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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위에서 백조로 - 얀 후스의 종교개혁과 그 유산

김주한 (광주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5-07-11 (토) 11:07 8년전 6598  
거위에서 백조로
얀 후스의 종교개혁과 그 유산
 
김주한 교수(한신대 교목실장, 교회사학)
 
 
O Sancta Simplicitas!” (, 성스러운 단순함이여!)
 
이 외침은 얀 후스가 화형장에 도착하자 장작더미를 들고 자기를 향해 걸어오는 한 농부를 쳐다보며 던진 말로 전해져 내려온다.
 
후스는 누구인가?
 
   올해 76일은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순교당한지 600주년 되는 날이다. 후스는 1372년 보헤미아(현재 체코) 남부 후시네츠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매우 가난한 농부였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훗날 후스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콩 수프를 떠먹을 때 호밀 빵으로 만든 숟가락을 사용하였는데, 그 숟가락까지도 먹었다고 말할 정도로 극빈했던 당시 환경을 기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후스가 훗날 하나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드리곤 했다. 후스 또한 어린 시절 빨리 사제가 되어 좋은 집에 살며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였다. 나중에 후스는 성경을 접한 후 어린 시절 자신의 소망이 악한 욕망이었음을 고백하였다.
 
   후스는 사제가 되기 위해 프라하대학교(당시 보헤미아 지방의 왕 카렐 4세가 세운 대학, 카렐대학교로도 불림)에 입학하여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396년 인문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1404년에는 신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프라하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놀라운 자기변화의 경험을 하였다. 그는 체코의 종교개혁 운동의 선구자인 크롬메리쯔의 밀릭(Milic of Kromeriz, d. 1369)과 야노브의 매튜(Matthew of Janov, 1355~1393)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2세기에 출현한 왈도파 운동으로부터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누구보다도 후스는 영국의 개혁자였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 ca. 1328~1384)의 사상에 크게 심취하였다. 영국의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위클리프는 세속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교황청의 주장은 어떠한 성서적인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영국 정부로 하여금 부패한 성직자들을 해임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는 교회의 신뢰성 회복을 외치며 강력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에 의해 1377년 정죄를 받았고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이단 판결을 받았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하위직 성직자들과 보헤미아 지방의 개혁자들에게 널리 영향을 주었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저술들의 일부를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후스는 또한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하여 보급하였다. 그는 모든 믿음의 원천을 교황의 말이나 교리가 아닌 성서에 두었고, 교권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하였다. 후스의 개혁운동은 당시 조국이 처한 역사적인 현실과 맞물려 있었다. 정치적으로 보헤미아는 독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독일의 황제들은 보헤미아 지방에 독일어를 사용하도록 하고 독일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교회 정치적으로 체코의 교회들은 교황청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후스는 1398년부터 프라하대학교 철학부에서 강의했고 1402년부터는 프라하대학의 베들레헴 채플에서 설교자로 일했다. 이 때 그는 대중적인 설교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설교를 통해 교회개혁과 신자들의 도덕 개혁을 강조했다. 1409년 후스는 프라하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총장 취임사에서 후스는 겉치레가 아니라 겸손과 헌신적인 태도로 대학과 교회를 섬기겠다고 자기 신앙고백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걷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적인 설교는 당시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봉건 영주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1412년은 후스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기였다. 당시 프라하에서 면죄부가 판매되었고 이에 항의하던 젊은 사람들이 죽자 후스는 면죄부 판매를 맹렬히 공격하고 교황청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프라하 시민들과 가난한 계층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교황청은 체코 지역의 교회에 성무금지령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예배행위 금지로서 형벌의 일종이었다. 후스는 자신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그해 그리스도에 대한 항의서를 작성하고 프라하를 떠나 시골마을로 도피하였다. 도피해 있으면서도 후스는 프라하에 남아 있는 동료들과 시민들과 서신을 통해 교제하며 복음의 약속을 굳게 믿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강조하였다.
 
   1414년 말 교황청은 골치 아픈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후스는 체코 지역의 교회를 변호하고 성무금지령을 해제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변이 위험할 것을 염려한 그의 동료들은 만류하였지만 후스의 결심을 막지는 못했다. 그해 113일 후스는 콘스탄스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128일 체포되어 여러 곳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감옥에 갇힌 후스는 1515년 초 프라하 시민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감옥에 앉아 있으나 부끄럽지 않습니다.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도록, 나를 위해 주 하나님께 간구해 주십시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이 하나님 안에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후스는 감옥에서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극복하며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곳에서 후스는 더욱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갔다. 콘스탄스 공의회에 참석했던 신부들이 후스를 설득하여 공의회 결정에 복종할 것을 설득하였지만 후스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후스는 이단으로 선고받아 141576일 콘스탄스 화형장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화형에 처해 진 날 사형 집행자들이 후스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할 기회를 주었지만 내가 위증하지 않는 한, 나는 스스로 철회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결연함을 재차 확인하였다. 그의 화형 순간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후스는 화형대로 와서 무릎을 꿇고, 두 팔을 펴서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매우 경건하게 시편으로 기도하였다고 한다.: ‘여호와여,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님 안에서 나는 소망하였다.’ ‘주님, 당신의 손에’. 그의 유골은 라인 강에 뿌려졌다.
 
   후스의 폭력적인 죽음의 소식이 전해지자 프라하 시민들을 비롯하여 체코 왕국에서는 전 민족적인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하층계급부터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체코의 국민들은 연대 서명을 하여 콘스탄스 공의회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그만큼 후스는 체코 국민들에게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후스의 종교재판관 중 한 사람이었던 에어푸트(Erfurt) 대학의 교수 요하네스 자카리우스(Johannes Xacarius)에 의하면 오늘 우리는 한 마리의 거위(Hus란 말은 체코 말의 음역은 ‘goose’거위를 의미)를 불에 태우지만, 일백 년 후에는 백조 한 마리가 등장할 것이다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여기서 백조(swan)는 물론 루터를 가리킨다. 자카리우스의 무덤은 에어푸트 시의 검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본당 제단 아래 있다. 이 무덤 옆 돌 제단 위에서 1505년 여름 마르틴 루터는 신부가 되겠다고 당시 수도원장 요한 스타우피츠(John Staupitz) 앞에 엎드려 서원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역사적인 중대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후스가 처형당한 까닭은?
 
   후스의 개혁운동은 당시 그가 가르치던 대학교 교수진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 독일인 교수들과의 마찰을 통해 시작되었다. 후스를 비롯하여 체코 교수들은 독일인 교수들이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에 대해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후스는 위클리프의 명성과 그의 가르침은 이단과 전혀 다르다고 변호했다. 논쟁의 초점은 성만찬 교리였다. 후스는 교회에서 성만찬을 베풀 때에 평신도들에게도 빵과 포도주를 주었다. 이종배찬을 실시한 것이다. 그는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의 부도덕함을 공격하면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했다. 그의 성직자들에 대한 신랄한 공격은 교황청의 분노를 일으켰다. 후스는 사악한 사제들이 거짓 면죄부를 판매하고 빌스낙(Wilsnack)에서의 피 묻은 성체의 빵과 같은 사이비 이적들 그리고 유물숭배 등으로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오로지 교회의 머리이시며 성서만이 우리 신앙의 최종권위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교권과 세속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후스의 개혁운동은 보헤미아 지역의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전개되었다. 후스는 서민들뿐만 아니라 귀족들로부터도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보헤미아 지방의 위클리프 추종세력들을 교회로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교황청과 보헤미아 지방 귀족들 간의 흥정이 성사되었다. 마침내 후스는 1515년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처형되었다. 후스는 자신의 사상은 성경에 근거해 있다고 심문관들 앞에서 호소했지만 성경에 대한 그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화형에 처해지기 전 저술한 글에 그의 결의에 찬 신념을 잘 말해준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지키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배우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그것은 진리가 너를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케하기 때문이다.”
 
   후스의 주된 연구 주제는 교회였다. 그의 교회론은 교회에 관하여(De Ecclesia, 1413)란 글에 잘 드러나 있다. 당시 그의 교회관은 전통적인 교회론를 배척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후스 당시 교회의 정치 권력화와 사제들의 도덕적인 부패에 대한 비판은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비판이 후스를 화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원인은 보다 근원적인 데 있었다. 후스는 교회를 예정된 자들의 공동체로 정의하였다.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된 자들뿐이다. 다시 말하면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나 성직자들이 자동적으로 예정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지상의 교회는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당시 교회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후스가 프라하대학교 총장에 취임할 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22:14)라는 요절에 기초하여 취임 연설을 했다는 것은 우연히 아니었다.
 
   자! 그러면 누가 예정된 무리에 포함되는가? 후스의 대답은 이렇다.: ‘그리스도의 법을 공개적으로 어기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일원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 과연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 수 있는가? 죄를 짓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후스는 를 예정되지 못한 표식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면서 후스는 예정이란 성도들의 도덕적인 삶에서 확인된다고 하면서 예정된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신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후스는 성도들의 도덕 개혁을 철저하게 주장하여 당대 교회의 부정부패를 개혁하려 하였다. 후스는 교회의 가장 큰 권위자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도들이 따라야 것은 교회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이고, 성경 해석의 권위는 마기스테리움’(Magisterium), 즉 가르치는 직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만이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후스는 교회와 세상, 개인과 정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판단되고 운영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세상 통치자들의 질서도 그리스도의 정의와 법에 맞춰야 한다. 이처럼 후스는 교회의 구조와 권위체계, 운영 방식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다. 이같은 후스의 개혁적인 교회관은 체코 교회와 성도들에게 광범위하게 지지를 얻었다.
 
후스가 남긴 유산은?
 
   중세 사회에서 후스란 이름은 일종의 이단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그의 추종자들 역시 이단세력과 동의어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후스 추종자들은 후스파’(Hussites)란 이름으로 교회 개혁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후스파의 종교개혁 강령은 ‘4개의 프라하 조항’(1420)에 잘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제들에 의해 자유롭게 선포될 것, 이종성찬을 시행할 것, 사제들로부터 모든 세속적인 지위를 박탈할 것,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죽음을 면치 못한 죄를 지으면 처벌할 것.”
 
   후스파는 기존 가톨릭세력과 세속적인 권력 양자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교를 무릅쓰고 초대교회를 본받아 공동 소유의 삶을 실천하였다. 나중 그들은 우스타퀴스트’(Utrakviste, 이종성찬파)로 불렸다. 또 후스파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체코 남부지역에 요새를 만들었다. 그 요새는 성경 다볼산에서 이름을 따서 타보르’(Tabor)라고 칭하였다. ‘타보르파’(Taborites)란 바로 후스파를 가리킨다. 이후 후스파는 로마교황청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온건파급진파로 나뉘었고 후자는 체코 형제단으로 이름하고 초대교회의 모형에 따라 교회를 세우려고 시도하였다.
 
   이후 체코지역은 반() 종교개혁(재가톨릭화)이 한동안(1620-1781) 진행되어 후스파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1781년 박해가 그치고 관용의 시대가 도래하여 1918년 완전한 종교의 자유 시대를 맞이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설립되어 종교자유가 모든 이들에게 주어졌다. 후스파의 전통은 1918체코형제복음교회를 통해 그 유산을 이어오고 있으며 현재 체코 인구 일 천만 명 중 가톨릭교도가 10%, 개신교도는 1% 정도이다.
 
   후스의 사상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루터는 공공연하게 후스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루터는 1519년 저 유명한 라이프치히에서 요하네스 엑크(Johannes Eck)와 논쟁을 벌일 때에도 후스의 글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믿음의 최종 근거로서 성경을 내세웠다. 루터는 후스를 화형에 처한 콘스탄스 공의회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자신을 아예 후스의 후예라고까지 자처할 정도였다. 존 칼빈 역시 콘스탄스 공의회의 부당함을 알고 있었다.
 
   위클리프나 후스는 분명 당시 교회가 저지른 범죄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들이 문제 삼았던 주제들은 훗날 개혁교회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16세기 개혁교회 운동과 비교해 볼 때 이들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들의 주장을 널리 알릴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적인 신앙은 단절됨 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16세기 종교개혁운동과 합류하여 현재까지 개혁교회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후스의 가르침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하나님 나라의 윤리 및 종말론적인 차원과 연결시켜 이해했다는 점이다. 후스는 종교적인 경건은 사회적인 차원의 영역에서 구현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프라하에서 후스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사제와 평신도, 의인과 창녀들 사이의 경계선을 철폐하려 노력하였다. 교회에서 일체의 계급구조는 타파되었다. 제단 위의 성만찬에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다. 후스는 교회와 성도의 철저한 도덕 개혁을 강조하였다. 신앙이란 선행을 통해 촉진된다. 신앙은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행해야 할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신자들의 구원을 위한 선행이 요구된다. 루터가 오직 믿음만을 강조했다면 후스는 사랑에 의해 형성되는 믿음’(fides caritate formata)을 강조했다. 어쩌면 후스의 사상은 루터나 칼빈보다는 중세스콜라주의자들의 도덕신학에 더 가깝다. 오늘날 체코계열의 신학자들, 즉 얀 밀리치 로호만, 로마드카, 밀란 오포첸스키 등은 후스야말로 단순히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아니라 제1의 종교개혁가로 자리매김한다. 체코가 합스부르크가로부터 독립한 이후 후스는 민족주의자로, 또 공산화 이후는 미완의 혁명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후스의 역사적 유산은 교회개혁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세워보려 했던 그의 열정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후스의 하나님 나라사상과 루터와 칼빈의 믿음에 의한 칭의가 상보적으로 만난다면 제3의 종교개혁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지 않을까?
 
(기장 회보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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