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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이스라엘 열조의 고난과 신앙이해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5-07-03 (금) 08:10 8년전 3539  
  이스라엘 열조의 고난과 신앙이해 시편 22.doc (124.5K), Down : 14, 2015-07-03 08:10:25

이스라엘 열조의 고난과 신앙이해                  시편22: 1- 21, 28

                                                                        2015-07-05, 12

 1. 시작의 말: 시편 22편의 실존적 물음

시인은 자기 열조의 위대한 신앙의 역사를 말하며, 이스라엘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시인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자입니다(22:28). 본문에 담겨있는 고통과 절망의 언어는 예수님의 고통을 표현하기에 적합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시인 자신의 실존적 문제로 그의 삶이 당면한 현재의 수난으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삶의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실존의 문제 속에 과거의 신앙용사였던 열조들의 경험을 자기 자신 속에서도 살려보고 싶어합니다.

히브리서 11장 기자가 역시 과거 신앙 위인들을 열거하였는데 그것은 다른 신도들을 권면하고 교훈하기 위하여 과거 신앙위인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인이 우리 열조들을 말함은 현재 견딜 수 없는 궁지에 빠지고 있는 자기자신 전체를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심경에서, 마치 화산 폭발의 세력이 땅속에 그대로 있지 못하고 위로 튀어나오듯이 시인 자신의 삶의 괴로운 현실이, 그의 생의 근거가, 존재의 밑바닥이 하나님 앞에 송두리째 폭발해 나오는 심경에서 이 말을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괴로운 현실은 이 시인이 그의 시 첫머리에 폭발시키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2:1). 이 구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시를 그의 고난의 때에 외우셨기 때문에 이 시는 메시야적 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6월의 민족수난을 비롯한 뜻있는 달을 보내면서, 이스라엘 열조의 고난과 신앙이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2. 종교적 사관 이해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한국사의 의미를 저자의 신앙적 관점에서 보려고 시도한 대표적인 저작입니다. 저자의 종교적 사관에는 신앙이 민족의식을 비판하며 올바른 방향제시의 길을 열어주며, 또한 민족의식이 신앙을 반성시켜주며, 신앙의 참 의미와 가치를 찾게 합니다.

함석헌의 종교적인 역사관은 다음 다섯 가지 점에서 역사를 이해합니다. 1) 성서는 역사의 근본을 하나님께 구한다. 2)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3) 역사는 종말이 있다. 4) 인간역사는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다. 5) 인간은 도덕적인 책임존재이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2012, 한길사, 49-64 참조)

이러한 종교적 역사관에서 한국역사는 수난의 역사로 보고, 저자는 이 사실을 몹시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 고난이야말로 한국인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깨닫고, 한국인이 할 일은 아직도 남았기에 원기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고난에는 하늘의 뜻이 있고 사람들이 배울 교훈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고난은 죄를 씻는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 인도한다. 한국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인 것은 역사를 낳는 것이 아가페이기 때문이다.(함석헌, 같은 책, 51)   

함석헌 선생의 역사관은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로 표시했습니다. 한국역사가 비록 수난의 역사일지라도 그 수난을 위에서 주신 하나님의 영광스런 선물로 받을 때, 한국의 민족의식은 세계사상에 한 기적을 낳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점에서 바로 이스라엘 역사가들이 가진 역사이해와 상통하는 것입니다.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의 길은, 이스라엘민족이 당한 그 수난의 역사에서 부단히 역사의 주인이시고 인도 자이신 하나님과 대화하고 신앙을 고백했던 그 역사를 한국인의 역사로 받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열조들이 민족사의 범위와 한계를 벗어나서 인류의 구원사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땅에 사로잡혀간 수난의 역사 순간에 그들의 역사가 이방인의 빛이 되고(이사야 42:6), 과거 인류역사상 볼 수 없었던 새 일을 창조하며(이사야 42:9), 만민의 고통을 대신하고, 만민의 슬픔을 대신하는 고난의 종으로 영광을 누릴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이사야53:).

 3. 시편 22편의 삶의 정황이해

이 시편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은 죽음의 경지에 이른 한 수난자의 부르짖음입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과 시인 사이에 맺어진 강하고 친밀한 관계성이 울부짖는 단장의 기도의 말 속에 나타납니다. 1) 시인은 내 하나님이여(my God)를 연달아 부릅니다. 우리는 이 시인의 부르짖음에서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는 강한 의뢰심이요, 둘은 이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분명 들어 주시리라는 확신입니다. 이 말은 비록 탄식과 고난의 말이지만, 그것은 실상 하나님과 자기자신이 가장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냄입니다. 시인 자기 생명이 위험 순간에 직면해 있어도 하나님은 자기를 알고 지키고 돌보고 건져 줄 것을 믿는 마음입니다. 인간 전체 삶의 방향이며 살아서 인간 삶과 역사를 간섭하는 하나님 앞에 단독 자로서 실존의 토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의심과 항거의 형태로 표현된 강한 신앙심입니다.

이 시인의 말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비난을 표시함이 아니고 그에게 숨어계시는 하나님께 가슴에 사무치는 수수께끼 같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놀람으로 깨닫는 심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난자의 독백(monologue)이 아니고 수난 자와 하나님과의 진정한 대화(dialogue)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그의 호소를 듣지 않고 침묵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과 생명적인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시인의 이러한 강한 의지신앙이 이 시 전체에 밝히 나타납니다.

2) 우리가 중점을 두고 시편 22:4-5절에 열조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시인은 열조의 의지신앙의 전통을 받아 온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 의지심이 특히 강조되었다는 것은 4 5절에 의뢰하다 라는 동사가 세 번 사용되어 있습니다. 이 시인은 그의 신앙의 기조를 의뢰심에 두고 있습니다.

또한 시인은 이 4, 5절에서 1, 2절과 6, 7절에 강하게 나타나는 제1인칭 주어 I 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내 신음하는 소리 그리고 6절에 나는 벌레요, 7절에, 나를 보는 자 , 나를, 나의 등 제1인칭을 연달아 말함으로써 시인 자신의 사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4, 5절에서는 우리 열조, 저희가, 저희를 등으로 제3인칭 복수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시인 자신은 위대한 신앙 유산과 전통이 면면하게 흐르고 있는 이스라엘의 민족공동체 속에 자기자신을 조화시키고 있습니다. 시인 자신이 신앙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이미 과거에 보여준 열조들의 구원 사 속에 현재 자신이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감당하고 있음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열조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사의 전승 속에는 나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고, 또 반대로 우리의 신앙이 나의 신앙이 되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시인은 과거의 구원사의 인물들이나 현재의 자신이 모두 구원하는 하나님께 대해 절대적 신뢰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정준, <구약신학의 이해> 열조의 신앙에 대한 신학적 이해 1973, 한신대 출판부, 437-449 참조)

 4. 이스라엘 열조의 의지신앙과 구원 사 이해

열조들의 신뢰의 믿음- 의지신앙- 에다 중점을 두고 생각할 때, 출애굽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앞에 놓고, 추격 병들의 창검을 보고 있었을 때, 그 순간은 곧 절망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공포에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권고한 말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고 솔직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J문서, 14:13-14).

여기 의지신앙이란 것이 어떤 것임을 보여줍니다. 두려워 말아야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을 보아야 하고, 인간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이고,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는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는 힘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여기서 우리열조를 말한 것은 역사와 신앙과의 관계를 보는 그의 사관입니다. 동시에 그의 역사관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뢰의 신앙에서 보려고 함을 보여 줍니다. 과거의 역사를 그는 현재 자기 삶 속에 현재화시키고 있습니다. 열조의 신앙을 현재 자기의 신앙으로 하여, 현재의 위기를 극복합니다. 오늘 여기(hear and today)란 실존의 문제를 과거 열조가 가졌던 신앙- 의지신앙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열조의 신앙은 과거의 지나가버린 일이 아니고 시인의 오늘, 이 순간의 문제를 해결 짓는 원동력으로 삼은 것입니다.

의지신앙과 국가적, 개인적, 위기가 결부된 가장 적절한 예는, 주전 701년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큰 군대로 포위했을 때입니다. 이 국란을 당한 히스기야 왕은 히브리 신앙역사 중 가장 훌륭한 의지신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가 당면한 국가적 위기와 의지신앙은 구약기사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기사입니다. 이 사실은 열왕기하 18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왕하18:5). 히스기야 왕이 산헤립의 대군의 포위를 당한 절망적인 상태에서, 유명한 웅변가 랍사게의 항복원고를 받아 들이지 아니 했을 때, 랍사게는 히스기야의 강점인 그의 의지신앙을 비난공격하고 있습니다. 랍사게가 유다 군대의 통솔력이 약하다거나, 그들의 무기가 위력이 없다거나, 그들의 수도사정과 양곡의 상태가 어렵다는 것으로 조롱하지 아니하고, 오직 히스기야가 가진 의지신앙을 비판 공격하고 있습니다.

랍사게가 조롱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 사실이 나타납니다.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 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왕하18:30). 여기 나타난 랍사게의 공격초점은, 오직 히스기야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고 있다는 신앙에 대한 것입니다. 랍사게는 유창한 히브리어로, 예루살렘 성밖에 진을 치고 거기에서 왕과 모든 장군들과 조사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 함을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와 절망의 날에 히스기야가 가진 신앙은 의지신앙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어떤 정치적 군사적 위기에서라도 나라와 겨레의 생명을 보호하고 구원하는 일은 여호와를 믿고 의지한다는 결의였습니다. 이 의지신앙은 역사이념- 역사관의 기본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학자 김정준박사는 이스라엘 열조들의 의지신앙을 대략 다음 몇 가지 사실로 요약해 줍니다. 1) 이 의지신앙에서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비배하고 계신 것을 믿은 증거를 보며, 2)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5경 자료의 요지로 하고 있으며,(7:1절 이하; 12:1절 이하; 15:1-6 ) 3) 야훼를 의지하느냐, 다른 무엇을 의지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측량했으며, 4) 모든 사정에서 특히 절망적인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게 했고, 5) 이 의지신앙이 개인이나 그들 공동사회의 경건의 최고절정으로 생각했습니다.(김정준, <구약신학의 이해> 449) 이렇게 이스라엘 신앙에 있어서 의지신앙이 가장 아름답고 힘찬 것이라 보면, 본 시편 22:4-5절을 의지신앙의 절정이라 하겠습니다.

 5. 하나님 백성의 사상 이해

이스라엘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백성의 사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흥하고 망해도 이 사상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와 같은 가장 큰 민족적 수난 속에서도 오히려 더 이 한나님의 백성 된 것을 자랑했고, 그들의 삶 전체를 그것이 아무리 포로민의 고난과 수치의 삶이었어도, 그 기본적인 민족의식을 밝히는 하나님의 백성 사상을 자랑했습니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37:1). 수난의 백성 중 한 시인은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137:4-6)라고 강경히 항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한 민족주의 사상을 노래한 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밑받침하고 있는 민족주의 사상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자각에 뿌리박고 있는 종교적 민족주의였습니다.

그들은 역사의 초기에서부터 즉, 시내 산 계약에서부터 이 자각을 했습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 너희는 내 백성(6:7), 이것이 이스라엘 계약사상의  특징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의 결과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하나님 야훼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야훼만 따르며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자기들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것은 법이며, 또 하나님은 은혜로 그들을 대하십니다. (장일선, <구약신학의 주제> 1990, 대한기독교서회, 시내 산 계약 158-161 참조)

특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누릴 최상의 축복은 율법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보호해 주심을 즐거워하는 일인데 이것이 구약경건의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의 사상이 구약성서를 일관하고 있어 그들의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개발해 갔습니다. 이 사상이 가장 강한 근거는 그들의 하나님 야훼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신이라는 사상에 있습니다.

 6. 한국인도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한국인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갖는 것은 온 인류의 역사와 세계의 주인 되는 하나님신앙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 한국민족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우리 역사를 새로 읽고 배우며 책임 있는 삶을 영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처럼, 역사의 주관 자이며 인도 자요 구원자인 하나님 신앙의 눈으로 한국의 과거의 역사를 정직히 보고 책임감을 가지며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 실현하고자 하는 정의, 평화, 사랑, 진리의 원리에서 어긋난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비극과 수난에 대한 해석을 결코 숙명론으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만유의 주 하나님의 법도에서 어긋난 정치와 생활 때문이었다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역사가 하나님의 공의의 원칙으로 보아서 부합 한가 그렇지 못 했는가 하는 종교적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 옛날,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로운 사람 10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성읍을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한 적이 있습니다(18:22-32). 그러나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었고 그 성읍들은 멸망당 했습니다(29:23). 오랜 역사가 흘러 마지막 왕조 때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신실한 사람 한 명만 찾아도 예루살렘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5:5). 모두가 사자, 이리, 표범(5:6), 즉 적군에 의해 멸망당 할 것임을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죄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역사에서도 이러한 성서적인 사상을 깊이 생각하고 거울과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역사 역시 하나님 앞에 죄악의 역사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7. 한국 그리스도인의 나아갈 방향                                                   

8.15해방을 우리는 기뻐하며 환호 하였습니다만, 국토와 민족의 분단이 시작되는 역사였으니, 또 넘어야 하는 민족의 과제를 떠 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분단은 우리의 뜻이 아니고 강대국에게 책임전가를 합니다만, 분단7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너무나 역사반성과 민족 앞에 부끄러움을 참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21세기 지구촌시대에 적합한 민족통일론을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사실 그 동안에 7.4공동성언,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상호의 입장을 명확히 천명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협의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 선언>이라는 중대한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남북관계는 얼어붙은 상황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우리는 눈을 돌려 주변 이웃나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 예로, 이념이 달라도 중국과 대만은 이미 실질적 통일을 누리고 있음을 봅니다. 현재 250만 대만인이 중국에서 사업도하고 가정도 이루어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북한이 중국처럼 개방하여 남북이 그렇게 살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글로벌시대는 영토의 통일보다는 사람의 통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만나고 나면, 서로 교류하면 국경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실 국경이 무너지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 예로 유럽연합(EU)이 그러합니다. 물론 그들에게 국경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유럽에서 국경은 그어놓은 하나의 선일 뿐입니다. 문제는 유럽연합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에서의 평화로운 삶입니다. 한반도 남북의 경계선도 이렇게 되어질 날이 멀지 않다 하겠습니다. 유럽연합에 비해서 남북관계는 전근대적 분단을 강제하고 있다는 현 상황이 다른 점입니다. 그럼에도 미래지향적으로 남북관계를 본다면, 대만과 중국의 관계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또는 동독 주민이 그러했던 것처럼 북한주민이 주도적으로 한국과의 평화 통일을 선택하게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분단은 의미상으로 분명히 고난에 해당됩니다. 남북관계 개선의 평화적인 삶의 방향은 부활에 해당되는 역사적 사건이고 또한 하나님의 뜻하시고 섭리하시는 이 민족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여름철에 주안에서 강건하시고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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