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
 
 
 
이기영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자 베드로후서1:3-11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5-07-18 (토) 10:53 8년전 3662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자                 베드로 후서 1:3-11

                                                 2015-07-19 YMCA원로회에서

1. 시작의 말

본 서신은 신앙적으로 위기에 빠져있는 그리스도인을 구출 하는 영적 지식이 담뿍 담겨있는 알찬 서신입니다. 이 서신의 주요 관심사는 거짓교사들에 맞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지식을 가르쳐 주자는 데 있습니다. 이 서신에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가득 차 있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려는 자들을 위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라는 말을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은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를 거침없이 드러내 보이신 사건입니다. 또 사도들의 교훈의 중심은 이 예수 그리스도와 내적으로 영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하려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성서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업적을 남기고 간 위대한 인물들의 모습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조용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간 더 많은 수효의 신앙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평범하면서도 착실하게 세인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알차게 견실하게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요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평범한 생활인이며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자는 제목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2. 성서가 보여주는 참된 삶은 무엇일까요?

성서가 보여주는 사람됨의 삶이나 참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힘써야 할 바는 무엇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실로 우리자신의 품성 그 자체입니다. 인격의 품위입니다. 신앙적 인격의 품성입니다. 믿음이 기초가 되고 그 위에 우리의 인격의 품위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높일 수 있는 조화된 품성을 도야시켜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의 진정한 향기로운 열매는 과연 삶 자체의 인격적 품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의 저자는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인격이란 무엇입니까? 다시 정리해 봅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활동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알려는 학문적 활동, 둘째는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추구하는 예술적 활동, 셋째는 무엇이 옳고 의로운가 하는 것을 찾는 도덕적 활동입니다. 정리해보면, 학문적 활동의 목표는 진()이고 도덕적 활동의 목표는 선()이고 예술적 활동의 목표는 미()입니다. 여기서 진,,미가 나옵니다. 학문이 진리를 찾을 때 쓰는 도구가 지식입니다. 도덕에서 선을 찾는 도구가 ()입니다. 여기서 지정의(知情意)가 종합되어 갖추어진 것을 철학적으로는 인격(人格)이라고 합니다. 빌헬름 딜타이라는 철학자는 훌륭한 인격자는 지식과 질서와 아름다움을 종합적으로 균형 있게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인 것은 포함하지 않았었습니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인 거룩, ()은 따로 두었습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훌륭한 신앙인을 이야기 할 때 인격이라는 이야기와 연결시켜 본 적이 지금까지는 적었다는 것은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나타난 큰 낱말은 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그리고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겠습니다. 이 낱말들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국면입니다. 첫째 약속이란 구원의 약속과 그 성취로써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둘째 멀리 떠나는 사람의 정욕과 그 죄과의 세력에서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는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과 목적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나눔이란, 하나님의 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짐입니다. 곧 그의 도덕적 품성, 그의 거룩한 목적, 그의 구원하는 사랑, 그의 새롭게 하는 빛, 그의 공정에 대한 관심, 그의 무한한 연민, 그의 순결한 정의, 그의 승리적이요 우주적인 섭리 속에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본성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피상적 모델로 보다 내재적 능력으로 모십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2:20). 바울이나 베드로는 예수님과 사귀는 체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받고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로 즐거워 하였습니다(벧전4:13). 그리스도의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인 것입니다(벧전5: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졌으니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고난 당하고 그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신앙에 앞선 성령의 강조에서 신앙을 어떻게 정의했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인간본성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고귀한 선물이다. 신앙은 성령의 빛이다. 이 성령의 빛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이 조명되며 우리의 의지가 확고해진다.고 첫 번째 신앙문답서에서 정의 하였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신앙을 성령론 속에서 다룹니다. 이것은 신앙이 성령의 선물이며,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성령을 먼저 말하지 않고는 신앙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신앙보다 성령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칼빈을 따르는 장로교, 개혁교회의 특징인데, 이점은 칼빈의 칭의론을 루터의 것과 비교할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칭의론은 신앙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구원론의 핵심교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행위와 노력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찾아 오시고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해지고 깨끗해져서 의로워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용납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강조하는 바가 서로 크게 다릅니다. 루터는 신앙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는 여김을 받는다는 이 주장에서 강조점이 신앙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칼빈은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강조점을 둡니다. 칼빈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근거는 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고, 신앙의 주체는 우리의 종교적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라고 분명히 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신앙을 일으키는 일이며, 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Inst., III. i.1-4).   

 

3. 하나님의 본성을 받고 나눈 삶을 산 역사적 일꾼들

요한 웨슬리는 1736년 정월 말, 조지아주 사반나를 향해가던 선박 심몬즈(Simmonds)호는 대서양에서 일련의 폭풍을 만났습니다. 바람이 몰아치고, 배는 부서질듯이 삐꺽거리고, 파도가 뱃전을 두둘겨 대었습니다. 야윈 체격의 한 젊은 성공회 목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다른 이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였으나, 스스로는 죽음 앞에서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모라비안 신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파도가 배 위에까지 밀려 올라와 중간 돛대를 산산조각으로 부수어버리는 데도, 모라비안들은 고요히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폭풍이 지난 후 웨슬리는 한 독일인에게 놀라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천만에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웨슬리는 다시 여자들과 아이들은 무서워하지 않았습니까? 고 물어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여자들과 아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는 것이 그 모라비안의 대답이었습니다. 후에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이날이 내 생애에 중 가장 영광스런 날이었다.

그러나 조지아에서의 웨슬리의 경험은 좋은 것이 못 되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의 생활은 탐식자들, 주정뱅이들, 도둑들, 살인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백인 식민들은 그의 엄격한 예배의식을 협오 하였고, 혹은 교회내에서 부인들의 화려한 장신구와 사치스런 옷차림을 금지한 사실들에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또한 웨슬리는 최고 행정관의 18세난 조카딸 소피 흡기(Sophy Hopkey)와의 연애사건에 빠지므로써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소피는 웨슬리의 경쟁자를 그녀의 남편으로 선택했고, 실연한 요한은 그녀를 수찬 금지에 처했으며, 그녀의 남편은 요한을 아내에 대한 명예훼손에 고소해 재판이 장기화 됨으로 요한은 6개월 후 실의에 차서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식민지에서의 경험을 돌아 보았습니다. 나는 인디안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아메리카로 갔었는데, 그러나 과연 나는 누가 회심시키겠는가?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38년 5월14 새벽5성경공부시간에 본문 중 벧후1:4우리는 그 영광과 능력을 힘입어 귀중하고 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덕분으로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 이 말씀을 읽고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가 그 날 밤에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모임에 참석했다가, 역사적인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는 중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중세기의 유명한 한 수도원장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에서 겸손에 숨은 은혜의 장에서 사람의 가치는 환상이나 그가 즐기는 오락이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그가 만드는 높은 위엄에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겸손 위에 서 있는 그의 인격,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진 그의 마음에 있다.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순결하고도 변치 않는 진실한 마음으로 찾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회심과 함께 우리의 인격 안에서 끈기 있게 성장하는 과정으로 나타나는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가르침을 로마서에서 강조했습니다. 내촌감삼은 성화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심령 속에 역사하여 죄와 더러움을 지적하고 이것을 제거하는 길을 가르치며, 죄의 뿌리, 죄의 세력, 죄의 결과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갖추어야 할 모든 덕과 하나님의 능력을 채우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우리들 속에 완성하시려는 은혜의 역사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화란 사람의 내심의 문제이다. 즉 사람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속(심령)에 이룩되는 일이다. 즉 우리들의 심령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모습에까지 개조되어가는 일이다.(John Wesley: Journal 1739.9.13) 또 성화해진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손실의 경우도 고통스런 때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경우 그 말에도 행동에도 하나님을 입증하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뜻을 나타낸다.(John Wesley: Journal 1744.12.2)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공동버역: 4:13)라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인격이나 품성이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성장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란 하나의 방향전환입니다. 신생(新生)에로의 촉매점(觸媒点)입니다. 그 믿음을 기점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품성(品性)에 이르려는 성장과정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자기에게 믿음 없음을 탄식하고 사랑이 부족함을 탄식하기도 하고, 겸손과 아량의 결핍을 문제 삼기도 하지만, 사랑이 끊임없이 솟아나올 수 있는 우리의 인간성 자체, 믿음과 겸손과 아량이 샘솟을 수 있는 우리의 풍요한 품성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수가 많습니다. 열심도 그렇고 선행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주옵소서, 사랑을 주옵소서, 겸손과 아량을 주옵소서, 혹은 열심을 주옵소서. 하는 식의 기도보다는 그런 값진 것들을 끊임없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우리 삶의 체질자체를 개선하기 위한 유의와 관심과 노력과 기도가 더 우선적이고 필요한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의 체질개선- 그것이 우리 신앙훈련의 우선적인 것이고 기도의 큰 제목이어야 합니다.  

 4. 한국교회사 속의 숨은 이야기들

1)한국교회사에서 목회자의 인간적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언더우드 목사와 모펫 목사의 싸움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지금은 갈라져 있지만 옛날에는 모두 같은 장로교였는데 그 장로교의 조상이 언더우드와 모펫입니다. 쉽게 말하면 기장은 언더우드 형의 신앙이고 예장은 모펫 형의 신앙입니다. 서북쪽의 기독교를 모펫이 만들었고 비서북(서울)의 기독교는 언더우드가 만들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꼭 민족의 위기에 분열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신파의 분열은 해방 후에 갈라졌고, 기장과 예장은 6.25전쟁 때 갈라졌습니다. 한국에 통일과 일치와 화해의 에너지를 주어야 할 찰나에 한국교회는 갈라셨습니다. 그리고 통합과 합동은 4.19때 갈라졌습니다. 한국교회는 민족이 교회의 힘을 제일 필요로 할 때 갈라진 것입니다. 왜 그러한 것일까요?

교회사 가들은 말합니다. 민족이 분단되고 어려운 때이므로 정통개념이 예민해 지고 신경적으로 신학적인 옳은 길을 찾고 정통주의를 찾기 때문에 깨어지는 것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민족이 어려운 때일수록 신학의 정통성, 신앙적 정통성에 대한 관심은 조금 무디게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연세대학의 자리는 옛날 이태조(성계)가 서울로 삼으려던 집터입니다. 그래서 좌청룡 우백호 그리고 뒤가 무악산으로 가운데로 물이 흘러 갑니다. 그런 곳을 흔히 명당이라고 합니다. 연세대학 안에 이조 시대에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어머니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9.28 수복 때에도 연세대 뒷산을 점령해야 서울을 수복하는 것이라 해서 거기서 미군 해병대 대령만 7명이 죽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었습니다.

연세대를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언더우드가 30만평을 사서 세웠습니다. 그가 그곳에 연희전문을 세우려 할 때 모펫은 평양신학교와 숭실전문이 있는데 왜 또 학교를 세우느냐며 반대했습니다. 언더우드가 환갑을 3년 두고 죽었는데 언더우드의 아들이 쓴 책에는 모펫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에 모펫 2세와 언더우드 3세가 서로 만나도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희 전문을 세운 후 모펫이 자기 아버지를 10년을 괴롭혀 미북장로교에서 언더우드의 교장 직을 인정하지 않아 그는 속이 타 죽었다는 것입니다. 언더우드 집안에서는 모펫을 원수의 집안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펫은 완전히 보수적인 사람으로 서북장로교를 형성했고, 언더우드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신학을 가지고 서울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기장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다 중산층의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위의 글은 <연합신학대학원 소식>에서 인용한 것인데 년도와 호수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2)한국교회사에서 남강 이승훈(1864-1930)선생의 신앙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자수성가한 실업가요 오산학교를 설립,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민족적 힘을 키운 교육자요, 105인 사건과 3.1운동에서는 그의 고난과 투지로 하여 돋보여진 탁월한 민족운동가였습니다. 그는 가난하여 제대로 학업을 닦지 못한, 자기의 표현을 빌면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남강으로 남강 되게 한 것은 교육과 민족운동에서였습니다. 이것은 도산 안창호로부터 듣고 깨달은 바 이었고, 그것을 실천한 것은 기독교신앙이었습니다. 그에게 신앙이야말로 그의 일생을 관통하면서 위대한 선구자로 만드는 에너지였습니다. 그는 신앙을 통하여 고난을 체험하면서도 그것을 인내로 극복하는 법을 터득하였고, 고난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사상을 세련되고 고상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의 행동에 절제의 미덕을 부여하였으며, 편파적이기 쉬운 민족운동을 보편성에 입각하도록 하였습니다. 고집스러울 만큼 외골수의 모난 인격을 연마시켜 드디어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의 인격자로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그는 105인 사건 때 한때는 제주도 유배생활을 했고,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당시 2년여의 감옥생활은 예수님 십자가를 생각하며 기도, 인내, 고난을 견뎌냈습니다. 남강은 52세 때 1912년에 평양신학교 학업을 3년간 한바 있는데, 그 때 구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크게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남강은 그의 신학과정을 몇 가지 감사하고 있습니다. 1) 그의 신앙이 감사하는 인격으로 성장해 갔다는 것, 감사선생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2)신학교에서 폭넓은 인간관계 53세가 됐으나 연소한 동기, 선후배와 교제, 인격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함태영목사는 3.1운동 때 결속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남강은 3.1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한바 있어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통합거족적 민족운동으로 발전 시켰습니다. 독립운동과 독립사상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한 것이었다고 관헌 앞에서 진술하였습니다. 감옥에서 똥통청소는 맡아서 했고, 때로는 감옥 안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바울의 빌립보 감옥을 연상케 했습니다. 감옥생활 중에 구약을 20독 신약을 100독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부정의 신앙을 터득한바 있고, <성서조선>그룹에도 연계했습니다. 5년간 유배 및 감옥생활을 한 후에 오히려 민족사랑의 계기가 되었고, 출옥 후에 세례를 받고 오산학교 장로가 되었고 교육과 민족운동의 위대한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만열, <역사에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한국기독역사연구소, 2007. 39-86 참조)

 5. 마감 정리를 위하여

본문의 저자는 우리의 신앙이 인격과 품성의 성장과정을 통해서 꽃피우고 열매 맺힐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십시오.(벧후 1:5-8 공동버역) 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덕의 기초입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하신 말씀에 대한 참된 확신입니다. 그리하여 그 약속에 우리자신을 맡기고 그 명령을 준행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의 충성에 따라 옵니다. 믿음은 전체에 관련됩니다. 신자의 생활은 진리 추구를  향해 가는 순례의 길입니다. 믿음은 교향곡의 주제와 같고 모든 덕은 그것을 지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여러 가지 덕이 따릅니다. 덕이 아무리 좋아도 맹목이 되어서는 안되고 건전한 지식의 지도가 필요합니다. 지식은 견식과 이해를 뜻하며 진리에 속한 박식과 잘 훈련된 지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은 교만하기 쉬우니 절제(자제)가 필요합니다.

여기 절제란 적극적 자세를 뜻함이요 금욕적 자기부정이 아닙니다. 고난을 견디는 능력도 뜻합니다. 자제 절제는 인내로 인도할 것입니다. 인간고에 부닥칠 때 희망을 가지고 견디는 것입니다. 희망과 건설적 항구력으로 견디는 적극적 태도입니다. 인내는 경건에 관련될 것입니다. 경건은 신앙심이 깊은 성격을 말합니다. 그것은 종교적 감상이나 정서라기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깝게 느끼는 태도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관찰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태도입니다. 경건은 형제우애와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형제우애는 사랑으로 흘러야 합니다.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 최대의 덕이며 성령의 제일의 은사(고전13:13)입니다. 일곱 개의 덕이 구슬을 하나의 금줄에 꿴 것입니다. 일고개의 은사를 인격화한 것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우수(憂愁)의 도식(圖式)에서, 인간의 비참한 역사는 일종의 구속사(Heilsgeschichte)가 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토인비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갈대아의 문명이 한 바퀴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시대의 깊은 우수를 체험한 이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같은 높이의 영성을 가진이가 났고, 애굽 문명의 수레바퀴가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때에 역사의 비극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에서 모세가 났으며, 바벨론 문명의 바퀴가 넘어가는 시절에 이사야가 났으며, 헬레니즘의 비극의 종막에 바울이 났고, 또한 로마제국의 영원한 도시 로마가 게르만의 알라릭의 말 발굽에 유린당하고, 그 불길에 무섭게 타오르는 시절이 어거스틴을 산출한 것입니다. 시대의 우수를 이렇게 경험할수록 사람들의 영은 더 높은 경지로 승화합니다. 이러한 신학적인 조망 아래서 토인비는 역사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인비는, 상정할 수 있는 최고 최종적인 영도자는 나사렛 사람 예수와 같은 종교가로서 한 개인 한 사람의 심령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인 서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향도하며 시대의 방향을 그리로 이끌고 나아가기 전에는 현대서양문명이 당면하고 있는 것 같은 난국을 타개할 길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정대위, <그리스도교와 동양인의 세계> 한국신학연구소. 1986. 281-299참조)

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나아갈 길은 품성의 도야, 우리인격의 온전한 변화- 거기 신앙의 참된 삶의 가치와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옛 그리스도의 위대한 정신과 얼을 닮은 인격자가 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접촉되고 동화되어 예수의 인격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성육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시대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아 하나님 선교를 특별히 평화 위해 일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되게 되는 것입니다. (4:13. 공동번역)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츲ҺڻȰ ⵵ ȸ ѱ⵶ȸȸȸ ()ظ ѽŴѵȸ μȸڿȸ ȸ б ѽŴб ûȸȸ ŵȸ ŵȸ ȸÿ ѱ⵶ȸȸͽ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