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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오 주님, 주는 나를 감찰하셨고 아셨습니다

이기영 (전남노회,,목사) 2015-08-29 (토) 15:07 8년전 2893  

, 주님, 주는 나를 감찰하셨고 아셨습니다        시편 139: 1- 12

(O Lord, You have searched me and known me)          2015-09-06, 13

 1. 피할 수 없는 하나님(The Inescapable God)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다섯 번에 걸쳐서 주께서 나를 아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알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나는 몰랐습니다. 나는 스스로가 이런 존재인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성, 존재의 보편성, 행위의 전능성, 사람에 대한 심판 등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로 사람의 전인격과 모든 행위를 완전하게 관찰하시고 아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139:1-6). 이어서 하나님은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아니하시고 온 우주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은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7-1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으로 사람을 신비하게 창조하시고, 주권적 섭리에 따라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13-18). 다윗은 하나님과 그를 대적하는 악한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호소하며(19-22), 하나님께서 그를 살피셔서 그가 악을 떠나 영원한 길을 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23-24). 이상의 내용을 다윗은 이 시편에서 고백하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편재성, 지성, 그리고 창조성과 같은 개념을 알리려고 할 때 한 고전적인 증거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의 사상을 추상적인 신학적 정의에 따라 구체화 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의 삶이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하나님의 현실에 대한 개인적 경험의 영역을 통하여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 하나님에 관하여(about) 객관적으로 진술하지 않고 -(I-Thou)의 인격적 관계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에게 직접 말하듯이 아룁니다.

또한 이 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두려움과 놀라움의 동시적 상호작용과 하나님에 대한 헌신적이고 신뢰할 만한 복종의 동시적 상호작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인은 자신의 생을 돌아 볼 때, 그 생을 언제나, 하나님의 감찰의 눈 아래에서 봅니다. 어디에서 그가 보듯이 또는 그가 조용히 서있든지, 걷든지, 앉든지, 눕든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어디에서나 그는 하나님의 눈을 만납니다. 실로 하나님은 그가 말하기도 전에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알고 계시고 멀리서도 그의 생각을 식별할 줄 아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7) 그는 어떤 공간에 매여 계시지 않습니다. 하늘의 가장 높은 곳   뿐만 아니라 지하의 가장 깊은 곳에서도, 새벽이 동터오는 가장 먼 동쪽과 동시에 해가 바다 속으로 잠기는 먼 서쪽에서든, 그 어느 곳에서도, 비록 그가 빠른 속도로, 새벽날개로 하늘을 가로 질러 도망하여도, 하나님은 그를 사로잡고 그를 붙드실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전지성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의 기초를 발견합니다. 이 하나님은 그의 심장을 꿰뚫어 보시고 그가 고통에로 인도하는 길을 걷는지, 생명에로 인도하는 길을 걷고 있는지를 알고 계십니다. 모든 것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한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오직 한 분이시다. (A. Weiser, The Psalms, <국제주석 II> 505-516 참조)

 2. 인간이해에 대한 논의들; 라는 인간을 안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 살면서 발견하고 경험하는 것의 실제적인 것은 신비한 것들입니다. 1965년에 프랑스의 바울 브로카 라는 학자가 사람의 양쪽 두뇌가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학설을 발표한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두뇌기능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다양한 Brain Research로 신경학, 뇌신경학, 심리학을 연결, 뇌의 기능을 연구하여 새로운 학설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자세한 학설을 말하려는 게 아니고 상식적인 것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람의 왼쪽 대뇌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 언어장애를 일으키거나 기억이 상실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른쪽 대뇌가 상처를 입었을 때는 언어기능에 별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왼쪽 대뇌는 수학적 분석적 논리적 기능을 담당하고, 오른쪽 대뇌는 예술적 기능인 창의력과 감정, 곧 비합리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부, 특히 오늘날의 교육은 주로 왼쪽 대뇌가 담당합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하게 왼쪽 대뇌에 치중해서 많은 지식을 주입하므로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반면에 창의력이나 예술성 방면으로는 너무 경히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요즘의 교육계는 전 두뇌교육(whole brain education)이란 과제를 내걸고 종합적인 정서교육과 실천교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관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뇌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해서 논리적으로 추리하고 상상하여 또 다른 원리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할 문제는 지식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무진하게 알 수 있고, 언제든지 알 수 있고 어디까지 언제까지 알 수 있습니까? 그 한계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젊었을 때에는 기억력이 좋으나 나이가 들수록 그 기억력이 없어집니다. 반면에 판단력과 의지력은 강해집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70, 80된 분들이 대법원 판사 같은 중책을 맡기도 합니다.

나아가 내가 지식의 주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내선입관, 내 경험, 내 감정, 내가 가진 전체이해가 나를 가로막을 때에, 내 욕심이 나를 가로 막을 때에 지식이 올바로 입력되지 않을 뿐더러 설사 입력되었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지식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가 싹 뜨고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의 주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알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지식보다 이미 그 지식 안에 내가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심리학자는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다(to know self is to be known by another)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 것은, 내가 아는 가 있고, 다른 사람이 나를 먼저 알고, 더 잘 알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내가 옳은 것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 내가 옳은 것입니까? 내가 나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내가 나를 잘 모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내가 나의 나 됨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는 내가 더 정확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서부터 인격자가 되고 덕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밑에 있는 사람에게 알려진 바의 나, 그 지식에 비쳐진 나를 바로 인식할 때에 비로소 바른 지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3. 신앙적 인간이해    

올바른 신앙적인 인간이해를 위하여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중심으로 고찰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칼빈은 우리가 가진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내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기독교강요> 1)라는 말과 함께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인간은 자신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먼저 완전하신 하나님을 숙고하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은 바로 아주 비참한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전락한 비참한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비로소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인간에 대해 말하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성경의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엄 앞에 선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당한다고,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기독교강요> 113).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빛처럼 강렬한 거룩함으로 그들에게 나타나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13:22).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압도적인 두려움을 체험했고, 죽음의 공포로 쓸어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칼빈은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Inst.1.i,3)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욥과 아브라함과 엘리야의 경우를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합니다(38:1이하; 18:27; 왕상19:13).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장면은 거룩한 분과의 만남에서 우리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매우 잘 말해주고 있음을 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다가 와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대로 깊은데 가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심정은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 무릎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5:8). 이처럼 거룩한 분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앞에 하나님 말씀 앞에 섰을 때, 자기자신이 어떤 존재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예를 들면, 시편 51편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이다(51:3-4).

칼빈은 두 지식의 관계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하더라도, 먼저는 전자에 대해 논의하고 다음으로 후자를 논의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입니다. 이것이 칼빈의 사고의 핵심이고, 개혁교회신학의 핵심원리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언제나 함께 합니다. 그런데 우선적이고, 앞서 있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출애굽공동체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서 인도하고, 그 뒤를 출애굽백성이 뒤따랐던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언제나 앞서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뒤따르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의 신 인식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신대로, 계시하시는 대로 믿는 것, 바로 이것이 칼빈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입니다. 또한 이것이 20세기 칼빈의 해석자로 유명한 칼 바르트(K. Barth)의 신 인식론, 신학 방법론의 핵심원리가 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하고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생명이 다 하나님의 빛 앞에 있는 것처럼, 우리인간은 다 하나님의 지식 앞에 노출된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비밀이 있다고 내가 착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비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다려 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야다가 쓰인 재미있는 말씀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4:1), 요셉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1:25), -여기서 동침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야다 입니다. 야다는 본디 안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알았다. 그랬더니 아들을 낳았다- 이것이 안다는 뜻으로 아주 깊은 관계를 말하는 것이요, 아주 깊은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것은 전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직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알다야다와 마찬가지로 깊은 체험을 통해서 얻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이것은 완전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비밀이 없습니다. 다만 이 지식 앞에서 우리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다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지식, 그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십니다. 다 아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내 허물도, 내 죄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3:14).- 내가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다고, 그런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4. 하나님의 전지, 전능, 무소부재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우리인간의 삶에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진실을 찾기를 기다리고, 언젠가 깨끗한 마음으로 고백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수립을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내 모든 죄를 아시고, 인간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매우 큽니다. 탕자가 집을 나설 때부터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모습으로 아들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렇게 다 아는데 무슨 구구한 설명이 필요합니까? 아버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엄청난 지식 안에 내 현실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나는 몰라서 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내 실패, 내 질병, 내 고통, 내 역경은 하나님께서 나를 모르시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사랑하십니다. 다 알고 사랑하시는 그 안에 내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과 지식밖에 버려진 존재로서의 나의 현실이 있다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실패하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그 실패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a thorn in my flesh)(고후2:7) 때문에 평생을 고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이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수없이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깨닫습니다. 그 자신은 자칫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서 내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이라고, 이 고통을 주신 것이라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나는 나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다 아시고 나를 당신의 선한 길로 인도 하십니다. 꼭 우리가 알 것은, 현실이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안에 있는 것임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어렸을 때부터 무척 방탕 했습니다. 그 어머니 모니카가 그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방탕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어거스틴은 로마로 가겠노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완강하게 이를 만류했습니다마는, 그는 끝내 자신의 뜻대로 로마로 갑니다. 당시 어머니는 몹시도 괴롭고 걱정스러웠지만, 그 결과 어거스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로마에 가서 암부르시우스를 만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33세에 회개를 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뒤에 St. Augustine이 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그를 로마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 알고 계셨기에, 그 길을 통하여 어거스틴을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에 왜 40년을 광야에서 헤매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모르셔서 입니까? 아닙니다. 다 알고 계시기에 사랑으로 주시는 시련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있고,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심이 있습니다. 전지(Omniscience), 전능(Omnipotence), 무소부재(Omnipresence),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입니다. 그 절대적인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능력입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에 대한 지식만큼의 능력 있는 생을 평화로운 생을, 복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5. 사회적 격변기에 교회의 대응자세

우리사회는 경쟁과 승자독식이 구조화 되면서 갑은 사적 욕망을 위해 타자를 짓밟는 것을 당연시하고, 을은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의식이 내재화 되었습니다. 우리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어 갑니까? 세계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 심화하는 청년실업, 최저수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극단적 능력주의와 물신화가 판치는 세상에 최소한의 윤리도 내팽개치고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신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판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사회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요? 그 답은 그래도 좀 잘 나간다는 한국천주교 수장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국가 정보원 대선개입을 규탄하면서 거리로 나선 사제단을 향해 지금은 반정부 활동보다 대중의 현실적인 필요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실망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서울 강남일대에 들어선 수 천억 대의 교회들은 어떻게 지어졌겠는가? 최근 종교세 납부에 대한 여론이 일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종교세 납부에 환영한다고 뜻을 밝혔고, 반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은 반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종교인도 국민의 납세의무를 시행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고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는 일반적인 악인들뿐만 아니라 탐욕스런 성직자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는 클레멘스 5세를 비롯한 교황도 여럿 있습니다. 아마도 현세를 지옥처럼 만든 책임은 부조리한 현실 권력 뿐만 아니라 종교인들에게도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남북관계개선을 위하여 분단극복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하여 대미 의존적 한-미 동맹의 운용양식을 조정하고 한국주도로 외교. 안보 전략을 새롭게 짜야 합니다. 미국이 설정하는 의제에 우리가 왔다 갔다 하는 데서 벗어난 외교를 하려면 우리가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군사작전을 하지 못하는 나라는 나라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전시작전권 환수는 필수적입니다. 남북은 이미 7.4공동선언,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평화통일을 위한 서로의 입장을 명확히 천명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대만은 실질적 통일을 누리고 있음을 봅니다. 현재 250만 대만인이 중국에서 사업도하고 가정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맞는 통일론을 정립해야 합니다. 남북관계 개선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역사적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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