써 있다.
 
간도 일본총영사관
일본은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1907년에 간도 임시파출소를 설치한 바 있다. 이후 청국과 간도협약을 체결한 일본은 190912일 간도 총영사관을 용정에 설치하였다. 간도 임시파출소 터는 용정고급중학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간도 일본총영사관에서는 연길, 화룡, 훈춘, 왕청, 안도현 등 5개현을 관할하였다. 19221127일 화재로 총영사관 건물이 전소하자 3년에 걸쳐 재건하였다. 현재 본관, 영사관저와 수위실 등 3개 건물이 잔존하고 본관 건물은 현재 용정시 인민정부 청사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더기(동산병원, 제창병원, 은진학교, 명신여학교)
이어서 영국더기를 둘러보았다. 영국더기는 영국과 더기가 합쳐진 말이다. 더기는 고원의 평평한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용정 안에 영국더기는 영국조계지 안에 조성되었다. 캐나다 선교사들이 이곳에 선교본부와 학교(은진학교, 명신여학교), 그리고 병원(동산병원, 제창병원)을 설립하였다, 간도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의 피신처였으며 정보를 주고받는 연락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대성중학교·윤동주 시비
그리고 대성중학교를 찾았다. 1921711일 대성유교의 공교회(孔敎會)에서 세운 학교였다. 그런데 학생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공자의 유학사상을 반대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교육과 종교의 분리를 요구하며 동맹휴학하여 공교회 관리에서 벗어났다. 1926년 가을부터 연길의 대동중학교(大東中學校)와 연합하여 1111일에 용정 옛터에 대성중학교를 복교하였다. 해방후 대성중학교는 용정 5개소의 중학교와 합쳐 길림성립 용정제일중학교로 되었다. 구관은 현제 역사전시관으로 사용하며 윤동주 시비가 먼저 보인다. 역사전시관이 잘 되어 있고 해설사가 친절하게 해설도 해 준다.
 
윤동주는 19437월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3년형을 선거받고 후쿠오까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두 사람은 감옥에서 정체모를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216일에, 송몽규는 310일에 옥사하였다. 윤동주의 유해는 용정 동산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여러차례 선정된 바 있다.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동산교회 묘지에 가보지 못함은 아쉬움이다. 그곳에는 공주교회에 시무했던 현석칠 목사의 묘소도 있다고 한다.
 
해란강과 일송정
'일송정'은 비암산(琵岩山) 정상에 있다. 원래 정자모양의 한그루 소나무을 일컬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민족의 장래와 독립운동을 의견을 나누는 장소로 한국인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이곳이 민족의 성당이 되자 일제는 1938년 이곳의 소나무를 고사시켰다. 1991년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를 지었다. 이곳 일송정에서 내려다보면 용정시와 시가지를 흐르는 해란강을 볼 수 있다.
 
평강벌을 흐르는 강은 '해란강'으로 해란강은 두만강의 지류이다. 해란강은 서쪽 화룡 쪽에서 동쪽으로 평강벌을 가로질러 흐르다가 비암산에 막히면 다시 비암산을 반시계 방향으로 감싸고 돌아 용정으로 흐른다.
 
용정을 지난 해란강은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연길을 지나 흘러 온 부르하퉁하(해란강의 지류)와 합수하고 다시 시계 방향으로 구부러져 흘러 도문에서 두만강에 합쳐진다.
 
일행은 이제 도문을 향하여 갔다. 중간에 안중근 의사가 사격연습을 했다는 문암골에서 사진도 찍고 설명도 들었다. 문암골은 1908년 안중근 의사가 사격 연습하기 위해 찾았던 곳이다. 1907년 명동촌에서 석달간 머물렀던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을 감행하다 회령에서 참패한 뒤 이곳에 홀로 찾아와 절치부심하며 권총 사격 연습을 하였다. 봉화리에 올라 봉오동 전적지들을 둘러보며 도문 국경지대와 두만강을 둘러 본 후 돌아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6. 5() 마지막 날에는 비가 내렸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을 들렀다. 총장이 자리에 없어 부총장의 영접을 받았다. 영상소개와 차로 한바퀴 돌았다. 모든 교직원들이 훌륭한 선교사였다. 시간관계로 공항근처에 있는 연길박물관엔 들어가보지 못하고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은 더 순조로워 비행시간도 짧고 입국절차도 쉬워서 3분 차로 하루 두 번 있는 공주행 ktx를 탈 수 있어서 금방 집에 왔다.
 
(no)쇼핑으로 대신 잘 먹으며 오직 역사탐방에 주력하였다. 아쉬운 것은 백두산에 처음 간 분들이 있었는데 천지를 보지 못했다. 모임을 이끌어주신 김약연 목사 기념사업회 김재홍 대표(증손)와 문익환 목사 따님 문영금 선생과 동행해 주신 분들께 감사하며 글을 맺는다.
 
 
 
 
 

백낙은 2015-06-12 (금) 20:42 8년전
양지 이상호 목사님. 멋진 여행 하셨군요.
여행기록도 참 좋습니다.
두어번 그 코스를 다녀 왔습니다만 다시 보니 새롭습니다.
사진 솜씨도 보통이 아니시구요. 귀한 자료 감사드리오며 평안을 기원합니다.
주소
이상호 2015-06-13 (토) 10:20 8년전
예 목사님, 저도 단동으로, 또 한번은 장춘으로 가 본 곳인데
이번에는 하르빈으로 들어갔습니다.
총회 사업이라 다녀왔는데 새로운 곳이 많았습니다.
주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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